나, 로마니 여자가 겪은 유럽역사는 다르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라드밀라 아닉②

하리타 | 기사입력 2018/04/15 [10:12]

나, 로마니 여자가 겪은 유럽역사는 다르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라드밀라 아닉②

하리타 | 입력 : 2018/04/15 [10:12]

독일에서 망명신청자(asylum-seeker) 신분으로 살고 있는 난민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이 연재는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에서 발행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여 1인칭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세 번째 에세이 “유럽인들은 ‘그들의 유럽’에 우리를 원치 않는다”(The Europeans don‘t like us in “their” Europe)의 주인공은 ‘집시’라 불리는 로마니 민족인 라드밀라 아닉(Radmilla Anic)으로, 세르비아에서 자립을 원하는 여성들을 돕는 사회복지단체를 이끈 인물입니다. [편집자 주]

 

자유로웠던 시절은 가고, 끔찍한 전쟁의 트라우마가…

 

내가 독일로 온 것은 1990년대 티토 정권 때 독일에 여행자로 와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여동생의 딸이 27년째 독일에 살고 있기도 하다. 1990년대에 우리는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었다. 티토는 이를 금지하지 않았고, 로마니(Roma, Romani; 흔히 ‘집시’라고 불리는 민족)들에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누구도 노숙자로 살거나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았다. 모두들 여권, 우릴 어디로든 데려갔던 빨간 여권을 갖고 있었다.

 

티토 정부에서의 좋은 시절. 인도의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혈통이고 롬킨자(Romkinja;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로 로마니 여성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한 우리는 티토와 관계가 좋았고 서로 자주 소통했다. 티토는 슬로베니아 사람이었지만 진정한 유고슬라비아인이었기에 개의치 않았고, 로마니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공산주의 정권이었지만 우리는 잘 살았다. 요즘도 그 때와 같은 여권을 갖고 있다. 한동안 파란색이었다가 다시 빨강이 됐다. 지금도 여권으로 여행을 다닐 순 있지만 그 때가 더 나았다. 비자가 필요 없었다. 티토 덕분에 그런 장벽이 없었다. 최근 들어서야 비자 의무 규정이 폐지되어 사람들이 유럽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세르비아가 속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주석을 지낸 정치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는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내 민족, 종교, 언어 갈등을 해소하고자 ‘형제애와 통합 정책’(brotherhood and unity)을 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배제하고, 소수민족에게도 혜택을 충분히 제공하려 했다. 로마니 민족 정체성이 강한 화자가 유고슬라비아 공화국과 티토에게만은 아직까지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소련의 스탈린과 갈등을 빚고, 매카시즘으로 인해 미국과의 소원해지는 와중에도 비동맹주의 외교를 고수했다. 냉전시대 제3세계, 자유진영, 공산진영을 넘나는 실용주의 외교를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은 끔찍한 시기였다. 우리 모두 공황장애와 공포를 겪었다. 정말 정말 힘들었다. 얼마나 많은 유럽 국가들이 슬로베니아를 폭격했는지 모르겠다. 로마니들에게 이 시기는 특히 힘들었다. 아이들은 모두들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오늘날에도 우리 가운데 둘 중 하나는 갖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나도 아팠다. 심장병이 있는데, 그 때 겪은 폭탄이니 가스 때문에 시작됐다. 사람들이 다리를 전부 폭격했는데, 제대로 치우지도 않았다. 나는 고혈압과 스트레스, 공포증 때문에 매일 심장약을 먹는다. 오늘까지도 그 때의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지금은 경찰이 찾아와서 나를 독일에서 추방시키는 것에 대한 공포로 바뀌었다. 지금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이다. 안심할 수가 없다.

 

※화자가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1992~1999년 다발적으로 있었던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6개국이 소속) 모두에 영향을 끼쳤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 이탈을 선언한 후, 이를 저지한다는 목적으로 영토 전쟁이 시작됐다가 점차 민족주의 대결로 치달았다. 이 중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 정부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보스니아, 코소보에서 벌인 보스니아 전쟁(1992년 4월~1995년 12월)이 가장 참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차별적인 도시 폭격과 인종 청소, 집단 강간과 학살이 자행됐다.

 

강제수용소를 연상시키는 난민 임시숙소에서 살며

 

나는 지금 난민 임시숙소에 살고 있는데 상황이 무척 열악하다.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은 화장실을 쓴다. 아랍인들 쿠르드족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난 그들을 다 좋아하니까 상관은 없다. 내 말은 같은 샤워실에서 씻고 시설을 다 나눠쓴다는 것이다. 위생적이지 않다. 최근에는 지독한 알러지도 생겼다.

 

또 다른 문제는 저마다 상황이 다른데도 여자 세 명을 한 방에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몸이 아플 수도 있다. 다른 한 사람은 감염 때문에 막 병원에 다녀왔을 수도 있다. 거기서는 잠을 잘 못 잔다. 제대로 요리를 하거나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없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방귀를 뀌거나 기침을 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럴 수도 있고. 이런 생활은 쉽지가 않다. 수용소나 마찬가지다. 

