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이 필요 없는 정수기를 직접 만들다!

[도시에서 자급자족 실험기] 도시형 적정기술, 비전화정수기

이민영 | 기사입력 2019/12/14 [14:50]

전력이 필요 없는 정수기를 직접 만들다!

[도시에서 자급자족 실험기] 도시형 적정기술, 비전화정수기

이민영 | 입력 : 2019/12/14 [14:50]

※ 필자 이민영님이 목공을 배우고 적정기술을 익히며, 동료들과 함께 전기와 화학물질 없는 도시를 꿈꾸면서 일상을 제작해나가는 과정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편집자 주

 

서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비전화공방 발명품

 

비전화공방에서는 전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수백여 개의 발명품이 있다. 비전화도정기처럼 추수철이면 유독 문의가 잦은 계절별 선호품도 있고, 햇빛식품건조기처럼 1년 365일 찾는 제품들도 있다. 그 중 서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비전화정수기 아닌가 싶다.

 

 ▶ 비전화제작자들의 식품가공 훈련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비전화정수기     ©비전화공방서울

 

비전화정수기는 투명한 1.8리터 유리병에 야자활성탄을 채워 사용하는데, 수도꼭지에 바로 연결해 사용할 수 있어 제작법과 사용법이 간단하면서도 정수능력이 뛰어나다. 여름에는 1주일에 한 번, 겨울에는 1달에 한 번가량 뚜껑을 열고 뜨거운 물을 부어 열탕 소독해주면 내용물 교환 없이 10년 가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특정한 지역의 사정에 알맞은 해법을 제시하는 과학기술을 적정기술, 중간기술, 대안기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선진국의 고도화된 첨단기술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에는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해를 끼치기도 한다는 자각 하에, 각 지역의 사정에 맞는 값싸고 단순하면서도 생태적인 기술이 1970~1980년대에 큰 호응을 얻었다.

 

도시에서의 적정기술 제품, 비전화정수기

 

하지만 적정기술이 꼭 개발도상국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적정기술은 대규모 사회기반시설 없이도 현지의 환경에 기반을 두고 개발이 이루어지지만, 비전화정수기는 충분히 정수된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도시를 전제해 만들어진 발명품이다.

 

일반적인 정수기는 중금속, 침전물, 미생물 등을 거르는 역할을 하지만 우리가 가정 등에 직접 공급받는 물은 이미 침전, 여과, 소독 등의 순서를 거쳐 충분히 정화된 상태로 도달한다. 오히려 비전화정수기는 잔류염소와 같은 화학물질만 제거하고 물속에 녹아있는 미네랄, 칼슘이나 마그네슘까지 제거하지는 않는다.

 

▲ 비전화정수기 제작 워크숍은 시민들에게 가장 많은 호응을 받는 제품이자 제작 워크숍이다.  ©비전화공방서울

 

유리병에 투명 실리콘 호스를 재료로 사용하는 까닭은 미생물 번식 여부를 시각적으로 사용자가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정수기 상태를 시각적으로 파악해 직접 관리할 수 있다. 미생물은 온도와 습도만 관리해주어도 번식을 방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열탕 소독을 해주어야 하고, 혹 관리 소홀로 호스 내부나 병 안에 녹조가 낀다면 바로 청소주기를 인지하거나 내용물이나 부품을 교체하는 등 사용자가 직접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보기도 마시기도 쓰기도 좋은, 비전화정수기

 

가정생활에 용이한 수많은 제품이 들어오고 있지만 실상 이를 관리하기 위한 노동도 덩달아 늘어났다. 정수기만 해도 월 임대료를 내고 필터를 교체하거나 청소를 해주는 업체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정수기를 설치한 집집마다 주기별로 이를 관리하는 전문가에게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막상 이 정수기의 상태가 어떤지는 불투명한 호스와 필터에 가려져 있어 알 수 없는 데다 교체 시마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발생한다.

 

무엇보다 정수기 이용 시 중요한 건 물의 상태와 맛이다. 정수기의 효능을 설명할 때 비전화정수기로 거른 물과 수돗물, 시중에 판매하고 있는 여러 종류의 생수를 비교해 마셔보게 하는데 비전화 정수가 다른 마실 수 있는 물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비전화카페에서 판매하는 커피나 각종 음료도 모두 이 비전화정수기로 거른 수돗물을 사용한다.

