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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몸에 “봉인된 유토피아들”이 피어날 수 있도록
일레인 스캐리 作 <고통받는 몸>의 사유를 확장하기(4)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김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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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고문, 전쟁, 언어, 창조성에 관한 독창적인 사유를 통해 인간의 문명을 고찰한 일레인 스캐리(하버드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의 <고통받는 몸>(1985) 한국어판이 나왔습니다. <이미지 페미니즘>의 저자이자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김영옥 님이 스캐리의 사유를 안내하고, 더 깊이 확장하는 글을 4편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몸을 떠나 몸에 도달하기

 

문명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외부 환경을 재구조화하여 외부 환경이 인도적인(humane) 인식으로 가득 차 있도록 만든다. 사물이 이런 인식을 지니고 있지 않을 때 일상에서 우리는 그 사물을 국경 밖으로 내보내달라고, 우리가 사랑하는 도시의 관문 너머로 내보내달라고 쓰레기를 수거하는 청소부에게 요구한다. 어쩌면 쓰레기 청소부는 플라톤적인 이상적 문명에서 파견 나온 사절인지도 모른다.

 

<고통받는 몸>을 읽다보면 드물지 않게 마주치는 문명을 향한 낙관적인 기대는 과연 그저 낙관적일 뿐인가. 위와 같은 문장들을 단지 순진한 기대로만 읽게 되는 것은 우리가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너무나 과도하게 상실했거나, 아니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유치하고 비겁한 유토피아적 상상력’으로 늘 피신하기 때문 아닐까.

 

▶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세계를 창조하기와 파괴하기>(메이 옮김, 오월의봄, 2018)

스캐리의 책은 현실 역사 속에 엄연히 실재했던 끔찍한 범죄인 고문의 메커니즘 분석에서 시작하고 있지만, 이 책 뿐 아니라 그녀의 전 사유의 여정을 추동하고 있는 것은 문명에 관한 기대와 문명을 가능케 하는 토대로서 개별 사람들이 발휘할 수 있고, 발휘해야만 하는 창조하기 능력이다. 이 능력을 향한 믿음과 추구이다.

 

<고통받는 몸>은 몸(의 제한과 ‘여기’라는 절대적 장소성, 고통과 통증)에서 벗어남으로써 유토피아의 한 조각을 만들고(만들 수 있는 권위를 확보하고), 다시 그 권위에 몸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몸들과 만나는, 아름답고 의미로 충만한 순환(을 향한 열망)을 그려 보인다.

 

푸코는 ‘무조건적이지 않은 유토피아’로 이 순환의 과정에 다른 통찰력, 다른 정동을 채워 넣는다. 푸코의 <유토피아적인 몸>(1966)에서 몸은 ‘내’가 옮기고 자리를 바꿔 움직여줘야 하는 ‘그것’으로 표현되다가, 글이 끝날 무렵이면 출렁이는 모든 유토피아들을 가라앉히고, 그 모든 유토피아들에 무게감과 밀도를 주는 핵심 유토피아로 전환된다.

 

내가 있는 곳에 언제나 있는, 돌이킬 수 없이 ‘여기’에 존재하는, 절대적 장소인 나의 몸은 ‘모든 장소 바깥에 있는 장소’인 유토피아의 정반대로 인식된다. 매일 아침 동일한 현존, 동일한 상처로 조우하게 되는, 나에게 강요된 장소인, 나의 이 몸. 사람들이 상상해 낸 유토피아들은 몸의 이 슬픈 위상학을 지울 수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 최고의 자리에 영혼이 있고, 그 아래에 혹은 주변에 시간을 가로질러 완강하게 지속되는 미라의 무덤과 마법사의 주문이 불러내는 정령과 요정의 세계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유토피아들의 원천이 바로 몸이라면? 그렇다면 완강하고 절대적인 장소인 몸이 동시에 장소 바깥의 장소일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유토피아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일단 몸의 불가해한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몸에는 바깥으로 열려있는 창들이 있다. (푸코는 두 개의 창, 즉 두 개의 눈을 언급하고 있지만 나는 몸에 있는 구멍들이 모두 이러한 열린 창이라고 생각한다. 입과 콧구멍, 귀. 여성에게는 그리고 무엇보다 질이 있다. 이 구멍들도 모두 바깥세상을 향해 열린 출구이며, 또 바깥세상을 차단시키기 위해 잠그는 문이다.) 이 창들 덕분에 몸은 ‘침투할 수 있지만 불투명하고, 열려 있으면서도 닫혀 있다’. 이 몸은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절대적으로 가시적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일종의 비가시성을 지닌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온전한 가시성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거울을 통해서일 뿐이다.

