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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예방규약은 창작을 방해하지 않는다’
한국 공연예술 자치규약 만들려는 연극인들의 워크숍 현장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박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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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연극계에 존재하던 성폭력을 고발하며 미투(#MeToo, 나도 말한다)를 외친 피해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지 벌써 1년이다.(관련 기사: 미투 이후…피해자들 “왜 이제 와서 말하냐고 묻지 마라” http://ildaro.com/8142) 가해자들이 법적 처벌을 받게 되었지만, 그걸로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연극인들은 변화를 위해 활동 중이다.

 

▶ 작년 10월 5일 부산에서 스웨덴 미투 운동을 이끈 수잔나 딜버(스웨덴공연예술부문 배우연맹 이사장) 초청 포럼이 열렸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부산문화예술계반성폭력연대 주최) ⓒ일다(박주연 기자)

 

생존자들은 자신들이 겪은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연극에 대한 열정을 토로하며 구조적인 변화를 촉구했다. 연극인들은 이러한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도록 울림을 확장해오고 있다. 앞으로 많은 연극인들이 참고하고 가이드라인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국 공연예술 자치규약’을 만들기 위한 워크숍이 열린 것도 그 일환이다.

 

2월 8일과 9일에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과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가 주최한 ‘한국 공연예술 자치규약’(Korean Theater Standards, KTS) 제작 워킹그룹 집중 워크숍은 미국에서 <시카고 극장 표준모음집>(Chicago Theater Standards, CTS)을 만든 로라 피셔(Laura Fisher)를 연사로 초청해 함께 했다.

 

예술가들을 보호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장치

 

워크숍을 진행한 박영희 연출가는 “시카고 극장 표준모음집(CTS)이 어떤 배경으로 만들어졌고 무엇을 담고 있는지 확인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한국 연극 표준모음집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논의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 2월 8∼9일 삼일로 창고극장 스튜디오에서 열린 ‘한국 공연예술 자치규약 제작을 위한 워크숍’. 시카고 사례를 설명하는 로라 피셔(왼쪽), 조용경 통역가, 박영희 연출가. ⓒ일다(박주연)

 

시카고의 한 극장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2015년 3월부터 로라 피셔를 중심으로 예술가와 행정가들로 구성된 약 20명 내외의 사람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며, 안전한 극장과 예술인들이 존중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초안을 1년에 걸쳐 만들었다. 그리고 20개 극장에서 테스트를 진행했고, 2017년 12월에 최종 버전을 만들었다. 우연히도 최종 버전이 나온 건 마침 헐리우드에서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력이 폭로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로라는 “CTS는 어떤 개인을 고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며, 그를 처벌하기 위한 규정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CTS의 주요 목적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신진 예술가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멘토링’하며, 서로가 대화를 단절하지 않고 ‘소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설명이다.

 

즉, 성/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신진예술가들을 멘토링하자”는 게 이 규약의 목표이다. 로라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때서야 서랍에서 꺼내보는 규정집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강요가 아니라 ‘트렌드’가 될 수 있도록

 

또한 CTS는 “모든 극장이 의무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강제 규약이 아니”다. 극장과 극단은 이를 쓸지 안 쓸지 선택할 수 있다.

 

로라는 “CTS가 이미 인사 규정이나 노동 환경에 대한 제도가 있는 대형극장을 고려해서 만든 게 아니라. 노조에도 가입할 수조차 없는, 소극장에서 일하는 예술가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자체적으로 규약을 만들고 그걸 검토할 시간이나 예산이 없는 소극장에서 일하는 많은 예술가들이 폭력 및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고용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신진예술가들이 법의 부재 속에서 아무런 규제나 가이드라인 없이 일을 배운다. 그리고 그 신진예술가들은 무법성을 가지고 더 큰 무대로 가게 된다.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고 서로의 안전을 챙기지 못하는 환경에 적응한 상태로 말이다.”

 

국내 워크숍에서 “CTS가 만들어지는 걸 경계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없었는지, 그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질문이 나오자 로라는 “그들을 설득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단지 CTS가 완성되었을 때 공유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CTS를 사용하게 될) 극단 및 극장 대표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것도 중요했기에 만들어지는 과정에 최대한 그들의 의견도 포함시켰다.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때도 ‘안 돼, 그건 말도 안 된다’고 한 게 아니라, 최대한 다 집어넣고 실제 테스트를 거치면서 필요 없거나 적용이 안 되는 부분을 다 같이 수긍하고 수정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로라는 “강요가 아니라 ‘트렌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주요한 점”이라고 꼽았다. CTS가 법적인 규제가 아닌 만큼,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거다. 로라는 “CTS를 써 본 연극인이 CTS가 제작 환경을 안전하게 만들고 서로의 소통을 더 원활하게 해 준다는 걸 체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스스로 깨우치게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 ‘한국 공연예술 자치규약 제작을 위한 워크숍’ 참가자들.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제공

 

책임과 역할, 호칭, 질문할 권리, 소통의 방법 명시하자

 

이번 워크숍에 참여한 약 25명의 국내 연극인들은 이틀 동안 배우, 연출, PD 및 기획, 작가 및 번역 그룹으로 나눠 다양한 토론을 진행했다.

