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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나라에 입양된 것을 고마워하라고요?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경험을 듣다> 입양 ‘사후관리’에 대하여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줄레인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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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오랜 기간 입양을 통해 아동을 해외로 내보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입양 이슈는 여성인권과 아동권, 빈곤과 차별, 인종과 이주의 문제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일다>는 각기 다른 사회에서 성장해 모국을 찾아온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의 경험과 한국 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편집자 주]

 

들어가며

 

해외입양 한국인들의 모임에서 누군가 ‘국외입양인연대(Adoptee Solidarity Korea, ASK, 2004~2017)야말로 자신에게 훌륭한 입양 사후관리(post adoption services)였다’고 말한 게 기억난다. 국외입양인연대에 참여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입양 경험과 여정의 답을 찾는 방식이었다. 나도 비슷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내가 해외입양된 한국인 공동체의 권익 찾기 활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관행을 끝내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인도주의에서 출발한 해외입양은 한국에서 비혼모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강화시키고, 가족을 국제적으로 분열시키는 것으로 나아갔다. 내가 이중국적법을 위한 기획위원회에 참여한 것이나, 국외입양인연대 운영위원회에서 활동한 것, 미국 시민권을 미국으로 입양된 모든 사람에게 소급시키기 위한 운동에 참여한 것, LA 국외입양인연대(ASK-LA)를 공동 설립하고, 유색인 입양인을 위한 글쓰기 교실을 시작한 것 등은 무엇보다 ‘정의’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평등과 권리를 원한다면, 그 기회들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 시인, 작가이며 교육자인 필자 줄래인 리(Julayne Lee)

 

나는 왜 해외로 입양되었을까?

 

자라면서 내가 입양된 이유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런 얘기들은 내 과거에 대한 나만의 믿음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내 어머니는 대학생의 몸으로 임신을 해서 학업을 마쳐야 했기 때문에 나를 포기했을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은 이런 이야기에 그냥 웃고 만다. 그런 사연을 실제로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입양 보내는 이유로 너무나 멋진 이야기이지 않는가?

 

더 일반적인 이야기는 한국 가족에게 가난, 불륜, 학대, 부정 같은 문제가 있었거나 사회적 낙인이 찍힐 처지에 몰린 미혼의 어머니가 ‘병원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대신 아이를 포기하라’는 병원과 입양기관 직원들의 강요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 한국인 어머니는 정신질환이나 마약중독 때문에 나를 키울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얘기들은 피임에 실패한 대학생에 대한 것만큼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입양되지 않았다면 나는 노숙인이 되거나, 죽거나, 성매매 여성이 됐을 거란 얘기도 들었다. 일부 입양기관들이 아이를 입양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입양을 결심하게 하려고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결국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이들의 안정적인 ‘공급’이 필요한 사업일 뿐인 것이다.

 

미국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있던 2001년, 나는 성인 해외입양 한국인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 해 여름 한국으로 첫 번째 귀환 여행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을 샅샅이 뒤지며 내 정체성과 문화적 유산에 대한 대답을 찾아 다녔다. 그때까지 그것들은 억눌리고 거의 삭제되어, 흔해빠진 한국 드라마 줄거리와 비슷한, 결코 진짜 나일 수 없는 것으로 짜 맞추어져 있었다.

 

해외입양인이 입양된 나라에 동화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독하고 치명적인 망상일 수 있다. 한국전쟁의 참화를 계기로 시작된 해외입양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해외입양이 지금도 여전히 높은 비율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해외입양을 중단시키거나, 적어도 입양 보내지는 한국 아이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느꼈다.

 

‘잘 사는 한국’을 보고 화가 치밀었다

 

2001년 여름, 한국에서 한 달 동안 유럽 미국 호주 출신의 해외입양 한국인들을 만났다. 우리 모두는 입양 덕분에 행복하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나? 나는 ‘입양에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다른 해외입양 한국인들이 겪는― 나 역시 겪었지만 오랫동안 억눌러온― 상처와 슬픔과 상실감을 목격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결국 나는 한국에서 있었으면 얻지 못했을지 모를 교육과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인생에 가설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한국에 살았다면 더 좋은 인생을 살았을 지, 더 나쁜 인생을 살았을 지, 지금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인생을 살았을 지 아무 증거가 없다.

