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아이돌이 세대를 거치며 변화한 모습을 드러내고 ‘퀴어함’(Queerness)을 차용하는 경우도 생기기 시작했다면, 팬덤 역시 변화를 거쳐오고 있다. 팬픽도 마찬가지다.
단지 동성애 서사를 다루는 RPS(Real Person Slash, 알페스)가 아니라, 더 많은 다양한 퀴어함을 다루는 ‘퀴어페스’가 등장한 거다.
※팬픽과 알페스(RPS) 모두 아이돌 멤버들을 엮는 ‘커플링’을 기반으로 한 연성이 기본이다. 팬픽이 소설 형식을 띈다면 알페스는 ‘썰’이라 불리는 짧은 글부터 긴 글, 그림, 영상, 소설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요즘은 알페스가 통용적으로 쓰인다.
<2020 퀴어돌로지> 두 번째 세미나에서 퀴어페스 팬픽들을 소개한 윤소희 서울퀴어세제션 객원멤버는 “퀴어페스와 알페스의 차이는 모호하기도 하고, 명확하기도 하다”고 했다.
“등장인물이 성별 이분법에 저항하는 묘사가 등장하는지 등의 여부에 따라 구분하기도 하는데, 특히 중요한 부분은 인물이 자신이 ‘정상성’ 바깥에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지의 여부다.”
그러니까 퀴어페스는 ‘정상성’과 떨어진 “부치텀 서사, 젠더퀴어 서사와 무성애자의 로맨스 서사 혹은 로맨스가 배제된 무성애 서사, 그리고 퀴어 대안가족 이야기 등”을 포함한다.
이는 넓은 스펙트럼에서 자신의 성별 정체성 혹은 성적지향을 찾고자 하는 퀴어들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퀴어페스 서사의 등장은 퀴어 스펙트럼에 대한 논의가 다양해진 시기와 비슷하게 맞물린다.” 윤소희 씨는 “팬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구체적인 퀴어함을 찾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퀴어페스가 나오게 됐다는 거다.
알페스를 하는 팬덤에서 주로 하는 놀이는 “실제 아이돌 멤버가 하는 행동(2차 창작의 기반이 된다는 의미에서 ‘1차’라고 불리기도 한다)에서 생겨나는 특정 행동과 발언 등으로, 관계성이 드러나는 일명 ‘떡밥’을 가지고 추가적인 상상력을 덧붙이는 떡밥놀이”다.
“이런 놀이가 지속될 수 있는 원동력은 크게 두 가지”라면서 윤소희 씨는 “그룹 내 멤버들 간의 연대감, 실제로 그 관계를 증명하는 서사 등의 1차 떡밥과, 그것을 바탕으로 창작되고 덧붙여진 이야기인 2차 떡밥”을 들었다. 이것들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1차와 2차의 관계 속에서 소비러(소비하는 사람)와 연성러(창작물을 만드는 사람), 주접러(연성러의 창작물을 가지고 노는 사람) 3요소가 얼마나 모이는지에 따라 알페스 팬덤의 규모가 결정된다.”
퀴어팬덤의 이러한 서사 놀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윤 씨는 “놀이는 영유아의 발달에 있어서도 없어서 안될 필수적인 요소다. 놀이는 세상을 안전하게 경험할 수 있는 작은 세계, 스스로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통로 등으로 표현된다”는 말로 설명했다. 즉, “퀴어가 퀴어로 정체화하는 과정, 그러니까 자신의 삶과 구성 요소가 재정립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대중문화’로 여겨지기에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케이팝 아이돌 팬덤에서 알페스 놀이는 “타인들과 퀴어 커뮤니티에 대해 소속감과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용이한 창구이기도 하다.”
새로운 가족공동체, 무성애 등 다양한 퀴어 서사 등장
퀴어페스는 다양한 정체성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퀴어 당사자의 실제 현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반영된 이야기들도 많다.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했다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기독청년단체에서 동기를 만난다거나, 트랜스젠더 커플의 트랜지션(출생 시 지정된 성별을 자신의 젠더 정체성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을 다루거나, 무성애자가 정체성을 탐색하는 과정을 다루는 등.
새로운 가족 형태인 ‘퀴어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가족 구성원 중 자신의 퀴어성을 가감 없이 밝히고 또 다른 구성원 역시 퀴어이거나 앨라이(Ally, 퀴어 권리를 지지하는 사람)인, 각자의 정체성과 지향성은 참고사항일 뿐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모습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퀴어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윤소희 씨는 퀴어페스의 “퀴어 서사는 다양한 모습과 접점, 삶의 방향, 성적실천, 퀴어섹슈얼과 퀴어문화를 그려낸다”고 평했다. 또한 이런 이야기가 퀴어에게 “내재적으로 정의되지 못했던 소수자성에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현재 이후의 삶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고 했다.
