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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나라, 8년 인연 맺은 서울의 장면들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경험을 듣다> 미니애폴리스 내 방에서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킴 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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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오랜 기간 입양을 통해 아동을 해외로 내보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입양 이슈는 여성인권과 아동권, 빈곤과 차별, 인종과 이주의 문제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일다>는 각기 다른 사회에서 성장해 모국을 찾아온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의 경험과 한국 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편집자 주]

 

▶ 필자 킴 톰슨(kim thompson)


[필자 소개] 킴 톰슨(kim thompson)은 퀴어 한국계 미국인 입양인 다원 예술가로, 현재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 살고 있다. 그녀는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1976년 홀트에 의해 미국의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이며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백인 입양 가족에 판매/수출되었다.

 

킴은 공연, 문학, 연극으로 미국 정부 및 여러 주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2008년 말과 2009년 초 제롬 재단의 문학 여행 지원으로 5개월 동안 서울에서 지낸 뒤, 2009년 10월에서 2017년 1월까지 죽 서울에서 일하며 살았다.

 

킴은 미시간 주에 입양되어 남 플로리다 주에서 자랐고, 그 뒤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8년, 미니애폴리스에서 7년, 그리고 서울에서 8년 동안 지냈다. 그녀는 현재 이런 경험들을 압축해서 보여줄 그래픽노블을 구상하는 계획/브레인스토밍의 초기 단계에 있다.

 

스냅사진들: 연속체

 

“진짜라는 건 네가 어떻게 생겼냐와 상관이 없단다.” 가죽 말이 말했습니다. “너도 진짜가 될 수 있고말고.”

“진짜가 되면 아픈가요?” 헝겊 토끼가 물었어요.
“그럴 때도 있지.” 가죽 말이 말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진실만을 얘기했으니까요. “진짜가 된다면야 아픈 게 무슨 대수겠니.”
“태엽을 작동시키듯이 단 번에 진짜가 되나요? 아니면 조금씩 변하는 건가요?” 헝겊 토끼가 물었어요.
“단 번에 되지는 않아.” 가죽 말이 말했습니다. “조금씩 변하는 거란다. 아주 시간이 많이 걸리지. 그렇기 때문에 쉽게 부서지거나, 뾰족한 날이 있거나,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장남감은 진짜가 되기 힘들지. 보통 진짜가 될 때쯤에는 너무 사랑받은 덕분에 털도 다 빠지고, 눈도 튀어나오고, 관절도 헐렁해지고, 온몸이 다 너덜너덜해져 있단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안 돼. 왜냐하면 일단 진짜가 되고 나면 못생겨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한테야 그렇지 않겠지만 말이야.”

“…한번 진짜가 되면, 절대로 다시 가짜가 되지는 않아. 영원히 진짜가 되는 거란다.”
―마저리 윌리엄즈 비안코, 「헝겊 토끼」

 

▶ 우리는 그날 밤 3차 또는 4차, 아니면 5차에 와서 우리 반지하방에서 정말로 15초 거리에 있는 ‘이자카야’ 술집 앞의 작은 나무 평상에 앉아 있다. ⓒ사진: Jeanne M. Modderman 2011, 서울

 

1. 반지하방에서 15초 거리 ‘이자카야’ 앞 나무 평상

 

여름이다. 새벽 한두 시는 족히 되었을 시간이다. 최소한 화씨 90도(섭씨 32도)에 90+%의 습도는 되는 듯하다. 우리는 그날 밤 3차 또는 4차, 아니면 5차에 와서 우리 반지하방에서 정말로 15초 거리에 있는 ‘이자카야’ 술집 앞의 작은 나무 평상에 앉아 있다.

 

우리는 여섯 또는 일곱 또는 여덟 병째 ‘소주’를 마시다가, 냉기를 유지하려고 깊은 얼음 포켓을 만들어 넣은 유리병의 ‘사케’로 옮겨간다. 얼린 탓에 물방울이 맺혀 흐르고 있는 묵직한 카스 또는 맥스 또는 하이트 맥주잔을 뺨에 대고 지그시 누르고 있을 때, ‘이자카야’ 점원 한 사람이 우리가 주문한 ‘버섯’, 베이컨 조각에 싼 방울토마토, ‘은행’ 열매, ‘연어’, ‘가지’를 꿴 꼬치들을 갖다 준다. 모두 안에서 숯불로 구운 것이다. 우리는 “짠!”하고 외치며 즐겁게 작은 술잔을 부딪치고 모두 ‘담배’에 불을 붙인다.