 

질문은 항상 이런 식이다. “고아원에서 자라는 것보다는 입양되는 편이 낫지 않은가?” 그렇게 단순한 문제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한국의 친가족과 같이 사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때로는 절에 버려진 아기들을 스님들이 받아들여서 자기 호적에 올리고 적법하게 키운다는 얘기도 들었다. 우리가 토론을 하던 중에 누군가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그게 바로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을 했다. 정말 더 이상 진실에 가까울 수 없는 말이다.

 

한국을 방문하고, 이 반도 국가가 전쟁의 참화에서 거의 다 벗어났다는 사실을 목격한 뒤, 나는 더더욱 대체 왜 해외입양이 계속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외로 보내졌을 거라고 하는데, 내가 미국에서 살던 것보다 여기 사람들이 더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대체 뭐가 더 낫다는 말인가?

 

나는 미네소타에 있는 지역 해외입양 한국인 단체에 들어가 간부로 일하면서 문화캠프에서 강연을 했다. 하지만 한국의 해외입양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 새로 입양된 한국인을 보면 너무 부끄러워 울고 싶었다. 몇몇 친구들에게는 이런 생각을 조용히 털어놓았지만, 내가 속한 해외입양 한국인 공동체에서는 여러 이유로 인해 말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해외입양이 잘못된 일일 수 있다거나, 중단돼야 한다고 넌지시 비추는 것조차 금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해외입양 한국인들의 첫 번째 물결/세대 분들을 여럿 만나기 시작했는데, 많은 분들이 혼혈인이었고 자신들이 입양됐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나는 그분들의 경험과 견해를 존중했지만, 그것이 현재 한국의 경제발전과 해외입양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의문들을 해소시키는 건 아니었다. 한 나라가 경제적 번영과 성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자국민을 계속 수출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역사라고 생각한다. 성공이 그런 것이라면, 실패란 과연 어떤 것일지 궁금할 뿐이다.

 

▲  한국에서 태어난 아기였던 내가 미국 가정으로 입양된 이유에 대해 자라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없지만, 과거에 대한 나만의 믿음을 만들어냈다.  ⓒ일다(일러스트: 두나)

 

‘자국민 수출을 중단시키자’ 뜻을 모은 사람들

 

해외입양 한국인 공동체 속에서, 거기서 쓰는 어법과 약어들과 씨름하며 길을 찾고 있을 때, 입양 사후관리(PAS)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하지만 그것은 대개 18세 이하의 해외입양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캠프, 댄스그룹, 요리 및 어학수업, 박물관 방문 같은 문화교육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끔 성인 해외입양 한국인들에게 이런 유형의 행사들이 제안될 경우, 모욕적이고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때도 있었다. 학생이나 배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이나 지능이 낮은 사람 취급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닌데 말이다. 나는 한국 요리 수업을 받아 왔지만 김치 담기를 전혀 잘 하지 못한다.

 

지역의 성인 해외입양 한국인 단체에 있으면서 얻은 것도 있었지만 어떤 점에서는 잃은 것도 있었다. 그 활동은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더 정치적 관점에서 한국의 해외입양을 바라보는, 한국에서 해외입양을 중단시키는 것을 목적하는 단체를 만들고 싶었다. 잃어버린 문화적 유산을 배우는 것 뿐 아니라, 해외입양의 잘못된 점에 대해 토론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외입양 한국인 공동체와 이 사회 전반에서 따돌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고 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2004년, 정해진 기한 없이 한국에서 일하면서 살아보려고 한국에 ‘돌아왔다’. 일자리도 구해 놓지 않은 채 편도 티켓만 끊어서 왔다. 연락처도 몇 개 없었고, 임시로 머물 거처만 구해 놓은 상태였다. ‘정치적인 해외입양 한국인의 조직’이라는 내 구상은 어느 정도 마음 한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외입양에 대한 내 입장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어느 때보다도 확고했다.