 

▶나치 정권이 벌인 홀로코스트로 인해 고통당한 로마니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공통된 슬픔>(Shared Sorrows: A Gypsy Family Remembers the Holocaust) Toby Sonneman, University Of Hertfordshire Press, 2002

독일인들은 1941-1945년 2차 세계대전 시절, 그 때 했던 대로 하고 있다. 독일인들이 세르비아에서 로마니들을 잡아다 강제노역을 시켰던 것은 누구나 안다. 이미 벌였던 짓이다. 그 때 사람들을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었다. 옛날 히틀러 때 말이다. 세상을 다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 스탈린그라드처럼 갈 데까지 갔다. 오늘날에는 전쟁이 없는 것뿐이다. 수용소가 싫으면 본인이 나가면 된다. 그게 오늘날의 방식이다. 예전에는 마음대로 떠날 수가 없었던 반면.

 

※나치 정권이 벌인 홀로코스트는 흔히 유대인 학살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유럽에 살던 여러 소수 민족들 역시 ‘열등한 민족’으로 몰려 고통당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던 로마니들이 대거 강제 수용소로 잡혀갔고, 노역과 생체실험에 동원되었다. 25만~150만 명 가량의 로마니 인구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홀로코스트를 지칭하는 로마니어 ‘Porajmos’라는 단어가 따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내 남편은 1941~1945년 독일 수용소에 있었다. 그가 북헨발트(Buchenwald)에 있었는지 다카우(Dachau)에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남편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이 잘 살았다. 지금도 독일은 난민들이 제 발로 독일을 떠나게 만들려고 수용소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로마니들은 튼튼해서 이 모든 걸 견딜 수 있다. 두 번째로 망명 신청을 하면 바로 감옥에 보낸다는 새로운 법이 통과된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는 끈질기고 강한 로마니들이라서 버틸 수 있다. 그들이 우릴 잡아간다 해도 살아남는다. 로마니들이나 할 수 있지 세르비아 사람들 같으면 못한다. 제 발로 떠날 것이다.

 

혼자서 국경을 넘은 여성들이 희망을 잃지 않기를

 

나는 여기 혼자 왔다. 남편은 이미 죽고 없다. 나처럼 혼자인 모든 여자들은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 보호자가 없고 스스로 여자라는 자의식이 있는 이들. 이런 여자들은 항상 고독하고, 내가 그랬듯이 주변에 사람이 없나 둘러보지만 대개 아무도 없다. 다행히 내 주변에는 나의 권리를 위해 행진해주고, 지지와 보호를 자처한 독일 사람들이 있다. 독일 당국에서 나를 쫒아내려고 하면 나서서 보호해주고 체류권을 달라 목소리 낼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바로 그와 같이 여성들은 자기 권리와 인권을 위해 싸워야한다. 외롭게 홀로 오는 여자들을 돕기 위해 힘을 조직하는 작업이 모든 곳에서 벌어져야한다. 국적은 중요치 않다. 이게 내 생각이다.

 

자신의 상황을 증명할 서류 없이 온 사람들을 지켜주는 것도 중요하다. 나 역시 망명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고 오는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로마니 여성 대부분이 망명이 뭔지 모른다. 망명하겠다고 오는데 막상 어디로 가야할지, 자신이 어디로 보내질지 전혀 모른다. 오자마자 집을 구하고 좋은 조건에서 살게 될 거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재난이 뒤따르는지 모른다. 나이든 세대들은 내일 어디서 자게 될 지 모르는 이런 생활에 익숙하지만 요즘 세대들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잘 해내기 어렵다.

 

나는 긍정적으로 일이 잘 풀리길 기대해본다. 내가 앞날을 알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내 별자리는 황소자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 전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생일인 5월 15일에 체류권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나는 5가 5번이나 나오는 날 태어났다. 1955년 5월 15일 생. 우리는 결코 희망을 져 버려선 안 된다. 모든 로마니 여성들, 특히 나처럼 혼자 온 이들이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세르비아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여기 남아서 내 권리를 얻을 것이다.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끈질긴 사람이니 절대 집에는 안 돌아간다. 다른 나라로 보내져 감옥에 갈 각오도 되어있다. 황소라면 이 모든 것을 견디고 계속 걸어갈 수 있다.

 

아직도 로마니 여성조직 관련 문서들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단체를 다시 열라”고 권한다. 나는 “못해요. 체류권이 없어서”라고 말한다. 체류권이 나오면 나는 어디든지 갈 것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가 누구든, 내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니 민족의 삶과 역사,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2017년 6월 베를린에서 유럽 로마 문화예술위원회(The Roma Institute for Arts and Culture (ERIAC) 발족식이 열렸다. ⓒFrantišek Bikár (Romea.cz)

 

[번역자 노트] 한 여성이 온몸으로 겪은 역사는 틀리지 않다

 

‘집시’에 관한 내 최초의 기억은 디즈니 애니매이션 <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에스메랄다에 대한 것이다. 화면 속 에스메랄다는 맨발에 탬버린을 쥐고 아름답게 춤추고 노래하는 여성이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아름다운 에스메랄다는 자꾸만 위태롭게 쫓겼다. 말을 탄 높은 사람이든, ‘못생긴 꼽추’나 ‘푸줏간 백정’이든, 그녀를 원한다고 말하는 사내들의 눈빛과 말씨에는 모욕과 멸시도 같이 들어있었다. 멋진 춤을 선보이면 마을 사람들은 넋을 잃고 보다가도 ‘집시 계집애’라며 욕설을 내뱉고 물건을 집어던졌다. 디즈니 영화에 나오는 다른 공주들과 달리 에스메랄드는 섣불리 동경해선 안 될 사람 같았다.