 

박영희 연출가는 참가자들에게 “CTS가 절대적인 바이블(경전)은 아니”라는 점을 당부했다. “미국의 제작 환경과 한국의 제작 환경은 같은 지점도 있지만 분명 차이가 있고, 문화적 차이도 있다. 시카고 극장 표준모음집에 관해 알아가는 이 과정은 우리가 어떻게 ‘한국형 자치규약’을 만들 것인지 그 기반을 다지는 과정”이라고.

 

참가자들은 시카고의 공연 제작 환경과 그 속에서 CTS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궁금해 했는데, 특히 ‘비공식 대리인’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비공식 대리인’은 연극 제작 과정에서 프로듀서/연출가와 스텝 사이에 중간 역할을 하면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접수하고 보고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미국에선 배우 조합이 오랫동안 ‘조합 대리인’ 제도를 운영”해왔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나 조직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로라는 “한국에서 그런 제도가 없었다고 한다면, ‘대리인’ 교육 제도부터 마련하는 걸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대리인’은 문제를 해결하는 ‘경찰’이 아니라,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워크숍에서는 KTS의 미래를 꿈꾸며 ‘꼭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토론도 진행했다. 참가자들은 “KTS가 창작을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문구가 들어갔으면 좋겠다”, “존칭 사용에 대한 기준”, “모든 구성원들이 존중 받을 수 있는 소통 방법”, “질문할 권리”, “구성원들의 책임과 역할 명시” 등 소중한 의견을 내어놓았다.

 

많은 이들이 ‘소통’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로라 피셔 또한 ‘소통’의 중요성을 재차 언급했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더 많은 동료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의 의견을 듣고 함께 지혜를 모으는 게 중요하다”며, 그런 과정을 거침으로써 “많은 이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고도 조언했다.

 

변화는 이미 현장에 있었다

 

연극인들의 워크숍에선 정말 다양한 이야기와 정보들이 오갔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둘째 날이 시작될 때였다. 첫날 토론 시간에 발언권이 약간 불균형하게 주어졌다는 피드백이 있었는데, 진행 팀에서 둘째 날 워크숍을 시작하면서 이를 언급했다.

 

박영희 연출가는 “우리 모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때 어떻게 발언권을 나누는 게 좋을지 한번 연습해 보자”며, 참가자 모두에게 “각자 KTS에 꼭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2분 동안 생각하고, 그룹 내에서 1분씩 돌아가면서 발언하자”는 미션을 줬다.

 

타이머까지 재어가며 진행된 이 시간은 딱딱한 게 아니라 오히려 즐겁게 흘러갔다. 시간을 맞춰 말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서로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고, 발언 시간을 딱 지킨 사람에게 박수가 나오기도 했다. 워크숍을 통해서 ‘소통’하고자 하는 연극인들의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거나 실수였는지 성찰하고 상황을 더 낫게 만들고자 하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시간이기도 했다.

 

이번 워크숍을 시작으로, 행사에 참여한 연극인들은 약 1년 동안 매달 모여 라운드 테이블을 진행하며 KTS를 제작하는 과정을 거칠 예정이다. 초안을 가지고 극장에서 적용해 보는 파일럿 테스트까지 진행한 후 최종본까지 나오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기대를 가지고 기다려볼만한 결과물이 될 것 같다.

 

미투 이후, 이전에 마음껏 해 왔던 많은 행동들을 이제 못하게 되었다며 불편함을 토로하는 이들이 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본다면, 미투 운동은 사회의 구성원들을 규제하거나 처벌하는 일들만 가져온 게 아니라, 모두가 존중 받고 모두가 안전할 수 있도록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발구르기를 하는 것이란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연극계에서는 확실히 그 발구르기가 가져오고 있는 변화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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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2/20 [16:14]  최종편집: ⓒ 일다
 
남겨진 19/02/21 [10:30] 수정 삭제  
  강요가 아닌 트렌드가 되게 하자는 말은, 문화로 정착되기를 바란다는 말의 동의어일텐데요. 이 문화가 정착되기 위한 조건과 환경, CTS를 예로 들면 '대리인'을 어떤 방식과 형태로 둘 수 있을지 필요성과 별개로 이 역할에 어떤 권한과 대우를 부여하는게 적합할지 등 구체적인 논의도 앞으로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cream 19/02/22 [11:00] 수정 삭제  
  완전 설레네요. 희망적인 기사를 보니까 힘 난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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