 

한국인들이 다 그렇듯이 따뜻한 정감에 취해 나는 “뭣 같은 이곳 생활을 살만하게” 해주는 건 바로 이런 시간들이라고 선언한다. 우리 모두 다시 ‘짠’ 술잔을 부딪치고, 나는 술이 취해 그때의 애인에게 우리가 키우던 고슴도치 ‘마포’가 우리를 보고 싶어 하지 않겠냐고 계속 묻고 있다.

 

스쿠터를 탄 ‘아저씨’들과 술 취한 미대생들, 타투 아티스트들, 뮤지션들, 커밍아웃하지 않는 레즈비언들, 모텔을 찾고 있는 이성애 청춘남녀들이 모두 행복하게 휘청거리며 비틀비틀 지나간다. ‘할머니 깡패’는 우리가 그날 밤 아무리 많은 ‘소주’ 병을 비웠어도 어느 누구하나 감히 올라갈 엄두도 못내는 ‘평상’ 위에 올라 앉아 세상만사를 관장하고 계시다.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 나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순간이다.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데도 나는 분명 한국인처럼 먹고 마시고, 웃고, 사랑하고, 감정을 드러내고, 맹세한다.

 

*   *   *

나는 지금 미니애폴리스의 내 방에서 빌린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내 옆에는 사랑하는 양할아버지의 타이프라이터가 있다. 나는 서울에서 8년을 살다가 지금은 다시 이곳에서 1년 반 동안 지내고 있다.

 

“나는 그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계속 까먹고 있어요. 나는 얼마 전에 다시 그걸 깨달았어요. 그건 내가 자신에게 더 관대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줬어요. … 나… 나…… 나는 내가 정말로 많은 것을 했다고… 돌아온 뒤로 굉장히 멀리 왔다고 생각했거든요…” 불과 며칠 전 나는 신체요법 선생님에게 그렇게 말했다. “네. 그래요.” 그녀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빌어먹을 일들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그것들을 통제”하기 위한 확실한 수단으로 서울과 미니애폴리스 양쪽 모두에서 여러 형태의 심리치료 요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아무런 미안한 느낌 없이 서양인처럼 하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다.)

 

미국에 다시 돌아온 것은… “힘들다”거나 “어렵다” 같은 단어로는 설명을 시작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내가 상상할 수 있던 것보다 더 많은 보상을 주고 있다.

 

여기 있으면서 단 하루도 서울을, 또는 내가 필요한 줄도 몰랐던 방식으로 민족과 땅의 일부가 되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다. 그건 내 속 깊숙이 있는 노스탤지어와 향수병의 중압감이며… 지금은 그리 자주 그러진 않지만, 한밤중에 나를 흔들어 깨울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묘하게 긍정적인 측면은, 덕분에 밤에 소비할 것을 많이 억누르게 된 것이리라. 서울에서 할 수 있던 것처럼 퍼마시다간, 내가 가진 울분과 분노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쎄… ‘이자카야’ 앞 나무 평상에 앉아있던 때가 내게 너무나 큰 의미였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친구가 여기에는 정말 하나밖에 없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느낌일 수 있다. 예전에는 잘 적응했던 삶이 더 이상 내게 맞지 않는다.

 

▶ 글쎄… ‘이자카야’ 앞 나무 평상에 앉아있던 때가 내게 너무나 큰 의미였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친구가 여기에는 정말 하나밖에 없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느낌일 수 있다. ⓒkim thompson, 2018, 종이에 연필과 잉크로

 

2. 사무치게 그리운, 신촌로터리 횡단보도 앞

 

나는 신촌로터리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서서 기다리고 있다. 8차선, 버스와 택시가 정차하는 차로까지 포함하면 10차선 도로 가운데 버스의 섬이 길게 뻗어있는 곳이다. 우리가 이 발에서 저 발로 몸무게를 옮기며 교통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사이, 인천공항 및 2천5백만 명이 살고 있는 이 도시의 모든 곳을 오가는 버스들이 으르렁거리며 지나가기도 하고 삐걱대며 멈춰 서기도 하는 꼴은 커다란 돌로 만든 공룡들이 우르르 몰려가다 줄을 늘어서는 모습과 비슷하다.

