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얘기해도 위협받지 않는 ‘안전한 공간’ 찾기

<청년 페미니스트 예술인의 서사> 싱어송라이터 신승은①

신승은 | 기사입력 2020/04/26 [20:14]

페미니즘 얘기해도 위협받지 않는 ‘안전한 공간’ 찾기

<청년 페미니스트 예술인의 서사> 싱어송라이터 신승은①

신승은 | 입력 : 2020/04/26 [20:14]

※ 2020년 많은 청년 페미니스트들이 다양한 페미니즘 주제를 예술로 표현하고,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과 차별, 위계 등에 문제 제기하며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로 또 함께’ 창작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의 새로운 서사를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음악을 하는 나의 일들이 숫자로만 보일 때

 

공연장 아닌 다른 곳에서 내 노래를 아는 분을 만나게 되는 일. 나를 뮤지션으로 알고 있는 분을 우연히 마주치는 일. 대중에게 노출이 많이 된 뮤지션들에게는 흔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나에게 이런 경험은 유독 특별하고 소중하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것은 내가 하는 일 중 하나다. 일은 자연스레 생계와 관련이 있고, 그렇다 보니 머릿속에서 밀어내려고 해도 내 일들이 숫자로만 보일 때가 있다. 수입으로, 앨범 판매량으로, 공연 관객 수로. 이 일이 너무 잔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명, 한 명의 사람을 그저 1로 치환해버리는 행위니까.

 

그런데 성범죄자들이 음원 차트를 자기네 집 뒷산마냥 오르락내리락하는 마당에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다음 일을 계획할 때, 메뉴판 앞에 섰을 때, 장을 볼 때, 손이 시리지만 설거지를 찬물로 하며 이 그릇까지만 하자 할 때, 그때마다 숫자에 연연하게 된다.

 

자본이라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된 날에는 사람들의 얼굴이 미치도록 보고 싶다. 하나둘 떠올리기도 한다. 떠올리고 떠올려도 1,2,3,4가 6,7,8,9였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들이 자꾸만 치받을 때, 그 치졸한 잡념들을 한 방에 쓸어버리는 묘약이 있다.

 

그 묘약은 ‘우연한 만남’이다. 나의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는 묘약. 누군가는 늘 듣고 계시다, 그 마음을 작게 보지 말라, 숫자로 너 자신을 평가하지 말라, 네 할 일 해라 등 좋은 생각과 말이 담긴 묘약. 요 몇 년 사이 감사하게도 그 우연이 확연히 늘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내 진귀한 우연의 장소들을 소개하려 한다.

 

비건 식당에서의 반가운 스몰토크

 

첫 번째로 식당이다. 그냥 식당은 아니고 비건 식당이다. (비건 식당이 그냥 식당이면 좋겠지만.) 모든 메뉴가 비건(vegan, 육류와 닭알, 유제품, 생선 등을 먹지 않으며 동물을 희생시켜 얻은 의류나 동물실험을 거친 화장품도 사용하지 않음)인 식당 혹은 비건 옵션이 있는 식당에서 난 종종 그분들을 뵈었다. 공연장에서 몇 번 마주쳤던 관객분이라면 반가움에 내가 달려가 인사를 한다.

 

반가움이 배가 되는 경우는 주문한 음식이 맛있을 때다. 여기 정말 맛있지 않아요? 이보다 더 달콤한 스몰토크가 있을까.

 

▲ 팝업식당 ‘하루비건’에서 맛있게 먹는 나의 모습.   ©신승은


나는 2017년부터 페스코 베지테리언(육류는 먹지 않지만, 유제품이나 가금류의 알, 어류는 먹는 채식인)을 시작했고, 2019년부터 비건을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일조할 수 있는 인간의 한계를 담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비건 지향’이란 말을 나도 더 자주 쓰곤 한다.

 

공연에서 멘트를 많이 하는 나는 자연스레 내 생활의 큰 반성과 변화를 가져온 비거니즘에 대해 종종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거니즘을 실천하고 계신, 관심이 있는 관객분들과 공연을 마치고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도 하고 고민되는 지점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내 공연을 자주 보러오는 분들이 계신 오픈 채팅방이 있는데, 이곳에는 언젠가부터 비건식 사진이 가장 많이 올라온다. 요리 팁을 나누고 크루얼티프리(cruelty-free,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거나 동물성 원료를 사용하지 않은) 제품 정보를 공유할 때도 있다.

