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여성이다” 아노니가 바라본 퓨처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면 이 뮤지션> 화제의 음악가 아노니(Anohni)

블럭 | 기사입력 2019/03/22 [10:18]

“미래는 여성이다” 아노니가 바라본 퓨처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면 이 뮤지션> 화제의 음악가 아노니(Anohni)

블럭 | 입력 : 2019/03/22 [10:18]

유럽에는 ‘유럽 문화 수도’(European Capital of Culture)’라는 사업이 있다. EU(유럽연합) 회원국의 도시를 매년 선정하여, 1년 동안 집중적으로 여러 문화 행사를 여는 것이다. 2017년 ‘유럽 문화 수도’는 덴마크의 오르후스(Aarhus)와 키프로스의 파포스(Paphos)라는 두 도시에서 열렸다. 특히 덴마크의 대도시인 오르후스는 도시의 문화적 성장을 위해 다방면에서 공을 들였고, 큰 규모의 이벤트를 펼쳤다.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많은 화제를 낳았는데, 그 중에는 아노니(Anohni)라는 음악가를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Artist-in-Residence,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의 하나)로 선정해 개최한 행사들도 포함돼 있다.

 

▶ 덴마크 오르후스에서 아노니와 캠브라 팔러, 조안나 콘스탄틴 세 사람은 ‘퓨쳐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로 전시와 퍼포먼스, 비디오아트, 강좌, 워크숍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 아노니(Anohni) 페이스북 페이지

 

아노니(Anohni)는 오르후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거대하고 웅장한 공연을 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벤트는 따로 있었다. 바로 ‘퓨쳐 페미니즘’(Future Feminism)이라는 이름의 전시 프로그램이다. 퍼포먼스 아티스트 캠브라 팔러(Kembra Pfahler)와 조안나 콘스탄틴(Johanna Constantine)과 함께 만든 ‘퓨처(미래) 페미니즘’은 퍼포먼스와 워크숍, 토크 프로그램이 결합된 행사였다.


이들이 선보인 퍼포먼스 아트와 비디오 전시, 즉흥 댄스, 미술 강좌, 공연과 사진 촬영 기법, 각자의 그림 문법을 찾는 일러스트 수업, 홈메이드 악기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들도 흥미롭지만, 극단주의로 불리는 페미니스트들의 거리 행동을 지지하며 전략을 논의하는 워크숍, ‘여성의 몸’과 ‘생태’의 파괴 사이의 교차점을 논의하는 원탁 이벤트, 덴마크 페미니스트 정치그룹 찾기, 국가폭력과 여성들의 방어, 남성중심의 언어와 일상의 성차별을 변화시키기 위한 프로젝트, 오리지널 여성신화 읽기, 젊은 페미니스트들과 선임 여성들이 관객과 공유하는 미래의 페미니즘 비전, 퓨쳐 페미니스트 애슐리 미드를 위한 바다에서의 장례식 등 ‘미래의 페미니즘’을 내다보는 창의적인 행사들이 채워졌다.

 

사실 이 퍼포먼스는 2014년부터 시작됐다. 세 사람 외에도 코코로시(CocoRosie)라는 음악가까지 포함하여 처음 선을 보인 ‘퓨쳐 페미니즘’ 프로젝트는 조금씩 반향을 일으켜왔다. 그리고 2017년 ‘유럽 문화 수도’ 오르후스에서 대대적으로 열린 이벤트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퓨처 페미니즘’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고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아노니는 스스로를 ‘퓨처 페미니스트’라고 말해왔다. 페미니스트로서, 미래에 온전히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과거의 페미니즘 논의들을 재정의하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지금껏 보여지지 못한 현실의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 아노니(Anohni)가 2016년에 발표한 정규 앨범 [Hopelessness] 커버 이미지

 

2016년에 [Hopelessness]라는 앨범을 통해 이러한 메시지를 음악으로 들려줬다. ‘폭력적인 남성에게 탄생을 주지 말지어다’라고 말하는 “Violent Men”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곡이다. “I Don’t Love You Anymore”을 통해서는 지금의 이분법적 성별 시스템 내에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외에도 “Drone Bomb Me”는 무인 폭격기 이슈를, “4 Degrees”는 환경 문제를 이야기한다. 각각의 곡은 구체적인 당시 정치적 현황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패권주의부터 페미니즘 이슈까지 꿰뚫는다.

