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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이룰 수 없었던 ‘의사’의 꿈을 현실로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수빈: 수련의, 바인하임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하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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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레니엄 시대, 한국 여성의 국외 이주가 늘고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로 시작된 한국 여성의 독일 이주 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다>는 독일로 이주해 다양한 직업군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을 만납니다. 또한 이들과 연관된 유럽의 여러 젠더와 이주 쟁점에 대해서도 함께 다룹니다. -편집자 주

 

수빈 이주 이력서

 

이주 8년차

2012년 독일어 학원에 다니기 위해 서울로 상경. 몇 달 뒤 남편과 독일 보훔(Bochum)으로 이주

2013년 간호조무사 인턴십(Krankenpflegepraktikum) 수료 및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 입학

2013년~2015년 의과대학 예과 수료. 1차 국가고시 합격

2015년~2018년 의과대학 본과 졸업. 2차 국가고시 합격

2018년 말 인턴 과정(Praktisches Jahr) 시작

2019년 현재 출산휴가 중

 

지난 2013년, 독일 서부 보훔(Bochum)시에 있는 한 병원. 수빈은 발길이 뜸한 복도 한구석에서 숨죽여 울었다. ‘도대체 방금 들은 단어가 사람 이름이야, 약 이름이야… 내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데 의대를 어떻게 들어간다고….’

 

독일에서 대입에 한 번 떨어진 후 공백기에 잡은 간호조무사 인턴십 첫째 날, 수빈은 앞으로 6개월이 참 막막했다. 대입 요건인 독일어 고급 자격증(DSH-2)을 딴 뒤였는데도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았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씻기고, 식사를 날라 직접 먹이는 등 몸을 쓰는 일이 고되었지만, 언어장벽으로 인한 괴로움과 불안 때문에 마음은 몸보다 훨씬 지쳤다.

 

그해 가을, 수빈은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만하임 캠퍼스)에 입학했다.

 

▲ 수빈이 남편과 5년여를 살았던 프랑크루프트 근교의 베드타운 라우덴바흐 풍경. 인구 6천5백 명의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에서 부부는 유일한 아시아 사람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환대도 배제도 아닌, 조용히 지켜보는 태도로 일관했다.

 

남들에겐 말 못 한 장래희망, ‘치유하는 사람’

 

수빈의 목표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해 의사로 활동하는 것.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겐 비밀로 했다. ‘한국에서도 못 간 의대를 어떻게 외국에서 가냐’고 비웃음을 살 것 같았다. 가족들에겐 특히 말하기 조심스러웠다. 당시 갓 결혼해 시댁으로까지 가족이 확장되었고, 그들이 보낼 기대나 염려가 부담스러웠다.

 

수빈 부부는 ‘무조건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쓰던 이불부터 스탠드 같은 자잘한 살림까지 모두 선편으로 독일에 보내놓고 떠났다. 두 사람 다 처음 해보는 외국 생활이었지만 막연히 2~3년 내로 끝나진 않으리라 여겼다.

 

사실 수빈의 장래희망은 어려서부터 한결같았다. ‘치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의사’라는 직업을 떠올렸지만, 의사가 되려면 공부를 아주 잘 해야 된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기에 그 꿈은 언감생심, 너무 거대해 보였다. 중학교 때는 좀 더 ‘현실적인’ 진로로 음악치료사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기도 중에 번득 계시를 받듯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었다. 수빈은 ‘여러 가지 욕망의 총합’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의사가 된다는 건 ‘치유자’의 정점에 서는 일로서 명예욕, 소명의식, 자아실현의 욕구 등을 모두 실현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방의 대안학교에 다니던 수빈에게는 의대 합격에 필요한 최상위 성적이나 정보력, 경제력이 없었고, 대신 생물학과에 들어갔다. 대학 생활 내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의사가 되는 길은 요원했다. 졸업 후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려면 또 몇 년의 시간과 돈, 노력을 들여 거대한 입시 프로젝트를 치러야 했다. 그런 불확실하고 출혈이 큰 경쟁에 선뜻 뛰어들 수 없었다. 한국에선 모든 게 다 그런 식이었다.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고 ‘뭐든 하면 열심히 하고 잘 해낼 자신이 있는데’도 웬만한 노력으론 인정받을 수 없었다. 사소한 기회조차 얻기 어려운 한국 사회에 사는 것이 답답했다.