 

나는 하늘 위로 줌아웃하며 올라가는 항공 카메라가 보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래서 내 얼굴… 서양에서는 항상 눈에 띄었던 빌어먹을 내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얼굴들의 인파 속으로 그냥 섞여 사라지는 장면을.

 

나는 8년 내내 거의 매일 밤낮으로 이곳에 서 있었다. 이곳은 한국 최고의 미술대학이자 지나다닐 때마다 내가 결코 알지 못할 “다른 인생들”을 상상하는 홍대입구 앞의 생동하는 십자 교차로보다도 더, 서울에 살고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장소였다.

 

서양에서, 특히나 미국에서도 백인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들 가운데 하나인 미니애폴리스에서 언제나 눈에 띈다는 것의 무게는 2007년 12월 처음으로 3주 동안 한국에 돌아왔을 때까지 내가 갖고 있는 줄도 몰랐던 짐이었다. 그걸 깨달은 것은 갑자기 내가 너무나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 일곱 개의 대륙 중에 네 개를 헤매고 탐험하면서도, 내가 찾고 있는 줄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것은 인생 대부분 동안 내가 찾으려 애쓰고 있었던 줄도 몰랐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미국에 다시 돌아온 것을 때때로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   *   *

나는 내가 카우보이 바라고 부르는 바에 와 있다. 어렸을 때 내가 되고 싶은 것 중 하나는 작은 냇물에 옆에 흐르는 통나무집에 사는 목장의 카우보이였다. 나는 지금도 냇물이 졸졸 흐르는 목장의 통나무집에 살고 싶다. 하지만 내 성깔은 “카우보이가 되는 것”은 분명 내게 어울리는 패션이나 라이프 스타일이 아닐 거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여러모로 나는 어린 시절 본래 꿈꾸었던 곳에 와 있다.

 

하지만 그 대신, 진짜든 상상이든 내가 얼마나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지, 서울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을 얼마나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섞여들지 못하는지에 대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갑자기 나를 둘러싼, 나와 비슷하게 생긴 얼굴들의 바다가 그리워진다. 세포 속까지 깊은 아픔을 느낄 정도로 그리움이 사무쳐서 당장 비행기에 올라타 신촌 로터리로 돌아가서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초록불에서 빨간불로 신호등이 깜빡일 때 거기 그냥 서 있고 싶어진다.

 

그것은 그 순간이든 그 다음 날이든 친구에게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밖으로 나간다. 어린애 같은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세요, 나 불쌍해요’의 순간 같은 게 아니라… 8년 동안 나는 주변에 잘 녹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에나 갈수 있었고, 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내 인종이 아니라 개성과 개인적 미학에 관련된 것이었다. 미국에 다시 돌아와 일 년 반을 보내고, 나는 과연 옛날 여기서 편하게 느낀 곳들에서 다시 편안함을 느끼게 될 지 의구심이 생겼다. 나는 아직도 그것과 화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3. “버려지는 문제”…내 안의 불, ‘한(恨)’

 

함께 사는 반지하방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그녀가 나를 떠나는 문제―“버려지는 문제들”과 관련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내가 한 번도 잘 처리해 본 적 없는 일―를 두고 다투고 있다.

 

우리는 그 문제들을 두고 다투고 있었고, 그녀는 어떻게 내 양엄마가 내 자존감을 갈가리 찢었는지 끄집어내는 식으로 나를 질타하고 있다. 나는 아무도, 심지어 미니애폴리스에서 사귄 전 애인들조차 내게서 들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소주가 불을 붙인 분노가 밀려오며, 나는 우리 침실의 잠긴 문을 1킬로그램이 채 안 되는 가벼운 접이의자 다리로 때리고 있다. 나는 지금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면서, 양엄마가 나를 심하게 비난했던 방식으로 그녀를 비난하고 있다…

 