“기존에는 스스로의 퀴어성을 인지하기 위해서 학술서나 논문, 서적 등의 다소 딱딱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을 통했다면, ‘퀴어페스’가 등장한 뒤론 이 서사를 통해 보다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윤 씨는 “자신과 주변의 인식에 비해 사회 전반의 인식의 변화가 늦은 것에 대해 괴리감을 느끼는 경험은 퀴어 정체성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다. (알페스 혹은 퀴어페스) 서사 속에서는 그 인식을 단숨에 확장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이야기 속에선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를 앞당길 수 있다. 이것이 퀴어에게 퀴어페스가 가지는 가장 의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울퀴어세제션 객원 멤버인 지미는 퀴어페스가 ‘트랜스’(Trans) 서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트랜스라는 표현은 ‘횡당하다’, ‘초월하다’, ‘관통하다’ 등과 같은 뜻을 가진 접두어다. 당연히 젠더 정체성 외에 다양한 언어와도 함께 쓸 수 있다.” 지미는 “트랜스는 트랜스젠더의 줄임말로 ‘섹스-젠더를 해체하고 초월하는 존재’라는 고정된 범주로 볼 수도 있지만, 넓게 보자면 어떠한 삶과 관계를 다르게 상상하는 방법이자 인식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트랜스’를 특정 사회적 집단이 아닌, 특정한 ‘태도’나 ‘시선’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제안하고 싶다. 트랜스적 렌즈를 통해 기존의 섹스-젠더-섹슈얼리티, 그리고 젠더 이분법적인 세상을 바라본다면? 트랜스적 렌즈를 끼고 젠더 규범 등의 한계를 폭로하거나, 규범 너머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상상하는 건 어떨까?”
그런 의미에서 지미는 “RPS 문화는 본질적으로 ‘트랜스적인’ 세계”라고 설명했다. “남성아이돌 RPS 문화 향유자(알페서 RPSer)들이 팬픽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을 어떤 존재로 변화(트랜스)시키는 것이 RPS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성아이돌 중 한 명(A)는 RPS 세계 속에서 다양하게 정체성이 전환된다. 그는 래퍼 B와 로맨틱한 관계인 ‘대학생’이 되기도, 대학생C와 로맨틱한 관계인 ‘직장인’이 되기도, 대학생D와 로맨틱한 관계인 ‘유치원 교사’가 되기도, 미국에서 한인 부부에게 입양된 ‘입양인’이 되기도, 대학교를 다니는 ‘뱀파이어’가 되기도, ‘토끼 수인’이 되기도 한다.”
지미는 이런 주장이 “최근 트랜스젠더 혐오자들이 ‘네가 트랜스젠더라면 나는 트랜스 흑인이다, 트랜스 고양이다’ 등으로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논쟁을 불러올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런 논의를 확장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트랜스’라는 표현을 붙이는 걸 ‘혐오세력의 혐오표현’으로만 간주하고 ‘혐오세력만의 권력’으로 생각해버리는 건 위험하다. 다양한 정체성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태도를 트랜스로 독해하는 작업과, ‘트랜스 고양이’와는 완전히 다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가 트랜스 범주를 부정하기 위한 의도라면, 전자는 트랜스를 새로운 인식론적 가능성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이어 한국외국어대학교 임대근 교수가 주장한 ‘트랜스 아이덴티티’(Trans-identity) 스토리텔링 개념을 소개했다. “이 개념은 인류가 창조하고 향유해 온 수많은 서사체에는 ‘트랜스 아이덴티티’ 캐릭터, 즉 정체성 전환 인물 형상이 존재하며, 바로 그 인물 형상에 의해 이야기가 구성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군신화>를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야기로써 정체성 전환 서사로 읽고, <춘향전>의 경우도 춘향에게 이도령에 대한 연인 정체성을 전환할 것을 강요함으로써 사건이 전개되지만 이도령이 암행어사로 정체성 전환에 성공하면서 사건이 해결되는 이야기인 ‘트랜스 아이덴티티’ 서사로 읽는다.”
지미는 임대근 교수의 주장을 기반으로 “RPS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그 세계를 향유하는 이들이, 실존하는 인물들을 자신이 원하는 서사로 집어 넣어서 그 인물을 변화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장르 자체가 본질적으로 ‘트랜스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에게 RPS는 자신의 정체성을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바꾸고 싶은 욕망을 적극적으로 대리-실천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세계”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지미의 주장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지는 않는다. 특히 트랜스젠더 혐오자들이 ‘트랜스’ 서사로 읽힐 수 있는 ‘퀴어페스’를 하는 창작자들을 괴롭히고 비웃는 사이버불링도 일어나고 있다. 퀴어페스 혹은 트랜스 서사가 여성 서사를 빼앗는다며, 그것을 창작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지미는 “퀴어페스가 ‘여성 서사’를 가져간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퀴어페스가 어느 정도 ‘여성 서사’이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퀴어한 남성 아이돌이 젠더 경계를 흐리는 실천을 할 때, 그것은 레즈비언 부치와 팸이 기존의 젠더 경계를 흐리는 실천을 하는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성을 가지고 노는 것은 ‘퀴어함’이라는 큰 틀 안에서 우리를 연대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남성 아이돌을 가지고 감히 ‘레즈비언’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레즈비언 서사를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지미는 ‘여성 서사’의 의미를 재고해 봐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의견을 덧붙였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이 있고, 각자의 역사가 있으며, 각자의 욕망이 있다. 단순하지 않고 복잡다단하다. 각자의 개인적 특징과 독특함을 서로 존중하며 캐릭터를 해석하고 창작하길 바라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더 많은 사람들이 보다 다양한 자신의 욕망을 탐구하는데 몰두했으면 좋겠다. 퀴어-페미니스트이면서 동시에 RPS문화 향유자인 우리들이 자신의 욕망이 지속적으로 펼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기사 좋아요 3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소수자 시선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