 

푸코는 여기에 ‘시체’ 상태의 몸을 덧붙인다. 시체인 몸은 전적으로 가시적이다. 그러나 시체 상태로 가시적인 나의 몸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몸은 생명이기도 하고 사물이기도 하다. 바람결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행동하고, 욕망하며 살 때 내 몸은 가볍고 투명하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고 달리지도 행동하지도 욕망하지도 못하게 삶 자체가 결핍과 통증으로만 남아있을 때, 이 몸은 ‘폐허의 사물’일 뿐이다. 고문이나 전쟁이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몸이다. 불투명하고 무거운 사물로 남겨진 몸. (논의를 앞당겨 말하자면 그것은 유토피아일 수 없는, 유토피아이기를 멈춘 몸이다.)

 

▶ 만성통증 환자들이 보내준 그림 등 미술작품 사진을 전시하는 사이트 painexhibit.org 온라인 전시 이미지들 <희망과 변환>

 

몸은 언어를 통해서 뿐 아니라, 몸 위에 새겨지는 문신이나 얼굴에 씌워지는 가면, 특정한 옷 등을 통해서도 상상의 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 상상의 공간은 신성의 세계나 타자의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유토피아다. “그러면 몸은 자신의 물질성, 자신의 살덩어리 속에서 그 자신의 환상의 산물의 산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스캐리가 <고통받는 몸> 2부 ‘창조하기’에서 공들여 재구성하고 있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전에서 전개되는 신과 인간의 이야기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몸의 이야기이다. 또한 ‘춤추는 사람의 몸’도 자기 안에 “봉인된 유토피아들”을 피어나게 하는 몸이다. “결국 춤추는 사람의 몸이란 바로 몸의 내부인 동시에 외부인 공간만큼 확장된 몸이 아닌가?”(미셸 푸코, “유토피아적인 몸”,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유토피아에 기대어 우리가 부인하는 이 몸이야말로, 실제적이든 유토피아적이든 모든 장소가 뻗어나가는 유토피아적 알맹이라고, 우리 몸을 휘발시켜버리는 출렁이는 저 유토피아적 열정을 ‘침묵하게 만들고 진정시키고 울타리 안에 가두어 둘 수 있게’ 해 주는 ‘무조건적이지 않은 유토피아’라고 푸코는 사유를 이어나간다.

 

