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한’ 일본 사회에 고함: 한국은 적인가!

식민지배는 ‘해결 완료’라는데, 일본은 정말 해결했나?

우츠미 아이코 | 기사입력 2019/11/20 [20:45]

‘혐한’ 일본 사회에 고함: 한국은 적인가!

식민지배는 ‘해결 완료’라는데, 일본은 정말 해결했나?

우츠미 아이코 | 입력 : 2019/11/20 [20:45]

지금, 한일관계가 최악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한일관계 악화와 ‘혐한’ 분위기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7월 하순 “한국은 ‘적’인가”라는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이를 주도한 사람 중 한 명인 게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우츠미 아이코(内海愛子) 씨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우츠미 아이코 씨는 역사사회학자로 <조선인 BC급 전범의 기록>(이와나미 현대문고), <지금 한반도는 무엇을 묻는가>(공저, 사이류샤) 등 다수 책을 펴냈다. -편집자 주

 

▲ 일본의 역사사회학자 우츠미 아이코(内海愛子). 현재 게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이며, 올해 7월 하순 <한국은 ‘적’인가>라는 성명을 공동(9,463명이 연명) 발표했다.    ©페민 제공

 

*한일관계가 악화된 최근의 움직임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 신일철주금에 전 징용공에 대한 배상을 명하는 판결을 내림

-2019년 7월 4일 일본, 한국에 대해 반도체 재료 수출 규제를 강화

-8월 2일 일본, 수출관리에서 우대조치를 적용하는 ‘백색 국가’에서 한국 제외 결정

-8월 23일 한국, 일본과의 GSOMIA(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파기를 통보

 

징용공 배상금 지급 판결, 왜 국가가 개입하는가?

 

작년 10월, 한국 대법원이 전쟁 중 조선인을 징용한 신일철주금에 배상금 지급을 명하고 11월에는 미츠비시중공업에도 마찬가지의 지급을 명했습니다. 이에 대해 아베 총리는 피해자 개인 청구권에 대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이 끝났다”고 주장했으며, 일본의 언론들도 같은 논조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국회에서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남아있다’고 몇 차례나 답변한 바 있습니다. 이 문제는 법원의 판결에 대해 피해자와 기업이 서로 이야기하여 해결할 문제이지, 일본 정부나 한국 정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중국인이 강제노동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던 니시마츠건설 재판에서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2007년, 일중공동성명에서 배상을 포기했지만 개인 배상청구권은 남아있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후 니시마츠건설은 사죄하고, 피해자와 합의했습니다. 가고시마건설(하나오카 사건), 미츠비시머테리얼 등도 피해자와 대화하여 개인 배상을 했습니다.

 

이처럼 선례가 있으니, 한국의 ‘징용공 문제’도 피해자와 기업이 함께 풀어갈 수 있습니다. 더구나, 마찬가지로 강제노동을 당한 미국이나 호주 등 연합국의 전 포로에 대해서도 개인 배상을 하고 사죄한 바 있습니다.

 

▲ 서울 용산역 부근 강제징용 노동자상.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강제동원공동행동과 양대 노총이 대일본 과거청산과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고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를 추모하며 합동 참배했다. ©KIN지구촌동포연대

 

식민지배에 대해 어떤 판결도, 청산도 없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한국의 대법원 판결문 중 “‘불법 식민지배’ 하에 이뤄진 비인도성”이라는 언급입니다. 이 식민지배가 전후 어떻게 청산되었는가, 혹은 되지 않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46~1948년의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는 조선, 대만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는 심리의 대상이 되지 않아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BC급 전범재판에서 조선인은 일본인으로서 판결받았습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미국이 발표한 ‘대일강화 7원칙’에는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권 포기가 명기되었습니다.(그 후, 전 포로나 아시아에 대한 배상 지급 등 일부 변경은 있었습니다만.) 그리고 195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일본과 48개국은 평화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일본이 배상이라는 무거운 짐을 거의 지지 않은 채 국제사회에 복귀한 것입니다.