 

제2, 제3의 진로를 알아보며 방황하던 중, 수빈은 고등학교 은사님으로부터 일자리를 제안받았다. 전남 광주에 새로 생기는 대안학교에서 영어와 생물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직이었다. 그런데 그 학교에 합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빈은 자신에게 ‘교육’에 대한 고민이 한참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직 이수 경험만으로는 새로 문 연 학교의 교육과정을 직접 설계하고 운영해 나가기 역부족이었다. 학부모들과 관계를 맺거나 교내 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수업 외적인 일에도 이렇다 할 대비가 안 되어있었다. 무엇보다 ‘진짜 하고 싶은 공부’에 대한 갈망이 여전했다. 이를 짐작한 동료 교사가 독일 유학을 추천했다. 한국과는 대학 제도가 확연히 다른 독일에서라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 싹텄다.

 

외로운 ‘외국인 학생’으로 고군분투한 의대 생활

 

수빈은 한국에서 받은 수능시험 성적 및 생물학과 졸업장을 가지고 독일의 여러 의과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학교마다 평가에 비중을 두는 과목이 조금씩 달랐고, 외국인 학생 선발 비율도 5~10%로 다양했다. 처음에는 입학처에서 서류 공증을 문제 삼아 모두 떨어졌지만, 다음 학기에 다시 지원할 때는 이를 보완하고 현지에서 한 인턴십 경력과 그때 받은 추천서도 제출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의 첫 2년 예과 과정은 감동적일 정도로 수빈의 마음에 들었다. 수학, 화학, 물리 같은 기초 과목은 입학 후 한 달 동안 빠르게 훑고 나서 해부학, 생화학, 생리학 세 과목을 집중해서 배웠다. 20명씩 한 반을 구성해 함께 공부했는데, 소수정예 수업이 많았다. 교수들은 한 사람당 불과 2~3명의 학생을 맡아 해부학 모형을 짚어가며 차근차근 가르쳤다.

 

교수들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고 열성적이었다. 학생들이 어떤 질문을 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자유로운 토론을 유도했다. 드라마에서나 본 ‘서양 명문대 수업’의 한 장면이 마음속 판타지에서 현실이 된 것이다. ‘아, 이게 내가 꿈꿨던 의학 공부’라는 감격을 자주 느꼈기 때문에 어려운 시험공부를 할 때도 힘들지만 보람이 있었다. 선후배 간 위계나 강제된 술자리도 전혀 없었다. 오로지 ‘의학을 배운다’는 본래 목적에 충실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 생화학 수업이 끝나고 교수들과 학생들이 다같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평소 옷차림이나 분위기가 자유분방하고 교수-학생 또는 학생 선후배 간에 위계질서는 없다.  

 

하지만 외국어로 어려운 학문을 배우면서 느끼는 외로움이 컸다. 학생들을 하나하나 지목해가며 문답형식으로 진행하는 생화학 세미나 시간이면 수빈은 내내 마음을 졸이다가 차례가 되어 발표를 했다. 자신의 서툰 독일어 질문을 사람들이 알아듣고 공감해주는 사소한 일에 남몰래 희열을 느꼈다.

 

외모가 다르고 언어가 어눌한, 명백한 소수자인 자신에게 ‘아무도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처음엔 문화충격으로 다가왔다. 외국인 학생에게 으레 베풀 법한 친절이나 배려는 전혀 없었다. 도움은 당사자가 나서서 요청할 때만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모두 같이 둘러앉아 잡담하는 쉬는 시간에도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쉽게 외톨이가 됐다.

 

“독일은 독일어를 못하는 사람에게 각박한 곳인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외국인이 우리말을 시도하면 ‘안녕하세요’ 한마디라도 좋아해 주잖아요. 소통에 좀 지장이 있으면 외국인 상대를 배려해서 천천히 말하고 쉬운 단어를 쓰려고 노력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독일에선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이 거의 없어요. 학교뿐 아니라 마트나 기차역에서도 제 독일어가 좀 서툴면 사람들은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노골적으로 보였어요. 그런 게 사람을 굉장히 주눅 들게 하죠. 타인의 눈높이에 맞춰서 소통하는 연습이 안되어있는 사람들만 모여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외국인들이 독일의 분위기를 차갑고 냉정하다고 느끼는 것 아닌가요.”