나는 자신의 밖에 서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타인에 대한 분노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내가 유일하게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문을 부수어 열지 않은 것이다. 그랬다간 문틀이 뜯어져 나갈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간신히 떠올린 현실적인 생각은, 새 문을 사지 않으려면 온 힘을 다해 문을 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해서 이런 상황을 유발했던지 간에, 나는 알지만 그녀가 결코 인정하지 않을 일들이 무엇이든 간에, 상황이 얼마나 악화되고 있었던지 간에, 모든 것들이 망쳐지든 어떻든 간에, 어떻게 결국 어느 날 밤 그녀가 우리 둘 모두에게 칼을 휘두르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내 자신을 끄집어내는데 한두 해 더 걸리게 되는지와 무관하게, 나는 평생 보이지 않으려고 애쓴 것을 해버리고 만 것에 수치심과 자기혐오를 느꼈다. 내가 양엄마처럼 행동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듣지 않아도 한 사람의 진실과 약점을 읽어내는 능력과 말이라는 내 힘의 어두운 측면이, 몇몇 다른 사람들처럼 파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나는 해외입양인연대(G.O.A.'L)에 연락해서 심리상담가를 알아보았고, 내 속 깊이 용암 같은 분노의 화산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2년 과정을 시작했다. 나는 서울에 살면서 우리, 한국인들은 이런 불을 속에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어로 “김치 기질”(kimchi tempe)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말로는 그것은 ‘한(恨)’이다. 그것은 서양의 심리학자들도 연구하고 있는 한국인과 한국인 이산민에게 고유하게 나타나는 문화 현상이다.

 

내 한은 이 땅과 내 유전적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았고, 모든 고아/입양인들이 갖고 태어나는 찢겨진 심장을 가지고 태어나 내 양어머니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나빠지면서 내 유년기와 사춘기 내내, 심지어 전화와 항공우편과 마지막에는 이메일의 발톱을 통해 대서양 건너 동유럽과 서유럽으로까지 나를 따라와 계속된 언어적, 감정적 구타가 거의 매일 일어나기 시작했던 가정에서 키워지면서 증폭된 것이다.

 

이날까지도 다른 사람에 대한 신체적·언어적 표현에서 내 기질을 제어하지 못한 것에 깊은 후회와 부끄러움을 갖고 있지만, 그런 일이 42년(음력 날짜로는 43년)동안 딱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기도 한다.

 

*   *   *

다른 사람을 믿거나 가깝게 느끼지 못할 경우, 나는 냉정하고 과묵해 보이는 편이다. (오히려 명백한) 사실은 정말 수줍음도 많고 겁도 많고 어떤 감정을 보여줄지, 어떻게 보여줄지에 관해 스스로 굉장히 조심하는 성격에 가깝다. 실제로 나는 (바보 같을 정도로) 순하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인데, 모든 빌어먹을 일들을 너무나 깊이/완전히 느끼는 것과 그 느낌들 하나하나를 곱씹어 생각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은 나를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농담이다.

 

낙엽이 풀밭이나 보도로 느리게 빙빙 돌면서 팔랑팔랑 춤추며 떨어지는 느낌이 어떤 건지 내가 글자그대로 직접 체험한 사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내 하루가 순전히 불편하고 부조리한 골칫거리들이 되는 것에 대한 분노 같은 그런 감정들은 완전히 없애버릴 수 없다면 제어할 수 있는 형태로 적응하는 편이 더 좋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러나 서울에서 나는 감정에 무리를 주며 그것을 억제하거나 감출 때 생기는 결과들에 대해 배웠고, ‘엄마’를 통해 사람들이 마음을 감출 때 나타나는 무거운 결과에 대해서도 배웠다. 그래서 내가 키워지고 성장한 곳도 아닌, 지금 여기 미니애폴리스로 돌아와서는 지난 1.5년을 일부러 완전히 패턴을 부수고 새로운 패턴을 만들 뿐 아니라, 내가 항상 그 속에 있기로 돼 있지만 너무 오랫동안 정주행과 역주행을 반복했던 삶을 살아가기 위한 힘과 기운의 원천으로서 내 ‘한(恨)’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이용하는 법을 배우는데 전념하며 보내고 있다.