 

이 앨범은 총 14개 매체의 연말결산에 올랐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8개 매체에서 만점에 가까운 호평을 들었다. 허드슨 모호크(Hudson Mohawke)와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Oneohtrix Point Never)라는 두 전자음악가와 함께 제작한 이 앨범에는 저항정신이 담겨있을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흥미로운 구성과 진행이 가득하다. 전자음악, 댄스뮤직이라 불러도 좋은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건반부터 작곡, 미디부터 엔지니어 작업까지 대부분의 과정을 세 사람이 함께 만들었다.

 

이 앨범이 놀라운 이유는 아노니가 이전까지는 챔버 팝 스타일의 음악, 그러니까 이 앨범의 분위기와 전혀 다른 느낌의 음악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가 속해서 음악활동을 해 온 <안토니 앤 더 존슨스>(Antony and the Johnsons)라는 이름의 챔버 팝 그룹은 첼로, 바이올린 등의 현악기 편성으로 소규모 실내악 편성을 연상케 한다.

 

▶ 아노니(Anohni)가 보컬로 있는 그룹 <안토니 앤 더 존슨스>(Antony and the Johnsons)가 2009년에 발표한 세 번째 앨범 [The Crying Light] 커버 이미지. 

 

아노니는 1990년대부터 음악 활동을 해왔고, 그의 음악은 섬세함과 날카로움을 동시에 지녔다. 2009년에 발표한 <안토니 앤 더 존슨스>의 세 번째 앨범 [The Crying Light]은 바로크 팝에 가까운 작품이며, 클래식한 구성으로 특유의 우아함이 잘 드러난다. 동시에 이 앨범에 퀴어로서의 정체성과 감수성, 그리고 환경운동의 메시지까지 담아냈다.

 

“Another World”라는 곡에서 그는 ‘나무를, 눈을, 벌을, 동물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하며 이들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Dust and Water” 역시 기후 변화를 암시한다. 여기에 “The Crying Light”, “Her Eyes Are Underneath the Ground”와 같은 곡에서는 퀴어 정체성과 그들의 사랑, 인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이 작품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매체에 등장하여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퀴어 인권에 대해 말하고, 환경 보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깨달았고 사회의 젠더 이분법을 깨고 싶어했다고 한다.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젠더 이분법이 여성의 창조성을 눌렀다’고 표현하는가 하면, 언아더(AnOther) 매거진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영적으로 구분되고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발언했다.

 

이외에도 음악 매거진 페이더(Fader)부터 미국 공영 라디오(NPR)에 이르까지 많은 매체가 그의 목소리를 전했다. 유럽과 미국 곳곳에서 TV와 라디오를 통해 그의 메시지를 들었다.(아노니는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었고 두 나라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 아노니가 보컬과 피아노를 맡고 있는 <안토니 앤 더 존슨스>(Antony and the Johnsons)가 2010년 발표한 네 번째 앨범 [Swanlights] 커버 이미지. 이 그룹의 음악은 실내악을 연상케하는 편성으로, 그 안에 퀴어 정체성과 에코 페미니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노니는 음악가로서 곡의 완성도와 작품성도 잊지 않았다. 챔버 팝, 바로크 팝을 통해 유명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방식을 통해 음악적 역량을 보여줬고, 다큐멘터리 <멸종을 막아라>(Racing Extinction)의 주제곡을 써서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두 번째 트랜스젠더 후보가 되었다. 참고로 <멸종을 막아라>는 2016년 서울환경영화제, 2017년 DMZ다큐영화제를 통해 국내에서 상영된 바 있다. 탄소 배출량과 멸종 간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치열하게 담아내며 인간이 만들어낸 기후 변화의 위험성을 보여준 다큐멘터리다.