 

디즈니 세대가 기억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사실, 15세기 파리의 사회상을 그린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de Paris)을 각색한 것이다. ‘집시’나 장애인(꼽추)에 대한 당대 지배계층, 종교계, 대중의 혐오와 편견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매력적인 집시소녀 ‘라 에스메랄다’는 결백하고 순수함에도 부당하게 죽임당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출신은 원래 집시가 아니라 집시 무리가 훔쳐가 기른 아이로 나온다. 거리를 떠돌며 가무로 번 푼 둔으로 겨우 연명하고, 선량하지만 무식하며, 사내들 아무나 탐내고 가지려하는 값싼 몸으로 묘사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가 아는 집시도 15세기 이미지에서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유럽 사람들은 ‘떠도는 삶의 애환이 담긴 집시음악’을 즐겨듣고, 사진전이나 TV다큐멘터리를 통해 이들의 생활을 운치 있고 낭만적이라고 소비하지만, 막상 로마니들이 자기 동네에 정착하려고 하면 온갖 법규를 들이대며 불법으로 만든다. 세금을 내지 않고 복지혜택을 받는다고 매도한다. 애환을 승화한 예술은 반기지만 그 애환을 덜어줄 생각은 않는 것이 시민권과 주소지를 가진 유럽인들이었다.

 

라드밀라의 이야기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은 그녀의 투철한 민족의식이다. 로마니라는 이유만으로 부패한 경찰과 지역 마피아의 음해와 공격에 시달렸지만, 로마니로서의 자부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대물림되어 온 박해 경험은 그녀를 매사에 철저히 민족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정형화된 학교 교육과는 전혀 다른 역사관을 갖게 만들었다. 격동의 유럽 현대를 살아온 60대 초반 여성이 풀어놓는 유럽사는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의 사회주의 시대와 잔혹한 내전, 나치에 의한 인종 학살을 관통해 21세기 유럽연합과 난민 위기로 이어진다.

 

아무리 그래도 히틀러와 스탈린을 동급으로 놓거나 홀로코스트 강제수용소와 난민임시숙소를 연결 짓느냐고 기함할 독자들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집시’ 여인이 온 몸으로 겪은 역사를 감히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서구권에서 소외되어온 동유럽, 그 중에서도 가장 무시당한 민족인 그녀의 공동체에게는 전체주의 정권 독재자로서 민중을 짓밟은 히틀러나 스탈린이 서로 가깝고, 로마니의 고통을 알아봤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자 티토와 민주당 출신 타딕 대통령이 모두 은인이다. 같은 난민이어도, 유럽에서 뒷 배경이 없는 로마니들이 더 불리한 대우를 받는다는 피해의식도 어쩔 수 없다.

 

얼마 전에 나는 바덴 뷔템부르크(Baden-Württemberg)주 소속 어느 군청의 난민 지원 부서에서 일하는 독일인 여성을 만났다. 그 사람의 주된 업무는 관할군으로 할당되어온 난민들에게 집을 찾아주는 것이라고 했다. 임대 매물로 나온 주택 물량이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에 거절의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담당자로 얼굴이 알려지자, 사무실 뿐 아니라 출퇴근길에서도 쫒아오면서 집 구해 달라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대면 업무를 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불만과 분노가 시스템을 향한 것임을 알면서도 소화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고 했다.

 

그녀에게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외국인청을 드나드는 나 역시, 담당 공무원에게 기대했던 친절과 마음 씀을 받지 못하면 그 개인에게 온통 분노가 쏠리곤 하므로. 행정체계 위, 아래에서 모두 효율성과 성과, 감정노동을 요구받는 그녀의 입장을 되도록 잊어버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한편, 그녀에게 들은 여러 지역사회 난민 현황 중 희망적인 소식도 있었다. 독일 내 난민, 망명자 인구가 늘다보니 제도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당사자들 간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그나마 보완되고 있다는 얘기였다. 망명신청자들이 근래에는 그 네트워크를 통해 통역사를 구해오고, 관청에서 미처 모르는 주택 정보, 민간 프로그램을 알아오기도 한다고 했다. 여성 조직도 속속 생겼다. 결혼생활에서 학대와 불화에 시달리던 무슬림 여성들이 독일이라는 새로운 문화 속에서 이혼을 감행하고, 쉼터와 같은 여성들의 보금자리가 북적인다. 라드밀라와 같은 여성 리더, 자국에서 잔뼈 굵은 여성 액티비스트들이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켜고 있나 보다.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앞으로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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