 

한국에 올 준비를 하는 동안, 서울에서 몇 년 간 살고 있던 친구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그녀는 해외입양이 왜 문제인지 논의하고,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증대시킬 방법을 모색하며,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해외입양 한국인 단체의 출범 모임에 나를 초대했다. 그 메일을 받았을 때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확실하게 증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메일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내 생각과 견해를 이해해줄 사람들과 연결된다는 사실과, 그런 조직이 실제로 출범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외입양인연대는 내가 서울로 가는 바로 그때,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타이밍에 출범했다.

 

아이들이 ‘자기 역사를 알 권리’가 있지 않은가?

 

‘입양 사후관리’는 여전히 해외입양 한국인들을 한국문화와 연결시켜주고 정체성을 찾게 해주는 서비스로 인식되고 있다. 정체성이란 매우 넓은 개념이며, 기관이나 단체가 아니라 개인이 규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이란 구체적이지도 정형적이지도 않다. 나에게 정체성을 찾는 여정은 순전히 해외입양에 대한 내 생각과 관점, 불편한 감정을 탐구할 수 있는 공간을 얻으면서 그것을 통해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해외입양을 인권의 문제로 보는 것은, 침묵이 더 이상 나의 유일한 선택일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닫게 해주었다. 해외입양이라는 인신매매 과정에서 수도 없이 인권 침해가 벌어지고 있다. 아이와 원 가족, 특히 어머니에 대한 인권침해들. 아이들에게는 그들을 대신해 결정해 줄 어른들이 필요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 말이 사실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인생의 향방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과연 어떤 인간의 권리가 될 수 있을까?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다면, 끔찍한 결과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한국 사회의 규범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 진실은 드러나고 가해자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아이들이 교육 받을 권리를 가진다면, 교육을 통해 자기 자신의 역사를 알 권리 역시 있지 않겠는가? 민족의 유산 뿐 아니라 자기 가족의 역사를 아는 것도 기본적인 인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 산다는 것은 해외입양의 복잡성과 매일 얼굴을 맞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젊은 해외입양 한국인들이 백인 부모들과 함께 돌아오는 것을 보고, 한국 싱글맘들의 투쟁 이야기를 듣고, 내 동료들이 해외입양 한국인으로서 나의 개인적 정체성에 관해 일상적이지만 부절적하고 무례한 질문들을 시작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입양인이라는 사실을 말할지 말지 고심해야 한다. 내 정체성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택시 운전사든, 가게 주인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이, 나는 끊임없이 내가 해외입양 한국인이라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국외입양인연대의 일원이 되는 것은, 내가 태어난 나라를 여행하고 이곳에서 산다는 개인적인 목적을 뛰어 넘는 목적을 주었다. 나에게는 사명이 있었지만 ‘왜 이 단체에 속해 있는지’에 관해 자주 친구들의 질문과 비판을 받았다. 급진적이고, 과격하며, 정치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회원 중 한 사람이 말한 대로 “그것은 급진적이지 않다.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백래쉬(backlash, 반격)를 당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올바르며, 국외입양인연대의 존재 자체가 발전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때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비판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해외입양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열정에 더욱 불을 붙였다.

 

진보적 관점에서 해외입양을 비판하는 것이 흔치 않고 인기도 없었던 시절에, 논란이 되는 이슈마다 국외입양인연대가 내놓은 입장들은 한국 사회에 꼭 필요했으며 획기적인 것이었다. 창립자들은 선구자였으며, 위험을 무릅썼다. 그들이 그런 전략적 모험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 오래 한국에 살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들의 활동이 없었더라면 해외입양은 한국에서 여전히 ‘통제 불능’으로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국외입양인연대는 나를 위한 입양 사후관리였으며, 내 입양 여정의 중대한 부분을 가능하게 했다.