 

아노니는 또한 ‘창조는 곧 여성이다’라고 말하며 페미니즘 메시지를 예술적으로 전달해왔다. 젠더 이슈와 퀴어 이슈를 비롯한 인권 사안과 환경 문제, 민주주의까지 깊이 있게 논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음악에서 가사에 담긴 메시지만 중요하게 볼 것은 아니다. 아노니가 만든 많은 음악이 <센스8>과 같은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부터 <브이 포 벤데타>,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 <헝거 게임: 캣칭 파이어”> 등의 상업영화까지 곳곳에서 쓰였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보컬과 피아노를 맡고 있는 그룹 <안토니 앤 더 존슨스>가 발표한 앨범은 총 네 장이며, 아노니의 정규 앨범은 한 장인데 모두 들어봐도 좋다. 좋은 음악에 대한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앨범들이라고 자신 있게 추천한다.

 

▶ 아노니(Anohni)가 2017년 발표한 EP “Paradise” 이미지

 

끝으로 아노니와 그의 콜렉티브가 만든 ‘퓨처 페미니즘’ 신조 13을 소개한다.

 

1. 여성과 지구의 예속은 동일합니다.

2. ‘미래의 페미니즘’은 모든 사람들의 참여를 필요로 합니다.

3. 여성의 권리와 윤리적 대우를 위한 국제 표준을 시행해야 합니다.

4. 성별 간 생물학적 차이를 밝히고 각자의 성향에 근거하여 더 큰 책임으로 ‘개인’을 그립니다.

5. 보호자와 포식자로서의 남성의 역할을 해제합니다.

6. 현재의 상황에 맞게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역할을 재정의합니다.

7. 모든 행정과 공공 영역에서 여성의 시스템을 지지합니다.

8. 생태적 순환 모델을 사용하여 정치 구조를 구축합니다.

9. 생물 다양성의 부활을 촉진하기 위해 사회를 다시 패턴화합니다.

10. 남성 중심의 언어를 여성화합니다.

11. 남성의 정신적 패권주의 신화를 분해합니다.

12. 여성의 원형을 창조의 중심으로 되돌립니다.

13. 미래는 여성입니다.

 

※ ANOHNI - Hopelessness https://youtu.be/5ZW1BBkquFA

※ ANOHNI - I Don’t Love You Anymore https://youtu.be/PemmoQj2tqY

※ Antony and the Johnsons - Cut The World https://youtu.be/8Xvz3FqRCeo

※ Antony and the Johnsons - The Spirit Was Gone https://youtu.be/uzk27ZH53Fs

※ Antony and the Johnsons - Thank You For Your Love https://youtu.be/SWAWJhG5FJk

 

[필자 블럭(bluc): 음악에 관해 글 쓰는 일과 기획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2019년에는 음악과 여성학, 문화연구를 더 깊게 공부하여 그 정보를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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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o 2019/03/24 [15:07] 수정 | 삭제
  • Racing Extinction 주제곡 부르는 아노니의 보이스는 환상적! 꼭 들어보시면 좋겠네요. 트랜스젠더라서 음색이 성별이 묘한 아름다움이 있나 싶기도.. 이 곡에서는 아노니 본인이 환경운동가이기 때문에 더 시너지를 발휘한 거 아닐까.
  • touch 2019/03/22 [19:36] 수정 | 삭제
  • Antony and the Johnsons 음악 좋아합니다. 챔버 팝이긴 한데 약간 사이키델릭 느낌도 나지 않나요? 뮤직비디오 보면서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 궁금했는데 이해가 좀 풀리네요. 개인적으로 전자음악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아노니 보컬이 너무 좋아서 솔로 음반도 들어봐야겠어요.
  • 릴라 2019/03/22 [12:31] 수정 | 삭제
  • 뮤비 보니까 안토니앤더존슨스 음악 들었던게 떠올랐어요. 페미니즘 색깔이 있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지 몰랐는데 좋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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