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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남을 ‘여공’들의 빛나는 투쟁
전태일은 알지만 김경숙은 모르는 당신에게③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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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비상!”

 

1979년 8월 9일 새벽 4시, 사측의 위장 폐업에 맞서 ‘회사 정상화’를 요구하며 기숙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잠든 YH 조합원들의 귀에 불침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5~6명의 남자들이 기숙사 문을 부수려 한 것. 그들은 조합원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고함을 지르며 몰려나오자 도망쳐 버렸다.

 

노조 집행부는 즉시 임시 대의원대회를 열었고, 제2의 농성 장소를 제1야당인 신민당사로 확정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당시 노조 측과 친분이 있던 남성 지식인 몇 명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자택으로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기숙사 농성 3일째인 8월 9일 아침 5시 30분, 187명의 조합원들은 신민당사로 향했다. 목욕 바구니를 들고 목욕탕에 가는 척하며 4명씩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주변에 있다가 9시 30분 정각이 되면 동시에 당사로 들어가기로 약속했다. 나머지 50여명의 조합원들은 기숙사에 남아 농성을 지속했다.

 

석간신문에 크게 보도된 YH노조의 신민당사 농성

 

마침내 성공적으로 당사에 진입한 YH 조합원들은 4층 강당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정상화 아니면 죽음이다’라고 쓰인 머리띠를 두르고 “우리를 나가라면 어디로 나가란 말이냐”라고 쓰인 현수막을 들었다. 김영삼 총재는 노조 대표들을 만나 보건사회부 장관이나 노동청장을 불러오겠다고 약속했다.

 

취재기자들이 몰려들어 사진을 찍고 사건의 진상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그날 각종 석간신문에 YH 노동자들의 투쟁이 크게 보도됐다. 최순영 당시 YH 지부장은 이걸 보고 “이겼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신문에서 노동자 관련 뉴스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던 시절이었다. 각계에서 격려 방문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과 경찰 측은 계속해서 노조의 자진 해산을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당사 주변에 기동대를 배치하는 등 침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민당 측에 “어린 여공들을 미끼로 정치 흥정을 한다”고 비방하며, 빨리 내보낼 것을 종용했다.

 

경찰의 압박이 계속되자 그날 밤, 신민당의 박한상 국회의원은 YH노조 대표들을 불렀다. “당의 업무도 많고 식사비도 부담이 된다. 이만하면 사건의 내용을 다 알았으니 회사로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노조 측은 “여론화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업 정상화’라는 확답을 받기 전까진 나갈 수 없다, 식비가 부담된다면 지금부터 금식할 것이며, 업무에 방해가 된다면 침묵으로 투쟁하겠다”고 답하며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YH 노동조합사>, 형성사, 1984)

 

신민당은 노조 설득을 포기하고 국회에 보건사회위원회 소집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속절없이 시간만 흘렀다.

 

한편 신민당사 밖에서도 분위기가 긴박해지고 있었다. 당시 어용 노동조합을 뒤집으려던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YH가 조금만 더 버텨주면 우리 2천 명도 신민당사 농성에 합류하겠다”고 전해왔다. 생존권 투쟁을 하던 용달차 기사들 2천 명 사이에서도 “우리도 신민당사로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YH노조의 신민당사 농성을 보고 용기를 얻게 된 노동자들이었다.

 

최순영은 “‘YH를 계속 저렇게 뒀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정권이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눈물의 ‘종결 대회’와 경찰의 ‘101호 작전’

 

농성 3일째 되던 날, 신민당 간부 한 명이 노조 지도부에게 “오늘 저녁이 고비”라고 전했다, 지도부는 신민당사에 들어와 있던 연대 세력에게 “오늘은 우리 YH 식구들만 남을 테니까 다 나가 달라”고 요청하고 밤 11시쯤, 조합원들과 마지막 결의를 다지는 ‘종결 대회’를 했다. 이때 결의문을 낭독한 이가 바로 김경숙 열사다.