 

한국정부는 입양 이산가족의 상봉을 도와야 한다

 

나는 2004년에서 2008년까지 서울에 살면서 성균관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매 학기마다 학생들은 해외입양에 대한 수업을 받았고, 한국의 사회복지제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입양과 관련한 기본 어휘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나는 해외입양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상당히 터부시되는 주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학생들의 의식에 도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국외입양인연대의 활동은 이런 커리큘럼을 만들어내고 사회적으로 의식의 전환을 불러오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국외입양인연대를 통해 배운 것들은 나를 이중국적 캠페인 활동에 나서도록 이끌었다. 2011년 1월 1일을 기해 해외입양 한국인들은 입양한 나라에서 이중국적을 인정하는 경우, 한국 국적—우리가 결코 빼앗기지 말아야 했던 것—을 자발적으로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가 급진적이고 과격하며 정치적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활동가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내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세계시민이며, 여러분도 그렇게 될 것을 희망한다. 내 개인적 사명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한국에서 해외입양이 중단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어디에서나 비혼모들이 결혼한/이혼한/사별한 여성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기를 바란다.

 

해외입양은 아이들의 권리 측면 뿐 아니라 가족들의 권리 측면에서도 인권의 문제다. 모든 가족은 함께 살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 정부는 그것을 지원해야 한다. 여전히 한국의 가족과 다시 만나기를 원하는 해외입양 한국인들을 위해, 나는 한국 정부와 입양기관들이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을 돕는 만큼 입양인과 친가족의 상봉을 돕는 데 자신들의 도덕적 책무를 다하기를 바란다.

 

미국 ‘시민권’ 없이 살아가는 5만명의 입양인들

 

2011년 이래로 나는 다른 해외입양인들과 함께, 미국에서 2000년에 제정된 아동시민권법(CCA)이 가진 약점을 바로잡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아동시민권법은 해외에서 입양된 아이들이 자동으로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 법은 2001년 2월부로 18세 이상이 된 사람은 배제했다. 일부 입양기관들과 양부모들 및 입양보낸 나라들의 부주의 때문에, 그 결과 대략 5만 명의 국제입양인이 시민권 없이 살게 되었다. 우리는 러셀 그린과 카이리 셰퍼드를 위해 편지를 썼고, 그들이 국외로 추방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또 우리는 아동시민권법의 내용이 모든 입양인을 포괄하도록 개정하기 위해 활동했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은 의회 내 ‘입양을 옹호하는 의원 집단’에 의해 가로막혔다.

 

내 개인적인 경험은 학교를 빼먹은 것과 연결되어 있다. 학교를 빼먹는다는 건 우리 가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거의 완벽하게 개근을 하고 있었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꾀병을 부렸다가는 선생님께 반성문을 써 내야 했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양어머니가 학교에 안 가도 된다고 허락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가까운 친지 한 분과 함께 법원에 갔다. 판사는 자신에게 부여된 권능으로 그 앞에 선 나에게 미국 시민권과 그것이 가진 모든 권리와 특권을 수여해주었다. 우리는 축하하기 위해 점심을 먹으러 갔고, 함께 간 친지 분이 미국 헌법에 관한 책과 성조기를 내게 선물로 주셨다. 나는 아직 그 책과 성조기와 그 중요한 날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책은 약간 누렇게 되었고 성조기의 색은 바랬지만, 기억은 생생하다. 그때는 그 날의 의미를 미처 다 깨닫지 못했었다. 하지만 정장을 차려입고 학교를 빼먹어도 되는 날이었으니 특별하고 중요하게 느껴진 건 분명하다.

 

2001년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국에 가는 것은 입양인들 사이에서 공통된 화제였다. 내가 만난 해외입양 한국인들은 항상 “너 한국에 가 본 적 있어?”라고 물어보았다. 나는 한국에 가지 못한 어떤 여성을 만났었는데, 그녀는 아직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탓에 미국 여권을 발급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럴 시간 여유를 못 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처한 상황에 많이 놀랐지만, 나와 달리 한국인 정체성과 유산에서 본질적인 부분을 빼앗기지 않은 점에 대해 약간 부러움을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몇 년이 지나자, 나는 그녀의 경험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 뿐 아니라 아이티, 인도, 이란, 베트남, 코스타리카 등 미국에 아이들을 입양 보낸 모든 나라 출신의 약 5만 명으로 추산되는 해외 입양인들이 미국 시민권 없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양부모가 미국 시민권자면 입양인도 당연히 미국 시민권자가 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몇 년 전, 양부모님에게 내가 미국 시민이 되려면 따로 귀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냐고 여쭤보았다. 양부모님들은 그 일이 입양기관의 지침에 의해 ‘5년 후에 꼭 해야 할 일’로 당신들의 목록에 항상 올라와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양부모님은 그 5년 동안 나를 데리고 외국에 갈 수 없었다. 양부모님은 우리가 법원에 갔던 날 전에 친지분과 함께 내 입양이 합법적인 해외입양임을 보증하는 인터뷰도 해야 했다.