 

또한, 수빈이 관찰한 바로는 독일에서도 학력과 직업은 대개 대물림되었고 의사는 상류 계층에 속했다. 학생 중엔 부모 중 한 사람 이상이 의사인 경우가 많았고, 평소 스펙을 높이기 위한 자기계발이나 고가의 대외활동이 일상이었다. 현업 의사들은 물론, 의대생들도 사용하는 어휘나 어투에서 자신감과 지적 우월함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저마다 의견도 내지만 사실 추상적인 차원이고, 실제로 저소득.취약 계층에 속한 이들과는 의사-환자라는 정해진 틀에서 만날 뿐이었다.

 

반면 수빈은 독일에 사는 한국 사람들의 정치 모임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환경, 젠더, 불평등 문제에 나날이 민감해져 갔다. 집세가 싼 대도시 근교의 베드타운에서 장시간 통학하느라 늘 시간에 쫒기고, 단열이 부실한 지붕 아래 집에 사느라 겨울철이 싫고, 할인마트에 식재료를 사다 먹는 것이 일상인 ‘가난한 유학생’이기도 했다. 수빈은 학교에서 위화감을 자주 느꼈다.

 

한국과 독일의 확연히 다른 의료제도를 고민하다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소아과를 드나들며 성장하는 것이 보편적인 서구 산업화 사회에서 의료 제도는 개인의 건강과 복지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라마다 각기 다른 제도를 갖고 있어 이주민에게는 새로운 사회 시스템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독일 생활을 시작한 지 불과 1년만에 환자일 뿐 아니라 의료계 예비인력이 된 수빈에게 이는 쉽지 않은 과제였다. 특히 본과 3년 동안에는 현직 의사들이 실제 임상 사례를 바탕으로 강의를 하는데, 학생들이 독일 의료 및 건강보험 제도를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독일에서 자란 학생들은 살면서 자연스레 체득한 상식이었지만, 수빈에게는 새로운 내용이 많았고 머릿속에서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먼저, 독일의 병원은 규모가 크든 작든 수납과를 따로 두지 않는다. 즉 의료 서비스의 개별 비용을 환자에게 받지 않는다는 것이 대원칙이다. 독일 시민의 80%가량이 공공보험에 가입해 수입에 따라 책정된 보험료를 매달 납부한다. 몸이 불편해 실제로 병원을 찾게 되었을 때는 가벼운 감기 치료를 받았든, 중대 질환으로 수술을 받았든 따로 돈을 내지 않는다. 병원이 보험사에 직접 청구한다. 지갑을 여는 ‘소비자’가 아니다 보니 환자가 자의적인 판단으로 특정 검사를 요구하거나, 높은 비용을 감당 못 해 치료를 자진 포기할 일도 없다.

 

“한국에도 국민건강보험이 있지만 적용 범위가 적고, 환자들이 자기 돈을 내고 치료를 받아서 그런지 구체적인 요구가 많고 ‘의료 쇼핑’도 흔한 것 같아요. 유명 대학병원에 가면 중앙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올라가면서 내부를 한눈에 볼 수 있죠. 시설도 쾌적하고 화려한 게 꼭 백화점 같아요. 독일에선 병원이 전혀 그럴 수 없는 구조예요.”

 

▲ 학교에서 석고 붕대를 다루는 실습 중인 모습   

 

한국에서는 진료과목을 환자 스스로 판단해 해당 전문의에게 바로 가기 때문에 많이 약화되어 있는 가정의학과(Allgemeinmedizin)가 독일에선 1차 의료기관인 점도 다르다. 가정의학 전문의는 주거지역 가까이에 개원해 인근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주치의(Hausarzt)가 되는데, 초기 진료뿐 아니라 환자의 의료기록 전반을 관리하는 역할도 한다. 응급실이나 안과 등 몇몇 진료과목을 제외하고는 어느 병원에 가더라도 주치의 진단서 및 처방전을 먼저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주치의를 한 명씩 두는 것이 원칙임에도, 막상 필요할 때 예약 없이 찾아가면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아예 문 앞에서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초진일 때는 사전 예약이 불가할 수도 있다. 아플 때 언제든 동네 병원에 가서 조금만 대기하면 진료를 받는 한국식에 익숙했던 수빈에게는 이 점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픈 사람을 그대로 돌려보내는 병원이라니?