 

고향에 있는 부모 형제와 고향 땅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올리자 조합원들은 울기 시작했다. 종결 대회를 마치자마자 조합원들은 울분에 차서 음료수병을 깨 들고 4층 창문가에 매달렸다. 경찰들이 쳐들어오면 다 뛰어내리겠다는 결기였다. 놀란 노조 간부들이 조합원들을 겨우 진정시켰다. 김영삼 총재도 “오늘 저녁에는 경찰이 들어오지 않을 거다, 우리가 밑에서 여러분 지켜주겠다”고 말했다.(최순영)

 

▲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 노조를 진압하기 위해 일명 ‘101호 작전’을 개시한 경찰은 무력으로 조합원들을 제압하고 사지를 들어 끌어냈다.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제공 사진)

 

그러나 그날 밤 새벽 2시쯤, 현관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비명과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가 사다리차 2대, 물탱크차 2대가 동원되고 조명용 소방차 2대가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비추는 가운데 특수훈련을 받은 1백여 명의 대통령 경호원과 경찰 2천 명이 신민당사 안으로 들이닥쳤다. 곤봉, 쇠파이프, 벽돌 등을 들고 있었다. 일명 ‘101호 작전’ 개시였다. 이들은 닥치는 대로 때리고 부수고 연막가스탄을 터뜨리며 조합원들을 향해 돌진했다.

 

“조합원들이 지부장이 먼저 잡혀가면 더 빨리 깨진다고 생각해서, 조합원이랑 옷도 바꿔 입고 대오 가운데에 지부장인 저를 숨겼어요.”(최순영)

 

당시 최순영 지부장은 임신 5개월이었다. 경찰은 곤봉으로 조합원들을 때리면서 조합원 한 명 앞에 4명씩 달라붙어서 사지를 번쩍 들어 차례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당시 부지부장이었던 이순주 씨는 “짐짝처럼 던져졌다”고 표현한다. 당황한 일부 조합원들은 주먹으로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려고 했으나 경찰은 이를 제지하고 다 끌어내렸다.

 

진압 과정에서 신민당 의원 및 당직자, 출입 기자 등 40여 명도 심각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김영삼 총재도 멱살을 잡혀 끌려 나와 강제로 자택에 끌려갔다.

 

101호 작전은 정확히 23분 만에 끝났다. 약 40시간 동안 지속됐던 YH노조의 신민당사 농성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신민당사에는 청소부들이 들어와 조합원들이 미처 신을 겨를도 없었던 신발들과 머리띠들을 쓸어 담았다.

 

▲ 1백여 명의 경호원과 2천 명의 경찰이 밀어닥쳐 23분 만에 진압해버린 신민당사에 남겨진 조합원들의 신발과 머리띠.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제공 사진)

 

김경숙 열사 사망…“추모할 시간도 안 주는 거예요”

 

조합원들은 경찰버스에 실려 서울 곳곳의 경찰서로 뿔뿔이 흩어져 연행되어 갔다. 이들은 “경찰이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사정없이 욕설과 구타를 했다”고 증언한다. 조합원들이 “우리 모두가 주동자”라고 말하며 버티면 뺨을 때리면서 “독한 년들”이라고 몰아세웠다. 보다 못한 간부들이 자신들의 신원을 밝혔고, 결국 최순영을 포함한 간부 세 명은 구속됐다. 한편, 기숙사에 남아서 투쟁을 하던 조합원들도 12일 오후, 담을 넘어 진입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조합원들은 경찰 조사를 마친 후 경찰서 앞마당에서 귀향 버스에 태워졌다. 귀향 버스는 YH 본사에 들렀다. 조합원들은 현관 입구에 마련된 ‘퇴직금 지급소’에서 퇴직금, 월급, 해고 수당 등 합쳐서 50만 원도 안 되는 봉투를 받아 들고 고향으로 향했다. 서러운 귀향길이었다. 경찰버스는 집 앞도 아닌 지역 경찰서에 이들을 내려주면서 “얘네들은 빨갱이다, 내일부터 관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날부터 수일간을 경찰이 따라다니면서 노동자 개개인을 감시했다. 정만옥(당시 YH노조 대의원)은 “어떤 조합원은 선보러 갈 때도 경찰이 따라왔다”고 전한다.

 

최순영 지부장을 포함한 YH 조합원들은 연행되고 난 후 경찰서에서 경찰이 “너 김경숙 알아?”, “걔 어떤 애였어?”라는 질문을 재차 했던 것을 기억한다. 최순영은 그걸 듣고 ‘아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라고 직감했다. 그는 유치장에서 화장실에 가는 도중 흘끗 본 신문 한 귀퉁이에서 김경숙 열사가 사망한 것을 알게 됐다.

