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이 만드는 환상 세계 ‘팬픽’은 무엇인가<2020퀴어돌로지>③ 동성물 BL(Boy’s Love)와 GL(Girl’s Love)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접하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팬픽/RPS(Real Person Slash, 알페스)다. 팬덤 이야기를 하면서 ‘팬픽/RPS’를 논하지 않는 건 팥없는 팥빵을 먹는 것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팬픽과 RPS(알페스) 모두 아이돌 멤버들을 엮는 ‘커플링’을 기반으로 한 연성이 기본이다. 팬픽이 소설 형식을 띈다면 RPS는 ‘썰’이라 불리는 짧은 글부터 긴 글, 그림, 영상, 소설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요즘은 RPS가 통용적으로 쓰인다.
“더 꿈을 꾸세요. 환상의 힘이 없으면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일본의 철학자이자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이며 소설 <데드라인>의 작가 치바 마사야의 말을 인용하면서,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김효진 조교수가 팬들이 만드는 환상 세계 팬픽/RPS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판타지와 현실: 일본 ‘야오이 논쟁’이 시사하는 것
국내에서 BL(Boys Love, 남성 간의 사랑을 이야기함) 관련한 논의를 지속해오고 있는 김효진 조교수는 “기본적으로 순수창작물인 BL과 (아이돌) 팬픽은 많은 유사성을 갖지만, 명백히 다른 역사와 작가 층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남성아이돌을 대상으로 하는 팬픽의 경우, BL 문법을 상당 부분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BL이 팬픽에 대한 논의를 할 때 중요한 참조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최근 BL과 (특히 남성아이돌을 다루는) 팬픽/RPS는 공통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BL로 인해 여성캐릭터의 설 자리가 줄어든다는 거다. 그러나 김효진 조교수는 이러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BL이 직면한 비판 중에서 ‘여성캐릭터의 부재’가 여성의 부재로 해석되는 현상, 즉 판타지로서 창작물 속에서 여성캐릭터라는 표상과 현실의 여성을 1 대 1로 등치시키고 이를 ‘당사자성’ 문제로 환원하는 최근의 흐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당사자성’을 보다 넓게 해석함으로써, 판타지와 표상이 현실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1992년 미니코미 잡지 CHOISIR에 투고된 남성 동성애자 사토 마사키의 에세이 ‘야오이 같은 건 죽어버리면 좋겠다’에서 촉발된 이 논쟁은, 이후 야오이 애호가를 자임하는 몇몇 여성이 이에 응답하는 에세이를 기고하면서 3년간 지속되었다”는 것.
논쟁이 된 건 남성 동성애자가 느끼는 불쾌감, 야오이에서 그려내는 ‘멋진 게이’ 캐릭터가 가지는 한계와 남성 동성애자가 창작의 도구로 이용되는 점, 현실의 동성애자들이 겪는 어려움이 배제된 부분 등이다.
김 조교수는 “이런 비판이 제기되자 반성하고 (야오이물 창작을) 그만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야오이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타자로서 게이의 존재를 인식하고, 타자에 대한 인식과 야오이에 대한 애호가 어떤 방식으로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도 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야오이를 폐기한다고 해서 현실의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 그리고 여성의 욕망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타자로서 게이의 존재를 인식하고 조금 더 나은 표상을 모색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판타지와 표상: ‘팬픽이반’이 시사하는 것
이후 일본 BL에선 이런 논의가 반영된 이야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효진 조교수는 요시나가 후미의 작품을 소개했다.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고 있습니다>에선 ‘BL작가와 그의 남성 동성애자 친구의 대화’를 통해 BL창작자/소비자로서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어제 뭐 먹었어?>에서는 남성 동성애자 내부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게이문화가 BL에서 그려내는 주인공들과 어떻게 다른지 묘사하기 시작했다.
BL에 등장하는 “남성 신체의 캐릭터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이 적절히 분배되어 있고”, “<어제 뭐 먹었어?>의 경우도 일반적으로 여성으로 간주되는 특성들이 주인공 커플 안에서 균등하고 배분되어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BL캐릭터들은 “(여성들) 자신의 대리로 자연화되어 있다는 걸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효진 조교수는 “이런 (BL이라는) 판타지와 표상, 현실의 관계를 가장 급진적으로 탐구한 사례는 사실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 있다”고 말했다. “여성들의 남성 동성애 선호적 실천으로 시작된 이 ‘팬픽’이라는 양식은 결국 여성들 스스로의 젠더 및 섹슈얼리티를 재구축하는 데까지 나아간 급진적 문화사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류진희, ‘팬픽: 동성(성)애 서사의 여성 공간’, 여성문학연구, 2008)라는 분석을 소개하면서, 팬픽과 ‘팬픽이반’이 가지는 의의를 조명했다.