 

간단히 말해, 나는 ‘한’이 내가 많이 두려워하고, 가두려고 애써온 순전한 힘을 가진 위험한 적에 맞서 내 편이 되게 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4. 서울의 내 집 통로에서 본 비좁은 하늘

 

보통 내가 일어나는 가장 빠른 시간은 오전 10시 30분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일어나 옥외 개인공간인 나/우리의 좁은 통로로 난 문을 연다. 그것은 내가 이 반지하방을 세 들기로 선택한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지평선이 주위를 둘러싼 ‘산’ 뿐 아니라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높이 솟은 아파트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는 도시에서 어떤 형태로든 옥외 공간은 드물고 귀한 상품이다. 나는 지붕들 사이 좁은 틈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푸른 하늘 속으로 연기가 흩어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어떻게 모든 것 속에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생각한다.

 

▶ 지붕들 사이 좁은 틈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푸른 하늘 속으로 연기가 흩어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어떻게 모든 것 속에 아름다움이 존재하는지를 생각한다. ⓒkim thompson, 2017년 1월, 서울

 

나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서, 침실과 부엌을 지나 신발에 발을 밀어 넣고, 계단을 올라가 오른쪽으로 돈 다음, 왼쪽으로 돌았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산다. 그리고는 길을 되돌아가서 ‘우유빵’ 베이커리 앞에 멈춘다. 거기에는 오븐에서 갓 꺼낸 우유식빵들이 높은 카트들 위에 따뜻하고 군침 도는 벽돌들처럼 쌓여있다. 그 위에 세련된 입맛들이 세워지는 토대마냥 말이다. 이 빵집은 이 동네에 내가 살던 처음 몇 년 동안에는 비밀로 잘 지켜지다가, 결국 내가 즐겨 밤의 마지막을 보내는 ‘이자카야’ 술집에까지 줄이 늘어서게 된다.

 

여기서 보낸 시간이 좋았거나 나빴거나 상관없이 나는 이 동네를 사랑한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자국을 남긴다. 서울 생활 시절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고 느끼고 있던 여섯 해째에조차도 나는 이 동네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남은 생을 보낸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이곳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0.25 킬로미터 반경 내로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다. 나는 가장 좋은 ‘고기집’, ‘회식당’, ‘치맥식당’, ‘이자카야’, ‘편의점’, ‘막창식당’, ‘포장마차’, ‘전 식당’, ‘맥주’ 가게와 서양식 칵테일 바들, 커피숍(들), 심지어 고양이 카페 등을 알고 있었다. 이 동네가 내 마음 속에 뿌리박은 만큼이나 나도 이 동네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지붕 사이로 보이는 그 좁은 하늘은 내 고민과 희망들을 털어놓는 가능성들의 망망대해가 된다.

 

*   *   *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뒷마루는 서울 집의 것보다 크다. 미국 사람들, 특히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처럼 활기차지만 비좁은 대도시에 살지 않는 사람들이 가진 크기와 공간에 대한 감각은 아주 이상하다. 나는 이곳의 친구가 자기 집이 너무 작다고 불평하는 것을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세를 낸 집주인은 직접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증언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나게 대단한 정원과 뒤뜰을 갖고 있다. 여기가 서울이었다면 이 뒤뜰에 최소한 2백~3백 명의 한국인들이 들어와서 다이소에서 산 1천원(0.9달러)짜리 열반사 캠핑 매트를 깔고 앉아 스쿠터를 탄 젊은 직원이나 ‘아저씨’가 배달해 준 피자, 프라이드치킨, ‘김밥’, ‘라면’을 먹으며 피크닉을 즐길 수 있겠다고 속으로 생각하곤 한다.

 

나는 요즘 미니애폴리스에서 먹고 마시기 좋은 장소들의 목록을 다시 만들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서울의 우리 동네에 있던 것들에 비해 훨씬 더 비싸고, 더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도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회/이자카야식 가게를 하나 점찍었다. 거기서 저녁 한 끼 먹고 마시는 비용이 마포구 신촌로의 우리 동네에서 밤새 5차까지 하면서 쓰는 금액보다 크지만 말이다. 내가 더 이상 서울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거기서 일종의 익숙한 편안함을 찾는다.