 

나중에 알고 보니 마치 보건소처럼 행정구역 단위로 주치의를 일괄 배정했던 옛날 제도가 없어지면서, 특정 가정의학과에 환자가 쏠리는 것을 막고자 세부 규정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가정의학과 개업의 한 사람이 정해진 숫자보다 더 많은 환자를 받으면 벌금을 물어야 한다. 면허가 있어도 마음대로 개업을 할 수 없다. 기존 병원을 이어받아 운영하거나 지역 인구 및 수요를 고려해 나오는 관청 허가를 별도로 받아야 한다. 손쉽게 찾아가 빠르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넘쳐나고,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 이유도 횟수도 점점 많아지는 한국과 사뭇 다르다.

 

[※실제로 각국의 의사 비율은 인구 1천명 당 독일은 4.1명, 한국은 2.2명이다. 하지만 1인당 연간 의사 진찰 건수는 한국이 14.9회로 독일 9.9회보다 많고, OECD국가 중 가장 높다.(OECD 2016) 전체 의사의 절반 가까이가 수도권에 편중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보건복지부 2016)]

 

내가 개인병원을 열게 된다면…

 

수빈은 의학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독일의 사회문화적 맥락에도 서서히 눈을 떠가면서, 가정의학과를 전공해 나중에 개인병원(Eigenepraxis)을 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본과 실습 때 직접 체험한 가정의학과의 일은 지루하고 단조로울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랐다.

 

“예상보다 훨씬 다양한 임상 케이스를 접할 수 있더라고요. 회사에 제출할 진단서를 받으러 온 감기 환자들이 물론 많지만, 그 외에도 내.외과적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맨 먼저 주치의를 찾으니까요. 그리고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병원을 운영하며 그곳 사람들을 장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돌본다는 것이 제가 애초에 꿈꿨던 ‘치유자’의 모습에 들어맞는 것 같아요. 운이 좋으면 한 가족 전체와 그들의 역사를 지켜보는 거예요. 처음에 젊은 부부로 출발한 가족이 아이를 갖고 소아과를 졸업할 만큼 자라면 그 아이들과 또 만나게 돼요.”

 

“제가 개인병원(Eigene Praxis)을 내게 된다면,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텐데, 그 밖에도 낯선 의료 제도 때문에 힘들어하는 외국인들에게 숨구멍이 되어주고 싶어요. 진료시간(Sprechstunde)을 못 받은 사람은 나한테 오라고 하고요. 또, 제가 학교에 다니면서 힘들었던 부분을 외부 강사로서 채워줄 수도 있겠죠, 외국인 학생들을 위해 독일 의료시스템을 개괄하는 세미나를 제공하는 식으로요.”

 

간호노동 실태까지 살펴보게 해준 병원 알바 경험

 

▲ 수빈은 본과 때 실습을 나가서 가운 입은 자기 모습을 셀카로 남겨두었다.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만도 벅찼지만, 수빈은 예과와 본과 때 각각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며 의료 현장에 대한 경험치를 적극적으로 늘려나갔다. 첫 2년 동안에는 간호사 보조 인력(Pflege Aushilfe)으로 일했다. 환자를 화장실에 데려가고 볼 일이 끝나면 엉덩이를 닦아주는 등 주로 몸을 쓰는 일을 했는데, 한국에서는 요즘 이런 일을 가족이나 간병인, 간호조무사가 도맡지만 독일에서는 간호사의 보통 업무이다.

 

체구가 작고 가벼운 수빈에 비해 대부분 환자들이 몸집이 더 크고 무거워서 일하다가 부상을 입기 쉬웠다. 물리 역학을 고려해서 환자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힘을 덜 들여 일하는 방법을 하나씩 터득하는 과정이 꽤 흥미로웠다. 간혹 ‘어이, 아가씨 이리와’라며 무례하게 굴거나, 침대로 올라오라고 요구하는 치매 할아버지도 있었다. 고된 시간을 보내면서 머리로만 알고 있던 간호계통의 저임금 문제와 인력 부족 실태를 절감했다.