 

창원에 공연을 하러 갔을 때,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창원의 비건식당 <씨드>에 드디어 가볼 수 있었다. 저렴한 가격과 훌륭한 맛에 놀라고 있을 때, 전에 공연을 했던 서울 지역 여성단체 활동가분들을 만났다. 반가워서 폴짝댔고, 얼마 뒤 서울의 팝업식당 <하루비건>을 방문했을 때 그분들 중 한 분의 옆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이제는 조금 머쓱하기도 해서 폴짝대지 않고 비건 피자에 집중했다. 나가면서 “아 정말 맛있지 않아요?”라고 설렘 담아 말했다. <하루비건>을 방문하게 되면 아는 사람을 꼭 한 분은 만나게 된다. 인사는 매번 똑같다. “아 정말 맛있지 않아요?” “최고최고”

 

여성들끼리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술집

 

두 번째로 망원동에 있는 <포인트프레드릭>이다. 여기도 ‘비건 식당’에 일부 포함되긴 하지만 굳이 따로 분리해서 언급해야겠다. 앞서 말한 오픈 채팅방에 올라오는 비건식 사진에는 대체로 술이 같이 놓여있다. <포인트프레드릭>은 비건 메뉴가 빵빵한 술집이자 카페이고 퀴어프렌들리(queer-friendly)한 공간으로 유명하다. 테이블에 앉아 친구들과 페미니즘, 비거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편히 할 수 있다.

 

오픈된 공간에서 무슨 간첩이라도 된 것처럼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들리지 않도록 대화해 본 경험이 많다. 옆자리의 사람이, 가게의 직원이 쑥덕대고 위협하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 한 번은 술집에서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옆자리의 남성들이 시비를 건 적이 있다. 우리 일행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 술집을 나왔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 분했다. 이수역 술집 폭행 사건 이후 시기여서 더 겁이 났다. 다른 테이블에 방해가 될 만큼 목소리 큰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안전한 공간이 너무 간절했다.

 

▲ 단골이 되어버린 포인트프레드릭에서 공연도 했다.   ©포인트프레드릭


<포인트프레드릭>에서는 안정감이 든다. 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리고 그 안정감을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닌지, 친구들도 다들 좋아하고 관객분들도 자주 뵈었다.

 

한 번은 친구와 <포인트프레드릭>에서 술을 마시는데 옆 테이블 분이 인사를 해주셨다. 낯이 익어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창원에서 공연했을 때 뵈었던 분이었다. 공연을 보러 전주에서 창원까지 오셨다고 인사를 했던 기억까지 나고 보니, 서울에 있는 술집에서 만나게 된 것이 더더욱 신기했다. 서울에 놀러 왔는데 퀴어프렌들리한 술집을 찾다가 여기로 오게 되셨다고 전해주셨다. 반가움에 나는 데낄라를 한 잔 드렸고 그날도 많이 취했던 것 같다. 그분은 사실 전주가 아닌 군산에서 비건 옵션이 있는 분식집을 운영하신다고 했다.

 

스무 번도 넘게 마주친 분도 있다. 공연을 마치고 뒷풀이 겸 갔을 때 그 공연에 오셨던 관객분과 또다시 만날 때도 있다. 안전함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안전한 공간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공간이 가진 힘일까.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이다.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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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y 2020/04/29 [13:19] 수정 | 삭제
  • 술자리에서 공격적인 아저씨들 만나면 술맛 다 떨어지고 무서움까지 느껴야해서 진짜 짜증나요. 이 글보니까 안전한 술집 정보들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별이랑 2020/04/26 [23:40] 수정 | 삭제
  •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저도 눈치보지 않고 대화하고 즐길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찾아다니는 편이에요. 기사에 소개된 포인트프레드릭에도 꼭 가보고 싶네요. 저는 아직 비건 실천은 못하고 있지만 육류를 정말 먹고 싶지 않은데도 외식을 자주 하는 상황에서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술 안주가 비건식으로 나온다니 되게 땡기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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