 

나는 지금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난다. 일하고 있지 않을 때, 아침 7시까지 자는 것은 퇴폐적인 일로 느껴진다. 나는 아래층 부엌으로 내려가서 내손으로 아이스커피를 타서 부엌문을 열고 뒷마루로 나가 끝없이 펼쳐진 것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연기로 채워진 소망들을 내뿜는다. 그러면서 내가 아직 “성공”하진 못했지만 금연을 택하고 싶어 하는 시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미니애폴리스 같은 곳에서는 탁 트인 하늘의 장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돌아온 뒤로 나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여기서 흘러가는 모든 날, 나는 점점 더 내게 아름다움이 어떤 것이고 누구이고 무엇인지가 많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서울의 내 집 통로에서 본 좁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보낸 그 모든 아침들이 내 미의식을 새롭게 형성하도록 도와주었다고 확신한다. 나는 내 옛 동네를 그리워하는 것이 좋다. 사람이나 장소를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알려고 진심으로 시간을 들일 때만 생길 수 있는 방식으로 내가 사랑했고 나도 어쨌든 그곳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걸 의미하니까 말이다.

 

5. 떠나기 전, ‘엄마’와의 마지막

 

2016년 12월 말이다. 서울을 떠나 다시 미니애폴리스로 이주하기 불과 몇 주 전이다. 나는 최근에야 애인과의 관계를 끝냈다. 내가 여생을 함께 보낼 거라고 진실로 믿었던 사람이었다. 내가 깊이 사랑한 예술가 스승이자 어머니 같은 사람인 로리 카를로스는 미니애폴리스에서 멀지 않은 샬럼 호스피스 센터에서 세상을 떠날 날을 앞두고 있었다.

 

‘마포’(고슴도치)는 내가 자기 새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데 아무 생각도(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고슴도치를 미국에 데려가는 실제적인 문제들이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일 뿐 아니라, 생명을 가진 존재는 그 무엇도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떨어져 서양에서 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 하지만 내가 아는, 내가 종잡을 수 있는 한 가지- 비행기가 막 활주로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내가 눈물을 흘린 그 한 가지 일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을 찾아낸 나 자신의 의지로, 나 자신의 방식으로 서울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 kim thompson. 2017년 1월 11일, 인천공항

 

나는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엄마’를 만났다. 우리 관계는 전혀 내가 바란 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서울로 이주한 가장 진실한 이유는 그녀를 알기 위해서였다. 대신, 내가 8년 전 그녀를 찾아낸 그 “기적”과 “마법”의 밤이야말로 아마도 가능한 “최고”의 순간으로 남을 거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날 밤이 “몇 년 전”의 일이 되면서, 그 순간의 신성함은 지금의 안 좋아진 현실 때문에 더욱 깊어졌다.

 

우리는 마지막 식사를 하러 만난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늘 그렇듯이 나는 정신이 몸에서 나갔다 들어갔다 하는 걸 느끼면서 모든 일을 전부다 말하고 싶으면서도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엄마’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온 세상 다른 누구와 상호작용하는 방식과 다르다. 어머니들과 딸들이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는 보편적인 사실 때문이 아니라, 왜냐하면… 글쎄… 이는 지금도 내가 명확히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오직 자기 피붙이와 다시 만난 입양인만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세월 동안 내가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유들 때문에 반(半) 정기적인 것에서 거의 만나지 않는 것으로 변화한 엄마와 만남에서 내가 늘 했던 생각으로 그걸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나에게 완전히 전혀 모르는 사람인 그녀가 있다. 나 역시 그녀에게 그렇다. 하지만 그녀―내 몸을 만들어 준 그래서 우리가 영원히 연결돼 있는 이 낯선 사람―에게 느끼는 만큼 많은 사랑을, 아픔을, 분노를, 슬픔을, 혼란을, 거부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느낌을, 알고 싶은 욕망과 알아주기를 바라는 욕망을 느껴본 적이 없다. 나는 이 사람을 항상 그리워할 것이고, 이 사람은 나를 그리워할 것이다. 우리는, 엄마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슬퍼하고 있다. 우리는 정말 너무 많은 면에서 닮았지만, 말로 거의 소통할 수 없다.”

 

우리는 작별인사를 하고, ‘엄마’는 내게 돈 많이 벌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내가 몸을 굽혔을 때 어깨를 두드려주는 ‘엄마’다운 일을 한다. 만나거나 헤어질 때 껴안아 주는 것이 “한국 엄마”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동시에 이러한 이해가 내 마음에 결코 완전하게 번역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받아들이고 있다. 아프다. 그게 얼마나 아픈지 나는 그냥 느낄 수밖에 없다.