 

▲ 드릴 프레스로 유리병 하단에 구멍을 뚫을 때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도중에 물을 뿌려가며 천천히 작업하지 않으면 깨지기 십상이다.     ©비전화공방서울

 

비전화정수기를 만드는 방법과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는 간단하다. 호스를 유리병에 연결할 수 있게 마찰 시 발생하는 열을 식혀가며 드릴 프레스로 구멍을 뚫고 오링으로 고정한 스테인리스 메시 필터를 상하부에 넣는다. 황동 엘보나 탱크휘팅, 호스클램프, 레듀사, 부싱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막상 직접 사용해 제작해본 적은 없는 부품들을 써볼 수 있어 만드는 과정도 꽤 흥미로웠다.

 

미세 플라스틱도 거를 수 있나요?

 

비전화정수기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만큼 다채로운 시행착오를 겪은 제품이기도 했다. 숯은 흡착력이 높아 탈취, 정수, 공기정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는데, 그중에서도 야자활성탄은 야자열매껍질을 초고온의 수증기를 가해 열처리하여 만들기 때문에 일반 숯보다 흡착력이 더 강력하다.

 

통상 1g당 1,200㎡ 정도의 내부단면적을 가지는데 기공의 크기에 따라 흡착하는 입자가 달라서 다양한 오염물질을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다. 어느 굵기의 활성탄을 쓰느냐에 따라 성능이 달라지고, 그 굵기에 따라 야자활성탄이 빠져나오지 않게 막는 역할을 하는 메시의 굵기도 달라지기 때문에 여러 굵기를 실험하며 최적의 정수기 재료를 찾아가는 과정 또한 재미가 쏠쏠했다.

 

물에 상시 닿는 부위의 부품은 가능한 녹이 슬지 않는 재질로 된 부품을 써야 하는데 알루미늄으로 만든 유리병 뚜껑을 사용해 부식이 생긴다든가, 야자활성탄과 메시의 굵기를 잘 조정해야 하는데 야자활성탄과 메시의 굵기 모두 너무 촘촘해 실리콘 호스가 강한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진다든가 하는 ‘기본 원리를 어떻게 적절하게 적용할 것인지’에 관한 현안은 수시로 발생한다. 갑자기 잘 사용하고 있던 목돌림관이 단종되어 이를 대체할 부품을 어떻게 찾지 하는 등의 퀘스트는 제작을 더욱 흥미를 더해준다.

 

▲ 정수기인만큼 가장 빈번한 문제는 물이 새는 것. 그다음 발생하는 문제는 숯이 새는 것이다.   ©비전화공방서울

 

정수기는 제작뿐만 아니라 설치에도 약간의 과제가 남아있다. 집집마다 수도꼭지의 모양이 달라서 이를 결합할 수 있는 방법도 각기 다르다. 수도꼭지마다 구경이 다르기 때문에 T밸브, 원터치 호스캡 등 모양에 따라 다른 어댑터를 찾아 사용한다.

 

스스로 고쳐 쓸 수 있는 근력이 있다면

 

다른 비전화 제품에 비해 만들기도 쉽고 생활에 용이하게 쓸 수 있어 찾는 사람이 많지만 사소한 장애에 멈칫하게 되기도 한다. 이 낯선 제품을 조립하고 설치하는데 철물점에 들고 가봤자 냉대받을 게 뻔하다고 지레짐작하기도 하고, 아무리 들여다봐도 뭐가 문제인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묘수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삶을 가꾸는 기본적인 기술 정도는 누구나 소양으로 갖춰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어릴 적부터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이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데 비해 렌치, 스패너 등 기본적인 수공구조차 우리 일상에서 어색하게 느껴진다.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책을 읽기 위해 글자를 배우는 것처럼 전문가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약간의 단어를 익히고 보조할 수 있을 정도의 손기술을 익히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 의지대로 형태가 바뀌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내 삶을 조금이나마 변주할 수 있는 능력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 생각만 해도 뿌듯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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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 2019/12/17 [00:02] 수정 | 삭제
  • 오, 친환경제품이군요. 굿굿.
  • ㅇㅇ 2019/12/16 [17:01] 수정 | 삭제
  • 이거 진짜 대박 제품인데요? ㅎㅎ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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