 

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당시,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참가를 주장했지만, 요시다 시게루 당시 총리의 강한 반대로 참가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중국은 다른 이유로 불참) 영국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합법적이었나 라는 질문이 나오면 자신들의 식민지배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 한국의 참가에 반대했습니다.

 

전후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어떠한 판결도 받지 않고, 청산도 하지 않은 채 전쟁 포기를 담은 평화헌법을 손에 들고 ‘평화국가’로서 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 9월 7일, 도쿄 시부야역 앞에서 열린 ‘한일연대액션’. SNS를 통해 촉발된 행동에 300명이 모였고 “함께 살아가자” 등의 목소리를 높였다.     ©레이버넷 제공

 

‘제3국인’, 조선인에 대한 차별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은 1948년 8월 15일로, 그때까지는 미군의 군사점령하에 있었습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재일외국인을 ‘연합국인’과 ‘적국인’, ‘중립국인’으로 분류하는데, 조선은 지금도 국제적 지위가 정해지지 않은 특수지위국으로 간주되어 ‘제3국’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이 분류 개념인 ‘제3국’에 속한 사람, 즉 ‘제3국인’이라는 말이 그 후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일본은 전쟁 재판의 판결을 수락하고 일본국민 전범의 형 집행을 인수받았습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인은 일본국민이 아니게 되었음에도, 스가모형무소에 전범으로 들어갔던 조선인들은 석방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조선인 전범이 출소한 것은 1956년입니다. 출소는 했지만, 일본인(전범)이 받던 유족연금이나 연금 등 보호조치에서는 배제되었습니다.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에서도 식민지 지배의 위법성에 대한 판단은 없었고,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방식’으로 일본이 한국에게 유상·무상의 5억 달러를 제공했습니다. 이를 수주한 것은 일본기업입니다.

 

작년 가을,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전 징용공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 대상이 아니라고 규정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기업에 배상하지 말라고 압력을 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업의 배상을 지지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어려울 경우, 독일 방식처럼 정부와 기업의 공동기금으로 보상하는 방식도 생각해야 합니다.

 

▲ 얼마 전 일본 페미니즘 언론 <페민>에서 평화헌법 지키기를 비롯하여 역사 문제와 평화운동에 관심이 있는 활동가 33인을 조직하여, 한일 시민사회 연대를 위한 3박4일 한국 투어를 가졌다. 11일 오전,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일다> 편집부와 교류 모임을 가진 후 ‘한일 페미니스트 연대’를 외치는 모습.     ©제공: 페민

 

한일 시민들은 연대할 것이다, 즐겁게

 

7월 발표한 “한국은 ‘적’인가” 성명은 일본 정부에게 한국 정부와 냉정한 대화와 논의를 시작할 것은 요구하며 인터넷으로 연명자를 모아 9,463명이 참여했습니다. 이 서명운동에는 일본이 제대로 전후 처리를 하고, 양국이 함께 현재와 미래를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이 담겨있습니다.

 

한일관계 회복에 필요한 것은 역시 대화입니다. 양국의 시민들은 정부의 정책을 지켜보면서 자국 정부의 잘못을 서로 비판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해결된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피해자가 납득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 청산과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조선에서 무엇을 했는지, 정부뿐 아니라 우리 역시 그 역사를 배우고,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사실과 마주해야 합니다.

 

일본의 시민운동은 30년 이상 그러한 활동, 운동을 지속해왔습니다. 앞으로도 한국 사람들과 협력하고, 활동하고,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활동하고 있는지를 전하겠습니다. 이러한 정보의 축적이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청년들이나 한류 팬들이 스스럼 없이 ‘한국 사랑’을 얘기하며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의 문화를 배우는 것처럼 경쾌하게 행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시미즈 사츠키, 구리하라 준코 기자가 정리하고 고주영 님이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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