 

본과 때는 혈액 및 정맥주사 담당(Blutentnahmedienst)으로 일했다. 응급실을 제외하면 이 일은 의사의 책임이라 예과 실습 때 배웠는데, 생활비도 벌 겸 미리 숙달해놓고 싶어서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아침 6시 반에 시작해 오후 3~4시가 되도록 휴식시간 한번 없이 일했다. 수많은 병동을 돌며 그날 할당된 혈액 채취와 정맥주사 오더를 다 소화했다.

 

초반엔 정맥을 한 번에 못 찾아 주삿바늘을 여러 번 찌르면서 환자들 눈치를 봤는데, 오히려 그들은 초보자의 처치를 관대하게 잘 참아주었다. ‘왜 하필 이런 애송이를 나한테 보내냐’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고, 그 시간을 거치도록 배려하는 문화에 적잖이 감동했다.

 

학교에서 이뤄진 정규 실습 외에도 ‘의대생 알바’를 열심히 뛰며 쌓은 현장 경험은 나중에 ‘치유자’로서 ‘지식과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의사가 되었을 때 필요할지 모른다. 병원에서 함께 일하는 다른 이들의 입장을 헤아리고 조화롭게 이끄는 역할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의욕도, 소속감도 없이 버티듯 살았던 7년

 

수빈은 처음 나간 외국 생활에서 큰 실패 없이 순조롭게 목표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 유급이나 낙제 한번 없이 의대를 마쳤고, 몸이 크게 아픈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난 7년은 ‘모든 욕구를 억누르고’ 간신히 버티듯 살아온 시간이기도 했다.

 

함께 유학을 왔지만, 공부에 집중 못 하고 생계유지를 위한 아르바이트에 더 노력을 쏟는 남편의 모습도 내내 수빈의 마음에 걸렸다. 부부가 동반으로 외국에 나오면 아내는 출산, 양육을 거치며 경력이 단절되고 ‘내조’ 역할을 주로 맡는 경우가 여전히 많은데, 이들의 경우는 좀 달랐다. 수빈이 지속적으로 원하는 커리어에 가까워진 반면, 남편은 주춤했다. 그는 ‘남자가 가장 노릇을 해야한다’는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자신보다 힘든 조건 속에서 공부하는 수빈을 보며 생활비 벌이에 적극 나섰다.

 

한국의 가족과 지인들도 수빈이 ‘독일에서 의사가 된다’는 것에 기대를 걸고 ‘의사가 될 아내’와 ‘철학박사 지망 남편’ 사이에서 아내 편을 들었다. 지금은 아내에게 ‘몰빵’ 투자하는 것이 두 사람의 나은 미래를 보장한다는 것. 수빈은 전통적인 성역할 ‘남자=가장’에 자신도 편승하고 있다는 부끄러움, 그리고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계속 시달렸지만,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공부량에 치여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은 그렇게 해서 ‘꼭 해내야 할 과제’가 됐다. 수빈은 나날이 내적으로 ‘쪼그라들었다.’

 

“언젠가 ‘나에겐 더이상 즐겁다, 행복하다는 감정이 없다’는 자각이 들었어요. 남편이나 친구들과 대화할 땐 웃기도 하고 ‘재밌다’는 느낌이 순간순간 있긴 했죠. 그런데 그 밖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엔 그냥 기본적인 반응만 하면서 살았던 거예요. 언젠가부터 삶의 의욕이랄까, 내 안의 모터가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조차 못 가졌어요.”

 

“내가 어딘가에 갇혀있고, 영영 못 빠져나갈 것 같다는 감각만 남아서 주변에 ‘우울하다’고 호소하면 다들 ‘너는 우울증은 아니야’라고 했어요. 시험도 문제없이 통과하고 아침에 제때 일어나고 대화할 땐 웃기도 하니까. 힘들다는 말도 소용이 없어져 그만두니까 아예 할 말이 없어지더라고요. 한국어로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어요. 내가 사회에 어딘가 속해있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잃은 지도 오래. 그렇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사는 게 차라리 편했어요. 남달리 의욕적인 사람들은 일부러 피하고, 어디로든 떠나버리고 싶고. 하지만 떠날 수 없고. 그런 상태로 꽤 오래 살았어요.”