 

입양인은 ‘만약에 이랬다면?’ 놀이의 덫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다른 인생을 가정해 보는 것은 내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입양이라는 복권에 당첨된 이상, 나 역시 너무나 쉽게 시민권 없이 살아가는 5만 명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만일 내가 미국에 귀화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교육을 받고 커리어를 쌓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까? 나는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학자금 대출을 신청할 수 있었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년 봄, 거의 7년간 일하던 직장에서 일자리를 잃었다. 두 달 뒤 나는 다시 정규직 일자리를 구했다. 지금도 다른 회사 인사담당자들로부터 일자리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있다. 나는 해외에서 살고 일하면서 40개국 이상을 돌아다니고 있지만, 투표도 할 수 있고 운전면허도 유지하고 있다. 내가 귀화하지 않았다면, 이 대부분은 나의 현실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의 첫 시집 <내 백인 구원자가 아니야>

 

상당히 근본주의적이고 법률지상주의인 가정과 교회에서 성장하면서, 정의감은 항상 내 원동력이 되어왔다. 나는 입양으로 말미암은 인권의 위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사실 이런 활동에 따르는 감정노동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 뿐 아니라 어느 정도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나는 내 활동에 대한 반대와 백래쉬를 경험하고 있고, 그 일부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다른 입양인들한테서 나온다.

 

▲  시 낭송회. 내 개인적인 치유를 위한 글쓰기에서 시작한 것이지만, 이제 내 시는 나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치유가 될 수 있는 입양 사후관리의 일부이다.  (photo by Kuya Paul)

 

하지만 나는 언제든 일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소중한 취미를 갖고 있다. 나는 시를 쓴다. 시는 문학이 낳은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시 속에서 나는 시가 아니면 말하기 어려웠던 것을 말할 수 있다. 시는 치유가 된다. 시는 내 영혼을 위한 명상이다.

 

일인칭 시점으로 쓴 시 “나를 보낸 나라로 돌아가기”(Return to Sender)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미국 시민이 아니며, 추방 감호소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내 방식으로 가공해서 쓴 것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워크숍들을 지원했지만, 극히 개인적인 나의 문제로 관심을 불러올 수 있는 다른 방식을 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내 경험이 아닌 내용의 시를 써서 발표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인 의문이 들었다. 내 의도가 선하다 해도, 누군가의 경험을 착취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그냥 나만 간직하고, 발표하지 말아야 하나? 나는 시민권이 없는 입양인 여러 사람에게 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들은 전적으로 나를 지지해주었다. 이 문제에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들은 대찬성이었다.

 

어느 무덥고 습한 7월의 여름날, 서울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방문한 일이 생각난다. 초조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해외입양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야 할 섹션에 다가갔지만, 입양을 목적으로 해외에 보내진 거의 20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없는 것을 보고 실망감만 느꼈을 뿐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역사적 기록에 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늘 일기를 썼고, 한국에 처음 돌아간 뒤로는(2001년) 글쓰기 워크숍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글쓰기를 저항이라기보다는 치유라고 생각했다. 내 갈등하는 생각들과 감정들을 받아들여줄 장소는 없었지만, 종이에 적은 글들은 내게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존재 자체로 나를 증명해주었다.