“판타지인 창작물 세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받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현실의 자신을 규정짓는 실천으로서 인식하고 행동했던 ‘팬픽이반’의 사례는 사실 그 어떤 판타지, 표상과 현실의 관계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GL 팬픽의 세계에 접속하다
팬들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자신을 투영하기도 한 팬픽/RPS 세계엔 BL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BL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하더라도 GL(Girl’s Love)도 분명 있었다. 공공연하게 ‘여돌여덕’임을 밝히고 있는 소설가(관련 기사: ‘여돌여덕’ 소설가는 자기가 읽고 싶은 소설을 쓴다, 일다 2020년 6월 16일자 http://ildaro.com/8759) 조우리 씨가 공론장에서 좀처럼 호명되지 않는 ‘GL러’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팬덤 역사의 한 부분인 이야기를 털어놨다.
케이팝 아이돌 1세대가 등장했을 때, 조우리 작가가 빠졌던 건 ‘남돌’이 아니었다. “보이그룹이 노래하는 사회적 정의나 헌신적 사랑 같은 것에 좀처럼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남성적’인 세계였고, 그 속에서 나는 그들을 지켜보고 응원해야 하는 존재(타자)일 뿐이라고 느꼈다. 그렇다고 그들이 지켜주고 위해 주는 ‘너’(대상)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조 작가를 사로잡은 건 걸그룹 S.E.S.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당시 PC통신 팬클럽에 가입하게 되고 팬픽의 세계에 접속하게 된다.
“팬픽은 팬들의 욕망이 스타라는 현실에 실재하는 애정의 대상을 캐릭터로 등장시키는 서사라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한 조 작가는 “이미 눈앞에 살아 숨 쉬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대상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상상한다는 것은 그에게 부재하는 것, 결핍된 것, 금지된 것을 허락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팬들은 팬픽을 창작하고 소비함으로써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세상을 상상하고, 스타의 새로운 이야기와 캐릭터를 획득하고 소유하며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이다.
조우리 작가는 “이런 지점 때문에 보이그룹과 걸그룹 팬픽에 차이가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보이그룹에게 가장 금지된 건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사랑(이성애-스캔들)일 거다. 팬들은 그것을 금지했지만 또 그 낭만적 서사를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허락하는 사랑, 멤버들 간의 동성애를 팬픽의 주요 소재로 설정한 거다.”
그에 반해 “오직 사랑만을 목적으로 달려가기엔 걸그룹에게는 금지된 것이 너무나 많았다”고 설명한 조 작가는 “숙소 단체생활을 통한 사생활 침해, 혹독한 체중관리, 어디서나 계속되는 외모평가와 성희롱, 성추행 등은 분명 팬들도 알고 있는 현실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팬픽 속에서 무대 밖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되는 순간, 더 많은 것이 금지될 터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걸그룹 팬픽에서 ‘사랑’은 기존에 장르로서 확립된 팬픽의 문법을 따르기 위한 필수 요소로서 서사를 유지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조우리 작가는 그렇기에 걸그룹 팬픽에 ‘이성물’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팬픽에 등장한 걸그룹 멤버들은 사랑이라는 수단을 통해 현실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볼 수 있었다. 그 사랑의 대상이 이성인지 동성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 대상이 동성일 경우엔 가부장적 관습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자유까지 얻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거침없는 성적 묘사의 가능성이 더 많은 독자들을 매혹시켰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배경 속에서 걸그룹의 ‘동성물’을 향유하는 팬들은 여성과 여성의 성행위라는 관습의 틀을 깨뜨리는 성애적 관계와 성적 묘사를 통해 거칠 것 없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조우리 작가는 다만 성행위 묘사에 있어서는 남돌 팬픽과 차이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보이그룹 팬픽 ‘동성물’의 경우 성기를 비롯한 신체 부위의 명시적인 지칭, 삽입성교와 체위에 대한 구체적 묘사, 다채로운 신음소리 등이 수위 높게 서술되는 반면, 걸그룹 팬픽의 ‘동성물’은 은유를 통한 여성 신체에 대한 찬미가 주를 이뤘다.”
이에 대해서 조 작가는 “여성 창작자가 팬픽 속 캐릭터의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완벽히 분리될 수 없기에 일어난 현상일 것이라 짐작된다”고 했다.
한편, 조우리 작가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열악한 현실, 특히 여성에게 들이대는 가혹한 잣대를 알기에 여돌을 ‘소비’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늘 안고 있다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상처 받을 것을 알면서도 무대 위에 서는 것을 택한 여성’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팬픽이 소중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도 이야기했다.
“내가 쓴 팬픽 속 그들에게 준 이야기들이 바로 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나를, 우리를 지킬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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