몸이 무조건적인 유토피아가 아닌 까닭은 몸이 형태와 윤곽, 밀도, 무게, 즉 장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려주고 증명하는 거울 이미지나 우리의 시체는 우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어떤 다른 곳에 있다. 그렇다면 이 조건 지워진 유토피아인 몸을 지각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푸코에 따르면 그것은 사랑의 행위에서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스스로를 되찾은 자신의 몸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 몸이 모든 유토피아의 바깥에서 자기 밀도를 온전히 가지고서 타자의 손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을 가로지르는 타자의 손길 아래서, 보이지 않던 당신 몸의 온갖 부분들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타자의 입술에 대응해서 당신의 입술은 감각적인 것이 되고, 반쯤 감겨진 그의 눈앞에서 당신의 얼굴은 확실성을 얻게 된다. 이제야 당신의 닫힌 눈꺼풀을 보려는 시선이 있는 것이다. 사랑 역시 거울처럼, 그리고 죽음처럼 당신 몸의 유토피아를 누그러뜨린다. 그것은 유토피아를 침묵시키고 달래주고 상자 안에 넣은 것처럼 가두고 닫아버리고 봉인한다. 그래서 사랑은 거울의 환영, 죽음의 위협과 사촌지간이다. 사랑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이 위태로운 두 형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나 사랑 나누기를 좋아한다면, 사랑 안에서 몸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강조 저자)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여기에 있으면서 여기를 벗어나기, 여기라는 확실한 장소에 무게와 밀도로 존재하면서, 장소 바깥으로, 비가시적이고 신성한 곳으로 들어가기가, 그리하여 유토피아적 몸으로 온전히 존재하기가 가능한 시공간이 사랑하기의 시공간이라는 푸코의 짐작은, 윤리학이 가능한 행위의 시공간이 예술, 사랑, 학문, 정치라고 말했던 바디우의 짐작과 만난다. 예술은 일종의 색깔 가면이고, 학문은 잠정적 시체 되기이며, 정치는 유토피아적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유토피아적 알맹이인 몸이다.

 

스캐리의 논의를 맴돌고 있는 창조하기와 파괴하기는 유토피아적 몸의 세속적 활성화를 찬양한다. 몸 안에 “봉인된 유토피아들”이 제대로 피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바로 몸이라는 유토피아가 지켜져야 한다. 그녀가 ‘탈체화’라고 부를 때 그것은 몸을 부인하는 무한한 힘으로서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이나 열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유토피아적 상상을 (또는 그러한 유토피아적 상상에로의 도피를) 가라앉히고 누그러뜨리는, 조건 지워진 유토피아인 몸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고통받는 몸>은 무엇보다도 몸에서 모든 유토피아적 힘들을 제거해버리는 온갖 ‘고문들’에 관한 강렬한 이의 제기와 항거가 아닌가. 몫이 없는 사람들, 온 우주가 몸으로 축소된 사람들, 창조하기라는 공공선을 행할 모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 신성과의 내밀하고도 비의에 찬 교류를 비웃음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상이한 이유들로 사랑을 나누지 못하게 된 사람들, 이들 사이에 ‘우리’가 그리고 ‘세상’이 있다.

 

우리 각자의 몸에 “봉인된 유토피아들”이 피어날 수 있도록, 서로 타자의 고통에 감응하는 몸들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 것일까. (끝)

 

※ 이 글은 일레인 스캐리의 <고통받는 몸>(메이 옮김, 오월의봄, 2018)에 쓴 발문을 조금 수정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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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2/13 [19:01]  최종편집: ⓒ 일다
 
apple 19/02/15 [11:00] 수정 삭제  
  스캐리와 푸코를 지나는 몸에 대한 사유 잘 봤습니다.
콩이 19/02/17 [16:37] 수정 삭제  
  푸코의 논의가 저에게는 좀더 솔깃하네요. 아무튼 독서욕 자극하는 기사였슴다.
내안 19/02/21 [11:24] 수정 삭제  
  바디우의 짐작과의 연결이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석이 협소하다 싶지만 푸코의 사랑하기가 유토피아적 알맹이인 몸과의 관련성은 명확하게 인지되는데, 중간에 끼인 바디우의 짐작은 붕 뜬 느낌이랄까요...
시울연화 19/02/25 [15:16] 수정 삭제  
  내안 님께: 알랭 바디우가 에서, 윤리학이 가능한 행위의 시공간이 예술, 사랑, 학문, 정치라고 말했는데, 그 4 가지 시공간을 푸코의 언급과 연결시켜 본 것입니다. 지면상 짧게 언급해서 붕 뜬 느낌드셨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학문을 시체되기와 연결시킨 게 어색하셨을수 있는데, 분석과 (특히 문자적) 논리에 천착하는 학문의 시공간은 삶의 일상적 소용돌이를 죽음/시체의 관점에서 결빙시키는 순간들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의견 고마웠어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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