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2주기…우리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성차별, 여성혐오 범죄,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를 보면서

박주연 | 기사입력 2018/05/21 [20:20]

강남역 2주기…우리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성차별, 여성혐오 범죄,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를 보면서

박주연 | 입력 : 2018/05/21 [20:20]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지금은 고인이 된) 송신도 할머니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안해룡 감독)를 보았다. 지금도 그 영화를 생각하면 많이 울었던 기억과 함께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에 대한 분노와, 송신도 할머니와 일본에서 할머니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리고자 끈질기게 맞서는 모습에 큰 힘을 얻었던 것이 또렷이 떠오른다. 

 

▶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안해룡 감독)에서 송신도 할머니의 모습

 

하지만 당시 나의 분노는 무언가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었다. 방법을 몰랐다고 변명하기보다 게을렀다는 편이 맞을 거다. ‘나 먹고 살기도 벅차서’라는 핑계를 방패삼아 세상 속 내 자리만 깨끗하게 닦고 치장하면 사회에서 말하는 ‘안정적 생활을 하는 일반적인 사람’으로 대우 받을 수 있을 줄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여성혐오 살인에 대해 터져 나오는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함께 분노했고, 깨달았다. 내가 ‘안정적’이기는커녕 ‘안전하지도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일반 사람’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살아가던 세상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영웅서사에 나올 법한 각성을 하며 다시 태어났지만, 영웅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단지 이 사회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을 뿐이다.

 

깨어난 나와 너, 우리 ‘페미니즘’을 외치다

 

일어서야 했다, 목소리를 내야 했다, 소리 질러야 했다, 소리치는 내가 여기 있다고 나를 드러내야 했다. 위험하지 않기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모순을 대면하면서 말이다.

 

메갈리아, 강남역 이후 만들어진 일명 ‘영영페미’들이 만든 새로운 여성단체들의 활동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무명의 여성들이 자신들이 겪었던 불평등하고 불합리하며 끔찍한 성폭력을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달아 폭로하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주최한 17일 저녁의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 참가자가 젖은 종이피켓을 우비 위에 붙이고 있다. ⓒ일다(박주연)

 

박근혜 정권 탄핵을 외치는 촛불집회에서도 촛불을 들었다. 그리고 탄핵이라는 거대한 해일 속에서 ‘성폭력, 성차별,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에 반대한다’는 소리를 내며 작은 조개들이 휩쓸려가지 않도록 열심히 조개를 주웠다. 새로운 촛불 정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나중에’라고 미뤄도 되는 인권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7년 미투(#MeToo)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너는 혼자가 아니야’ 라는 용기 있는 발언들이 나오며, 혼자서 고통 받고 고립되었던 생존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었고, 응원이 되었다.

 

‘페미니스트 색출과 탄압’ 국면을 맞다

 

그러나 여성들의 연대를 공격하는 이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소녀들은 왕자가 필요 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 ‘소녀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Girls can do anything)라는 문구에 온갖 혐의를 씌워 ‘메갈이냐? 페미냐?’ 색출하는 일도 벌어졌다. 심지어 회사 대표가 직원에게 ‘한국여성민우회’ 같은 단체를 SNS에서 왜 팔로잉했냐고 추궁하는 일마저 벌어졌다.

 

페미니즘과 성차별 등의 이슈에 대해 제대로 된 논의를 해보자는 기획으로 만들어진 교육방송의 젠더토크쇼는 여성혐오, 성소수자혐오 세력들의 공격을 받았다.(관련 기사: 까칠남녀 패널 하차, 젠더-언론-교육의 문제 http://ildaro.com/8105) 그리고는 급기야 주요 패널을 하차시키더니, 결국 프로그램 자체를 폐지시켰다.

 

그뿐만이 아니다. 연이어 이어졌던 미투 운동으로 폭로된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들이 제대로 된 수사를 받고 있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해자들 중에는 오히려 피해자를 협박하며 역고소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집에서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 페미니즘을 한다, 페미니스트로 선언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경험이 늘어났다.