 

수빈은 왜 ‘떠날 수 없었’을까? 무엇보다도 자신이 의대에 들어갔다는 사실, 그걸 망쳐선 안 된다는 강박이 제일 큰 ‘버티기’ 동력이었다. 어딘가에 속해있다는 감각이 절실해서, 자신이 직접 공동체를 만드는 상상도 했다. 개나 고양이를 입양하거나, 아이를 낳아 가족을 늘리면 마음이 좀 따뜻해질까 싶었지만, 그때마다 빠듯한 경제 형편과 바쁜 생활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출산과 육아, ‘쪼그라든 마음’을 펴는 시간

 

그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던 어느 날, 임신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인턴 과정에 해당하는 실습을 이내 중단하고 쉬다가, 지난 8월 딸을 출산했다.

 

내년에 복귀하면 못다한 과정을 마저 끝내고 마지막 국가고시를 치른 뒤, 4~5년이 걸리는 전공의 과정을 밟을 것이다. 전공의 자격시험은 각 주에서 주관하는데, 응시자는 여러 병원과 과목을 옮겨 다니며 학점은행 방식으로 응시 조건을 갖춰 나간다. 한 병원에 속해 열악한 노동조건과 군대 문화를 감내해야 하는 국내 레지던트 과정과 달리, 응시자가 주체적으로 자기 경력을 만들어가는 기간이다. 수빈은 더는 쪼그라들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2018년 세계 여성의 날, 친구들과 함께 해시태그 인증샷 캠페인에 참여했다. 다른 많은 이주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수빈은 독일에서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과 폭력에 시달리며 페미니즘에 눈떴다.    ©수빈

 

한국의 고시문화가 싫어서 자칫 평생의 꿈을 포기할 뻔했지만, 막상 기회가 주어지자 포기하지 않고 해낸 사람. 더이상은 거창한 도전에 목마르지 않고 평범한 것들의 귀함을 알게 된 사람. 나는 그런 수빈에게 5년 뒤 자화상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때쯤 저는 전공의 3년 차, 만사가 괜찮게 흘러간다면 그 정도 수입으로 만족하면서 커가는 연우랑 남편이랑 수다 많이 떨고 같이 잘 놀고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집은 ‘우리 집’이길. 그게 지금으로선 제일 큰 꿈이에요.”

 

수빈의 딸 이름은 ‘연우’로, 파란 하늘 아래 서 있는 집을 상상하며 지었다. 연우가 다 자랄 때쯤에 독일 사회는 외국인 여성을 좀 다르게 볼까? 상대방의 이름이 아닌 국적을 먼저 묻고, ‘아시아 여성’과 ‘한국’에 대한 자신들의 선입견을 복습하기 바빴던 사람들과의 만남에 익숙한 나와 수빈은 그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다. 나이 들면서 점점 실감한다. 우리가 당장 바꿀 수 있는 현실은 많지 않다는 것을. 다만 독일어가 좀 서툴거나, 미처 예약을 못한 사람도 마음 편히 찾아오는 병원, 가난해서 아픈 사람들이 주눅 들지 않고 의사와 마주 앉는 동네. 그런 현실쯤은, 우리가 직접 만들어낼 것이라 믿는다.

 


[임산부보호법 논쟁과 임신/수유 중인 의사의 일할 권리]

 

독일 연방통계청(Statistische Bundesamt)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독일에는 38만5천149명의 의사가 현업 중이다. 그중 약 47%인 18만497명이 여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사’란 3회에 걸친 의사면허시험(Approbation)에 최종 합격한 사람들을 통칭한다. 여성-남성 의사의 비율이 엇비슷한 반면, 전공과목에서는 일부 차이를 보인다.

