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은 ‘도망이나 치는 것’일까?

[최하란의 No Woman No Cry] 나를 지키기 위한 신중한 선택

최하란 | 기사입력 2018/06/12 [23:44]

도망은 ‘도망이나 치는 것’일까?

[최하란의 No Woman No Cry] 나를 지키기 위한 신중한 선택

최하란 | 입력 : 2018/06/12 [23:44]

여성을 위한 자기방어 훈련과 몸에 관한 칼럼 ‘No Woman No Cry’가 연재됩니다. 최하란 씨는 스쿨오브무브먼트 대표이자, 호신술의 하나인 크라브마가 지도자입니다. -편집자 주

 

“무조건 도망가라”는 말

 

“무조건 도망가라”, “괜한 행동하다 다친다. 도망이나 쳐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흔히 듣게 되는 말이다.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거나, 심지어 위험한 말이다.

 

셀프 디펜스(Self-Defense)에서 도망은 중요하다. ‘삼십육계 줄행랑’이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삼십육계>는 <손자병법>보다 먼저 나온 병법이자, 전쟁에서 쓸 서른여섯 가지 계책이란 뜻이다. 그 중에서 서른여섯 번째 계책이 바로 도망가는 것이다.

 

그러나 폐쇄된 공간이나 금방 붙잡힐만한 위치에 있다면, 어떻게 도망칠 수 있나? 무엇보다 도망이 셀프 디펜스의 유일한 방법이 되면,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을 때는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결론만 남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도망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그 판단과 선택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안전 확률을 높이는 위기관리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 회피, 탈출, 피신

 

무능력한 게 아니다, 주체적이고 신중하게

 

여성 셀프 디펜스 교육을 하면 “괜한 행동하다 다친다. 도망이나 쳐라”는 말에 여성들이 꽤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 영향은 흔히 두려움과 걱정으로 나타나고, 때로 좌절과 분노로 표현된다.

 

위험상황, 폭력상황은 모면하고 회피하는 게 가장 좋다. 싸움이나 저항이 아니라 회피가 최고의 미덕이다. 그러나 회피를 위해서도 간단하고 분명한 말로 의사 표현하기, 손을 사용하며 자세를 취하기, 거리와 각도 상으로 멀어지기 등 말과 행동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진짜 방어와 반격은 거의 모면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필요하다.

 

어떤 도망인지도 중요하다. 폭력상황에 처한 A와 B가 있다. A는 이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 외에 자신이 아는 것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도망쳤다. B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알고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도망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도망쳤다.

 

A와 B는 모두 도망쳤지만 B는 A보다 도망쳤다는 사실 때문에 좌절감을 느낄 가능성이 매우 낮을 것이다. 반면에 A는 B보다 폭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커질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망’이란 말에서 비겁하거나 부끄러운 행동 또는 무능력을 연상한다. 그러니 ‘회피’, ‘탈출’, ‘피신’이란 말로 바꿔 써보자.

 

폭력상황을 회피하기, 위험상황에서 탈출하기,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기는 무능력한 행동이 아니다.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전술적인 행동이다.

 

셀프 디펜스는 단지 육체적으로만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경우 정신적으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다. 주체적인 판단, 결정, 행동이 분명히 훨씬 더 긍정적이다.

 

▶ 무능력한 행동이 아니라 전술적인 행동!  ⓒ스쿨오브무브먼트

 

안전하게 상황 종료하기

 

위험상황이나 폭력상황을 애초에 모면하고 회피했든, 아니면 방어하고 반격했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상황이 종료되는 것이다.

 

그런데 폭력상황에서 피신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이동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강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순간 얼어붙는다. 심지어 생각과 몸이 굳어버려 꼼짝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도망은 그냥 도망이나 치는 게 아니다. 연습이 필요한 셀프 디펜스의 중요한 테크닉이다.

 

강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감각의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 시각이 왜곡되거나 청각이 왜곡될 수 있다. 시야가 매우 좁아져 두루마리 휴지심 만한 작은 구멍으로 사물을 보는 것처럼 되거나, 주변 소리나 자동차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여러 요소들, 즉 공격자, 공범, 무기, 어린이나 가족, 친구, 조력자, 소지품, 통로, 자동차, 찻길, 막다른 길 등을 두루 살펴 확인하고, 피신해야 한다.

 

▶ 연습은 일종의 예방접종  ⓒ스쿨오브무브먼트

 

망치, 드라이버, 펜치의 사용법을 알려주는 일

 

셀프 디펜스 교육은 사람들에게 망치, 드라이버, 펜치의 사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망치, 드라이버, 펜치라는 기본적인 셀프 디펜스 능력을 갖고 있지만 사용법을 모르거나 써본 적이 없다. 사용법을 알게 되고 연습을 해보면, 나사를 조이거나 못을 박는 일쯤은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은 그만큼 편리해질 것이다.

 

아는 것의 힘은 강하다. 그래서 우리는 폭력에 대해 알아야 한다. 알지 못할수록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습이 필요하다. 문제 상황을 설정하고 해결 과정을 연습해보는 것은 일종의 예방접종과 같다. 물론, 병원에서 주사를 맞는 것보다 확실히 유쾌한 경험일 것이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ㅇㅇ 2018/06/14 [11:32] 수정 | 삭제
  • 참 좋은 글이다. 마피아 보스는 식당에서 벽을 등지고 문이 가까운 자리를 선호한다고 한다. 뒤에서 총 맞을 염려가 적고 분쟁이 발생했을 때 탈출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위험에 가능성이 있으나 여성의 경우 그 위험도가 높다.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신중하고 효율적인 선택을 하자. 마피아 보스처럼. 그리고 연습없이는 행동도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군에 속해보지 않은 사람은(때로는 속한 사람도) 군이 총을 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집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군대는 훈련받은 일만을 잘 해낼 수 있는 집단이다. 반복된 훈련 없이는 적이 나를 죽이려는 상황에서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 실내작전을 준비할 때 아예 해당 건물과 아예 동일한 구조를 만들고 수차례 반복훈련을 하는 경우도 있다. 구조가 완전히 몸에 익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매우 크기 때문이다. 앞에서 강력한 사람이 위협하고 소리지를 때 굳어버리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중요하다. 이외에도 불이 났을 때, 교통사고를 냈을 때,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도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은 오로지 연습에서 나온다. 굳어버리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허둥지둥하는 등 패닉에 빠지는 행동은 대개 사태를 더 악화할 뿐이다. 공격자의 거시기를 차고 자신감이나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배양하여 안전을 확보하고 진정한 자신감을 되찾자.
광고
최하란의 No Woman No Cry 많이 본 기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