 

2주 뒤, 유쾌함과는 가장 거리가 먼 헤어짐 때문에 찢어진 마음으로 나는 인천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른다. 로리는 13일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아직 서울, ‘엄마’, ‘할머니’를 떠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종잡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내가 종잡을 수 있는 한 가지, 비행기가 막 활주로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내가 눈물을 흘린 그 한 가지 일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을 찾아낸 나 자신의 의지로, 나 자신의 방식으로 서울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진실 되게 살며, 화해할 수 없는 것도 많은 반면 되찾을 수 있는 것도 항상 많이 있다는 말이 진실이 되도록 악전고투를 “받아들이는” 것.

 

▶ 옛날, 한국에 처음으로 돌아와 보기 전에 친구 로리가 감독하던 미니애폴리스의 극장 무대에서 나는 큰 소리로 물었다. “내 가족의 여자들도 80세까지나 살까?” 내가 ‘할머니’를 찾은 그날 밤, 나는 할머니가 80세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림: kim thompson, 2018, 종이에 연필과 잉크로


*   *   *

32년, 11개월, 28일 동안 나는 내… 운명을 향해 질주하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탈주하는 끊임없는 밀물과 썰물 속에 있었다. 2008년 생일을 사흘 앞두고 ‘엄마’와 ‘할머니’를 찾았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났다. 올해 겨울은 ‘그녀와 그녀’를 찾은 지 10주년이 되는 때이다.

 

옛날 한국에 처음으로 돌아가 보기 전에 로리가 감독하던 미니애폴리스의 극장 무대에서 나는 큰 소리로 물었다. “내 가족의 여자들도 80세까지나 살까?”


내가 ‘할머니’를 찾은 그날 밤, 나는 할머니가 80세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지금 완전히 향하고, 마주보고, 걸어가고 있는 것―내가 살기 위해 세상에 나온 인생―을 진정으로 원하게 되는 데 이 모든 세월이 걸렸다.

 

“나… 나는 선생님께 말하고 싶었어요… 나는 돌아올 거예요. 그녀와 관계를 끝냈어요. …그래야만 했으니까요. 나는 너무 행복하지 못했어요.” 나는 로리가 병상에 누웠을 때 그렇게 말했다.

 

“너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걸 알고 여기 온 거야. 나는 너를 기다리며 네가 돌아오기 바랐지만, 너한테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단다. 지금이 올바른 때야. 지금이 네가 돌아올 때야.”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로리… 나는 엄마와 최선을 다했어요. 정말 그랬어요. 최선 이상으로 노력했어요. 나는… 하지만… 엄마와 실패했어요. … 나는 할 수 없었고… 그녀는 그러지 못 했어요… 나는 열심히 노력했어요….” 눈물이 터져 나와… 뺨에 흘러내리며 내 문장은 짭짜름한 조각난 물결로 변한다.

 

“네가 최선을 다한 거 알고 있어, 아이야. 아무도 너에게 그보다 더 많은 걸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어. 지금이 네가 여기 돌아올 올바른 때야. 너는 최선을 다하는 것 이상으로 할 필요가 없어. 킴, 나는 정말 네가 자랑스럽구나. 이제 정말 너를 방해하는 것들을 멈출 수 있어.”

 

나는 ‘엄마’와 마지막 사진을 찍는다. 미니애폴리스에서 그녀가 몹시 그리울 때 내가 붙잡을 것을 가지기 위해.

 

그녀가 먼저 걸어 나가고 나는 혼자 생각한다. “저기 내 심장이 간다.”

 

그리고 나는 내 길에서 영원히 벗어나온다.  (번역: 권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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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1/10 [11:58]  최종편집: ⓒ 일다
 
mic 18/11/11 [14:16] 수정 삭제  
  오랜만에 서울에 와서 느꼈던 것들을 떠올리며 읽은 글입니다 마지막 글이 가슴 찡하네요
ㄱㅈ 18/11/13 [10:54] 수정 삭제  
  아름다운 글이네요. 필자가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지가 느껴져요.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 들려주어서 고맙습니다.
min 18/11/14 [14:08] 수정 삭제  
  눈물이 나네요. “저기 내 심장이 간다” 지금 살고 있는 바로 그 곳을 자신의 자리로 만들어나가면서, 잘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버섯 18/11/22 [08:35] 수정 삭제  
  글이 독특해서 읽게되었는데 뭉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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