 

우린 아직도 ‘일반 사람’이 아닌가요?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2주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던 지난 1일, 한 인터넷 사이트에 홍익대학교 회화과 실습 시간에 불법촬영을 한 남성 누드 모델의 사진이 올라왔고 댓글로 인신공격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는 신속하게 이뤄졌고 12일 사진을 유포한 여성 모델이 구속되었다. 지금껏 수많은 여성들이 불법촬영과 동영상 유포 피해를 신고하고 고통을 호소해왔지만 제대로 된 수사도,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었는데 ‘형평성’에 어긋난 경찰 대응을 보며 여성들은 큰 배신감을 느꼈다.

 

불법촬영 범죄의 피해자 중 98%를 차지하는 여성들은 경찰에 사건을 신고하면서 ‘진행이 힘들고 어렵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수사가 진행되고 고소된 사건조차 ‘성적수치심을 유발하기 않았다고 보여짐으로’, ‘초범이니까’, ‘가해자의 미래와 인생을 고려하여’ 등의 논리로 가해자를 두둔하는 법정을 지켜봐야했다. 

 

▶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와 불꽃페미액션이 공동 주최한 ‘경찰은 여성의 목소리에 응답하라’ 기자회견이 17일 오전 경찰청 앞에서 열렸다. ⓒ일다(박주연)

 

지난 17일엔 유튜버로 활동하는 한 여성이 피팅 모델 알바에 지원했다가 겪은 성폭력을 알리고, 그 때 찍힌 사진이 유포되고 있다는 사실을 SNS에 공개했다. 모델 지원자들에게 충격적인 방식으로 집단적인 성폭력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에도 분노했지만, 더 괴로운 것은 그 무섭고 끔찍한 상황을 불특정 대중 앞에서 공개해야만 수사와 처벌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 폭로 이후, 오히려 포르노 사이트에서 피해자의 이름이 더 많이 검색되고 있다는 얘길 들었을 땐 무력감이 느껴졌다.

 

우리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소리를 내는 사람이 너무 적었나? 여자라서 너무 만만하게 보였나? 여전히 조신하게 행동했나? 페미니즘이라는 화두 속에서 보낸 지난 2년 동안 나는(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계속 묻고 또 물었다. ‘일반 사람’이 아닌 ‘OO녀’로 불리는 그 견고한 위치 앞에서 좌절하면서 말이다.

 

지금 여기, 다시 강남역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2주기였던 17일 목요일은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집중호우가 쏟아지는 서울 신논현역 저녁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주최 측은 열심히 우비와 피켓, 안내 자료를 배포했고 참가자들은 서로 우산을 들어주며 우비를 입고 비에 금방 젖어버리는 종이피켓이지만 피켓을 나눠들었다.

 

불꽃페미액션 이가현 활동가는 “지금 우리의 목소리가 역사에 기록되어 앞서간 여성들, 미래의 여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집회 참여자들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독려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유승진 활동가는 홍대 누드크로키 불법촬영 사건을 언급하며 차별 수사에 대해 비판했다. 또한 “여성들은 이제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폭력을 겪고 살해 당한다”는 뼈아픈 말을 덧붙였다.

 

3.8대학생공동행동 예진 활동가는 “폭력의 이유를 더 이상 나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다”고 말하며 “우리의 행동을 검열하지 말고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 속의 폭력, 외모평가, 불법촬영, 고용불평등, 임금차별, 성폭력까지 연결된 이 폭력을 이제 바꿔야 한다”고 외쳤다.