 

의사들은 전문의 자격이 없는 일반의 비중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내과와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많다. 세 번째로 많은 의사가 속한 곳은 여성의 경우엔 여성의학과-산부인과, 남성은 외과로 나뉜다. 외과의들은 장시간 수술을 많이 하느라 불규칙한 생활을 한다. 여성들은 육아나 가사에 깊이 관여할 수밖에 없다 보니 전통적으로 외과를 꺼렸다. 반면, 산부인과는 진료 범위가 넓어 인력을 더 많이 필요로 하고, 환자들이 여자 의사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아서 상대적으로 여성들에게 열려있다.

 

의료 현장에서 의사들은 많은 경우 감염이나 방사선 위험에 노출된 채 일한다. 이는 임신,수유 중인 여성 의사들에게는 더욱 큰 위협이다. 이와 관련해 1952년부터 임산부보호법(Mutterschutzgesetz)이 시행되어 왔는데, 최근에 이를 둘러싼 논란이 커져 법 개정으로까지 이어졌다. 기존의 임산부보호법은 임신 중인 의사의 수술방 출입을 금지했고, 주삿바늘이나 각종 수술 도구를 사용하는데도 제약을 두었다. 하지만 임신,수유 중인 의사들 가운데는 일을 지속할 의지가 강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관련 법이 보호보다는 통제에 가깝고, 장기적으로 커리어 계발 및 지속에 장애물이 되었다.

 

▲ 여성들의 일할 권리를 제약하는 낡은 법제도에 개정하고자 당사자 여성들이 함께 만든 캠페인 단체인 ‘OPidS’ 홍보 자료. 웹사이트(opids.de)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opids.de

 

지난 2015년, 마야 니타드(Maya Niethard)와  스테파티 도너(Stefanie Donner) 박사 두 사람을 주축으로 관련 법 개정을 촉구하는 모임 OPidS(Operieren in der Schwangerschaft; Operating during Pregnancy)가 생겨났다. 이들은 임산부의 수술방 출입을 전면 금지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위험 평가 기준을 마련해 개별 현장에 따라 법 적용을 달리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당사자 여성이 동료 및 병원 당국과 협의하면서 자기 업무환경 및 시간을 능동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으면 위험요소를 상당 부분 제거할 수 있다고 보면서 구체적인 예시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성 의사들은 여전히 출산과 직장 중 한 가지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 쉽다. 수빈의 경우, 처음에는 임신 말기까지 출근을 계속할 생각이었지만 아직 1년 차인 실습생으로서 자기 근무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율하긴 어려웠다. 실행 초기에 있는 임산부보호법 개정안에 대한 사람들의 호응도 아직 높지 않은 수준이다. 수빈은 결국 계획보다 훨씬 빨리 휴직을 했다.


 

※ 필자 소개: 하리타 (정세연). 현재 독일 라이프치히 거주. 그 동안 일다에서 <29살, 섹슈얼리티 중간 정산> <우리 자신의 목소리로 –독일 여성 난민들의 말하기> <하리타의 월경만남>을 연재했으며, 저서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동녘, 2017)가 있다. ‘이주’라는 삶의 모험을 함께하고 있는 이웃 여성들에 대한 큰 사랑과 존경이 이번 연재의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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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1/28 [18:00]  최종편집: ⓒ 일다
 
송이 19/11/29 [14:10] 수정 삭제  
  백화점, 상점, 대기업같은 병원 말고 동네주치의가 있으면 마음도 편할 것 같아요. 제 지인중에도 외국으로 나가서 의학배우고 의사가 된 사람이 있어서 더 반갑게 읽은 기사입니다. 외국인들이 편히 찾는 동네병원 꼭 여시길 응원합니다.
ㅇㄴㅁ 19/12/01 [14:44] 수정 삭제  
  꼭 한국에서만 살란 법 있나. 세계 곳곳에 한국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진출해있으면 어딜가도 왠지 마음이 훈훈할 것 같다. 그리구 이런 게 한국에 온 외국인들의 마음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자기 길을 바다 건너서까지 찾아가는 분 보니까 부럽기도 하고.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거, 나만이 아니라는 생각, 그게 참 중요한 것 같다.
19/12/02 [16:33] 수정 삭제  
  도움이 많이 되는 인터뷰라서 감사합니다.
pallet 19/12/04 [15:29] 수정 삭제  
  독일 병원 제도가 훨씬 선진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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