 

로스앤젤리스로 이사했을 때, 나는 손금 보는 사람-자기 말로는 손 분석가를 한 사람 만났다. 당시 내가 작가나 시인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시를 쓴다고 말한 게 틀림없다. 그녀는 내가 책을 출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말하고는 속으로 웃었다. 내가 예전에 글 쓰는 것보다는 경영하는 쪽을 더 좋아했던 십여 년 전부터 만들던 몇몇 독립 간행물들 이외에는, 어떤 것도 출간하고 싶은 마음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오픈 마이크 행사에서 시를 낭송해 본 적도 없고, 미완성 시와 에세이들 여러 개가 내 파일 속에 묻혀 있을 뿐이었다. 아무 것도 완성하지 못했으니, 공개적으로 낭송하거나 출간할 생각 같은 건 할 수 없는 일이다.

 

로스앤젤리스의 관대한 문학 공동체의 축복을 받아, 나는 오픈 마이크 행사들과 워크숍들과 글쓰기 창작·발표 프로그램을 찾아냈고, 마침내 올해 첫 시집 <내 백인 구원자가 아니야>(Not My White Savior, 2018년 3월, Rare Bird Books)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출간하고 내 여정과 역사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만약 글쓰기가 저항이라면 동시에 그것은 나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치유가 되는 입양 사후관리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2005년에 공개 시 낭송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내 시를 한국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시의 프린트 본을 요청했고, 내 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그때 나는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었다. 치유의 공간으로서 글을 쓰는 과정에 있었고, 글쓰기의 목적도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치유하고 있는 중이지만, 이제 내 글쓰기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지점에 와 있다. 나는 내 책을 활동으로 여긴다. 다른 나라로, 다른 인종에게로 입양 보내진 많은 사람들이 <내 백인 구원자가 아니야>를 읽고 자신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2017년 9월, 미국에서 나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최초의 유색인 입양인들을 위한 시낭송회를 주최했다. 낭송회는 시인과 청중을 막론하고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내가 더 많은 일을 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하도록 격려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12월부터는 유색인 입양인, 원주민 입양인, 인종이 불명확한 입양인들로 정체화하는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말: 글쓰기와 표현 워크숍>을 시작했다. 워크숍은 타인의 판단과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자신들의 진심을 이야기할 공간을 가지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효하고 긍정적인 일이다.

 

▲ 줄래인 리의 첫 시집 <내 백인 구원자가 아니야>(Not My White Savior, 2018년 3월, Rare Bird Books)

 

입양 사후관리란, 내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

 

내가 공동체에 참여하고 활동을 해 온 것은 해외입양이 모두의 문제이며, 모두의 생각은 틀에 박힌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도전받아야 한다는 믿음에 기인한다. 나는 2013년 로스앤젤리스의 정의진흥협의회(Advancing Justice Conference)에서 최초로 입양된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모임을 주최했다. 그 모임은 여러 민족의 입양 및 비입양 아시아계 미국인들, 한국계 미국인 2세대, 아시아계 미국인 양부모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해외입양 한국인 공동체 밖에서 해외입양에 대한 관심을 계속 증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이 모임을 개최하는데 있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누군가 그것을 ‘Adopted Asian Americans(입양된 아시아계 미국인 모임) 대신 ‘Asian American Adoption Community(아시아계 미국인 입양 공동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을 때,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우리의 목소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부재했고 침묵당해 왔기 때문에, ‘입양인의 목소리’를 중심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책이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확신을 심어주고, 그들이 소셜미디어에서, 자조 모임에서, 가정에서 진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북돋아 주기를 바란다. 입양 사후관리는 입양인들이 졸업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나에게 그것은 내 입양 여정에서 꼭 필요한 일부이다. 그것은 많은 형태를 취하지만, 내가 치유되고 내 정체성을 제대로 찾아가는 토대가 된 것은 무엇보다 ‘활동’이었다. (번역: 권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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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1/24 [20:37]  최종편집: ⓒ 일다
 
다람쥐 18/11/25 [19:02] 수정 삭제  
  미국 가정으로 입양되었으니 잘 된거다.. 라는 일반화가 얼마나 무책임한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해외입양 여성들 이야기를 계속 읽고 있는데 자기 태생을 모른다는 것, 엄마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 왜 떠나왔는지 모른다는 것, 인종이 다른 가정에서 큰다는 것. 그렇게 미궁에 빠진 과거를 안고 자란다는 것이 어떤 경험일까 많이 떠올려보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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