 

경찰은 김경숙 열사의 사망을 두고 “동맥 절단 후 투신자살을 기도했고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했다”라고 거짓 발표한 후, 이마저 번복하며 “경찰이 진입하기 30분 전에 추락하여 사망했다”고 완전히 왜곡된 사실을 발표했다.

 

김경숙 열사의 장례식은 8월 13일 서울 시립강남병원 영안실에서 단 3분 만에 끝났다고 한다. 장례식장에는 고인의 어머니, 외삼촌, 동생 등 3명 외에 회사 간부와 경찰 등만 입회했을 뿐, 함께 일하고 싸워온 동료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못했다. 게다가 유신정권은 김경숙 열사를 추모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원풍모방노조 부지부장이었던 탁순희 씨는 당시의 비통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추모할 시간도 안 주는 거예요. 신민당사 옆에 녹십자병원이 있어서 국화를 사 와서 거기서라도 추모를 하려고 하면 경찰이 와서 다 두드려 엎고 ‘빨갱이 년 죽은 거 벌을 받아야 되는 마당에 이것들이 미쳤다’고 욕했어요. 두들겨 부수면 그거를 껴안고 나와서 골목에 가서 추모를 하고 그랬어요.”

 

▲ 사망 10주기에 모란봉원에 세워진 김경숙 열사의 묘.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제공 사진)

 

YH 조합원들이 피운 불씨, 부마항쟁으로 번지다

 

경찰이 YH노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야당 총재를 비롯한 국회의원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언론과 종교계, 재야에서 박정희 정부를 향한 비판이 거세졌다. 그러나 국회는 10월 4일, 야당 총재인 김영삼 의원을 국회에서 제명했다. (당시 국회는 국회의원의 1/3을 박정희 대통령이 임명한 ‘유신국회’였다.) 이에 항의하며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전원 사퇴서를 제출했다.

 

10월 16일, 김영삼 총재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의 부산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반유신 시위에 나선다. “유신정권 몰아내고 민주주의 실현하자!” 6천 명의 학생들은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를 외치며 파출소, 경찰서, 도청 등을 타격했다. 시민들도 합류했다. 계엄군의 난폭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마산 쪽으로 확대됐다. 부마항쟁(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경상남도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반정부 항쟁 사건)의 시작이었다.

 

박정희 유신체제는 부마항쟁 대응책을 놓고 내부 분란에 휩싸인다. 그리고 부마항쟁이 시작된 지 열흘 뒤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숨진다. 이렇게 유신체제는 몰락하게 된다.

 

최순영을 비롯한 YH노조 간부들은 달라진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해를 넘기기 전 모두 출소했다. 하지만 그해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정국은 또다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고, 김경숙 열사의 죽음의 진상을 완전히 밝힐 수는 없었다.

 

▲ 김경숙 열사의 어린 시절 모습. 국민학교 친구들과 함께. (가운데가 김경숙)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제공

 

김경숙 열사 사망 후 29년이 흐른 2008년 3월에서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경숙은 모서리 진 물체로 머리(후두정부)를 가격당했고 이는 치명적인 상처”라며 김경숙 열사가 당시 경찰진압에 의해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인정했다.

 

민주노조 운동, 여성노동 운동, 그리고 ‘오늘의 김경숙’

 

최순영 전 YH노조 지부장은 “1970년에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면, 1980년대로 이어지는 투쟁을 시작한 건 김경숙 열사와 YH 투쟁이었다”라고 말한다.

 

최순영과 노동운동가들은 해마다 김경숙 열사 추모제를 지내며 김경숙 열사의 뜻을 기리고자 했다. 1980년대 독재 정권하에서는 추모제가 열리는 공간마저 봉쇄당해 격렬한 가두 투쟁을 벌이곤 했다. 이들은 김경숙 열사 사망 10주기에 모란공원에 묘를 만들었다.

 

그리고 1987년에는 “여성노동자들만의 독자적인 단체가 필요하다”는데 뜻을 모아, YH 등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을 이끌었던 활동가들과 젊은 여성활동가들이 모여 한국여성노동자회를 창립하게 된다.

 

YH 조합원들의 친목 모임인 ‘YH 동우회’와 한국여성노동자회는 2009년, 김경숙 열사 30주기 기념식을 가지면서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를 발족했다. 그리고 2014년 5월부터는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김경숙 열사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며, 노동 현장에서 투쟁하는 ‘오늘의 김경숙’을 찾아내 격려한다는 취지에서다. 2017년에는 전국철도노조 KTX 열차 승무지부 조합원들이 이 상을 수상했다.