 

행동하는 간호사회 최원영 간호사는 병원에서 있었던 불법촬영 성폭력 사건을 폭로했다. 또한 “왜 나이 든 여성간호사가 없는지 의문을 가진 적이 있는가? 쉽게 성적 대상화되고 노동의 가치가 절하되는 간호사의 현실을 제대로 봐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주최한 17일 저녁의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의 거리행진 ⓒ일다(박주연)

 

용화여고 성폭력 뿌리뽑기 위원회 오예진 졸업생은 “스쿨미투를 지지하는 시민 여러분을 보니 힘이 난다”며, “이제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것 우리가 아니”라고 외쳤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쥬리 활동가는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을 여성혐오가 아니라 정신질환으로 규정한 것은 여성혐오를 지우는 것이며, 장애와 정신질환 혐오로 그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고 말하며 “혐오와 차별을 근절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다양한 환경과 다양한 자리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여성혐오, 성차별, 성폭력과 투쟁하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거리를 채웠다. 또 그 목소리에 응답하는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지는 그 거리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나뿐 아니라 참가자 모두에게 힘이 되었을 것이다.

 

강남역까지 걸어서 행진하고 다시 신논현역으로 돌아오는 동안 운동화가 빗물에 흠뻑 젖어 점점 무거워졌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2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구호를 외치며 빗길의 강남대로를 걸었고, 강남역 앞에선 추모의 묵념을 했다. ‘정말 더 이상 우리를 잃고 싶지 않다’는 염원을 담아서.

 

부정의한 세계를 깨부수기 위한 발걸음은 계속될 것

 

강남역 이후 2년, ‘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나?’는 의문을 품으며 절망하기도 했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건 우리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길 두려워하는 세력과 이 사회였다. 우리는 분명 나아가고 있다. 그 수많은 증거들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19일(토) 혜화역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는 무려 1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모여 “불법촬영과 유출, 유통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라”고 외쳤다. “여성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별 관계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0일(일) 기준으로 40만 명을 돌파했고, 유투버 성폭력 사건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는 청원이 18만 명을 넘어서 곧 20만 명을 바라보고 있다.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섹스 칼럼니스트인 은하선 씨의 서강대 강의는 이를 반대하는 이들의 압력으로 취소되었지만, 한편에서 ‘여성주의는 취소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제기되었고 다른 방식으로 페미니스트들이 연대하고 있다. 

 

▶ 11일 서강대학교 여성주의 학회 ‘담다디’ 등 대학모임이 주최한 ‘여성주의는 취소될 수 없다’ 시위 ⓒ일다(박주연)

 

게임 및 웹툰 등 서브컬쳐 업계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페미니즘 관련된 발언을 하거나 페미니스트 선언을 함으로써 받았던 사이버불링(cyber bullying, 인터넷 상의 집단적인 괴롭힘)과 업계 내 커리어 불이익에 대항하는 목소리를 내고, 페미니스트 작가들을 응원하는 전시 기록 프로젝트가 ‘팀 내일’이라는 모임 주최로 준비 중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페미니즘 모임, 행사, 집회 등이 개인 그리고 연대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어떠한 공격과 반격이 들어와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균형하고 부정의한 세계를 깨부수기 위해서 말이다.

 

다가오는 24일(목)에는 여성의 몸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연결된 ‘낙태죄’ 폐지 헌재 공개 변론이 예정되어 있다. 미투 운동으로 폭로된 사건들은 재판 중이거나 수사 중, 혹은 수사를 앞두고 있다. 아직 더 큰 목소리가 필요한 사안들이 많다.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에서 송신도 할머니는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한 기나긴 재판에서 결국 승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말은 단지 자기위로가 아니다. 재판에 졌지만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건 아니며, 오히려 더 힘을 내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또한 정말 자신의 마음은 정정당당하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변화를 요구하는 우리도 지는 경험을 하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 중엔 또 지난 2년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반복되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진전하는 우리의 발걸음만은 멈추지 말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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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2018/05/23 [11:42] 수정 | 삭제
  • 2년이 금새 지나갔네요. 그녀와 수많은 그녀들의 명복을 빕니다
  • 얀새 2018/05/23 [07:26] 수정 | 삭제
  • 우리는 서로의 용기입니다
  • 2018/05/22 [09:17] 수정 | 삭제
  • 나도 나의마음은지지않았다 보구 울었던 기억이 나서 또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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