 

▲ 2017년, 코레일의 불법 외주화와 부당해고에 저항하며 장외투쟁을 지속하던 KTX 열차 승무지부 조합원들이 제4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을 수상했다.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노동조합은 민주주의의 학교’임을 실천한 여성 노동자들

 

197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은 집에서, 공장에서 무시당하며 ‘공순이’라고 천대받던 수많은 김경숙들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다. 그리고 그 김경숙들은 어용 남성지배 노조가 득세하던 시절, 민주노조를 만들어 그 누구보다 멋지게 싸웠다.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2000년대 들어와서야 노동운동사가나 연구자들에 의해 활발히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대중들은 이들이 어떻게 일하고 꿈꾸고 투쟁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후 노동운동이 시작되어 동일방직, YH 등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졌다”는 식으로 뭉뚱그려진 채 피상적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신민당사 농성 또한 “외부 지식인 남성들의 결정적 도움으로 진행됐다”는 평가가 따랐다. 당시 YH 투쟁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받아 문익환 목사 등 남성 지식인 몇 명이 구속됐다. 하지만 YH 노동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YH노조가 농성 장소를 신민당사로 확정했을 때 김영삼 총재를 찾아가 도움을 구한 것일 뿐, 투쟁을 계획하고 주도한 것은 전적으로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배진경 대표는 “YH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순수하게 내부의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밟아 진행됐다. 투옥까지도 결심하고 ‘왕창 깨지는 싸움’을 하자는 결의, 신민당사로 가는 결정 모든 것은 내부의 치밀한 계획과 치열한 토론으로 결정되었고 그 덕분에 YH 노동자들의 투쟁은 밀도 높게 단단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노조 설립부터 수년에 걸친 투쟁 과정에서 YH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은 민주주의의 학교’라는 원칙을 타협 없이, 온몸으로 실천했다. ‘공순이’들이 만들어낸 한국 노동운동의 빛나는 역사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전태일은 알고 있지만 김경숙은 모르는’ 우리들에게 “역사는 팩트(fact)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다시 살펴보고 재평가하고 기록하면서 만들어가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여성 노동자들의 가려지고 폄훼된 역사를 우리 손으로 다시 써 내려가자!” <끝>

 

[참고 자료]

*한국여성노동자회 팟캐스트 [을들의 당나귀귀] 시즌5-12, ‘70년대 언니들, 어쩌다 노동운동 하게 된 썰_YH 김경숙을 아시나요’, 시즌5-13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여성노동자_YH 김경숙을 아시나요’

*“YH 무역 여성노동자 투쟁 40주년, 2019 여성노동을 말하다” 토크쇼 참가자 최순영, 권순갑, 이순주, 정만옥의 구술 (2019년 8월 10일 녹색병원 강당. 주최: 녹색병원, 중랑희망연대, 사단법인 중랑마을넷, 도움: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다큐멘터리 영화 <꽃다운>, 장희선, 김진상 감독, 2009

*< YH 노동조합사 >, 전 YH 노동조합,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엮음, 형성사, 1984

*<김경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김원, 이매진, 2005

*[KBS 인물현대사] 여공, 유신을 몰아내다-YH사건 김경숙, 2005년 2월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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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9/10 [11:20]  최종편집: ⓒ 일다
 
해리 19/09/10 [14:22] 수정 삭제  
  연재 기다렸습니다. 다 읽고 나니 울컥해서 한동안 진정이 안되네요.
은열 19/09/11 [00:46] 수정 삭제  
  몰랐습니다 저도..이제라도 알게해주셔서 감사해요
songs 19/09/11 [09:36] 수정 삭제  
  여공 읽고 감명을 받았었는데, 이렇게 YH 노조의 투쟁과 의미를 짚어준 기사를 보니까 또 새롭고 먹먹하고 자랑스럽네요!
안녕이 19/09/13 [14:39] 수정 삭제  
  연휴에 막간 타임. 세개의 연재 기사를 주루룩 읽었다.
수원 19/09/14 [10:35] 수정 삭제  
  연재 잘 읽었어요. 톨게이트 수납원들의 농성장이 연상되어서 더 마음이 처절해졌습니다.
토깽이 19/09/19 [15:44] 수정 삭제  
  와 할머니 적 얘기네요 생생하게.. 먼듯 가까운 여성 노동자들의 역사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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