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중심적 법학, 여성의 시각으로 조명

‘한국 법여성학의 전망과 과제’ 학술회의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3/11/09 [21:02]

남성중심적 법학, 여성의 시각으로 조명

‘한국 법여성학의 전망과 과제’ 학술회의

김윤은미 | 입력 : 2003/11/09 [21:02]
한국에서 ‘법여성학’은 아직 생소하다. 그러나 그간 한국여성운동의 많은 성과들이 법여성학과 관련을 맺고 있다. 성폭력 관련법이나 가족법 등 각 분야에서 성불평등한 조항들을 제,개정하기 위한 노력이 그것이다. 법여성학은 기존의 법학이 ‘평등’하지 않다는 문제제기에서 시작해, 남성중심적인 법학을 여성의 관점에서 조명하는 법학이론이자 방법론이다. 평등한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제대로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나아가 여성과 법의 전반적인 관련성을 짚어보는 학문인 것이다.

법을 여성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법과 법조계는 대표적인 ‘남성영역’으로 여겨진다. 서울대 양현아 법대교수(법여성학)는 그동안 법에서 배제되어 온 여성의 입장, 체험, 고통을 여성의 ‘목소리’로 비유했다. ‘목소리’는 아직 제도화되지 않은 낮은 지위, 리듬과 톤을 가진 보다 원초적인 상태를 드러내는 기호다. 법여성학은 ‘아버지의 법’과 ‘어머니의 목소리’를 화해시키려는 노력이라는 것. 양현아 교수는 지난 5일 서울대학교 공익인권법센터가 주최한 ‘한국 법여성학의 전망과 과제’ 학술회의에서 이같이 말했다.

호주제, 동성동본금혼, 부부재산, 모성보호…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한국 법여성학의 흐름에 대한 개괄 및 현재 개정이 필요한 분야별 법조항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이은영 교수는 1990년대에 모든 법 영역에서 남녀차별적인 규정이 검토되었고, 여성의 권익을 향상하기 위한 입법이 행해졌다고 말했다. 1995년 여성발전기본법을 제정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대한 처벌법도 이 시기 제정됐다. 노동 분야에서는 남녀고용평등법을 들 수 있다. 또한 고용할당제가 도입되어 조금씩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여성주의 관점에 입각한 판례도 속속 등장했다. 헌법재판소에서 내린, 동성동본 혼인을 금지하는 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결정이나 제대군인가산점제도에 대한 위헌결정이 대표적인 판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아주대학교 조미경 교수는 가족법분야에서 한국 법여성학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과제로 호주제와 동성동본금혼제도, 법정부부재산제도, 배우자상속분제도를 꼽았다. 호주제의 경우 올해 5월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의원입법안이 발의됐으며, 지난 10월 정부안이 국무회의에서 통과, 국회통과를 남겨둔 상황이다. 조미경 교수는 “정부안의 경우 자식이 부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면서 예외적인 경우에 모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것으로 하고 있어, 통과한다 해도 개정운동이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정부부재산제도의 경우 혼인 중 부부 일방의 명의로 취득한 재산을 그 일방 특유의 재산으로 하고 있다. 조미경 교수는 “1990년도 민법개정을 통해 이혼배우자가 재산분할청구권을 인정받게 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지만, “혼인 중 취득한 재산이 명의자 특유의 재산이기 때문에 남편 명의의 재산을 그 자신이 단독으로 처분할 수 있으며, 그 이후에 부인이 이혼청구를 하는 경우 분할을 요구할 재산이 없게 되는 곤란한 경우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혼인재산에 관하여 부부 일방이 전체 재산에 관한 법률행위를 할 때는 상대방 배우자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조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동관계법의 경우 노동자로서 여성이 동등대우를 받도록 하는 것과, 동시에 여성의 차이를 ‘차별’이 아닌 ‘권리’로서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가 주요한 논제가 된다. 예를 들어 2001년 개정된 근로기준법의 여성보호규정의 경우 산전 후 보호휴가는 90일로 연장되는 등 모성보호가 강화된 반면 일반여성 보호규정은 완화됐다. 또한 출산과 육아에 대한 지원이 고용보험법 개정을 통해 법으로 구체화됐다. 그러나 주5일 근무제 도입과 함께 생리휴가가 무급화 된 것처럼 노동법의 경우 노사간의 쟁론이 치열해서, 그 와중에 여성들의 권리를 획득하기란 앞으로도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김엘림 교수는 여성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 비율이 날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비정규직과 정규직간의 차이가 큰 점, 상시 5인 미만의 사업장에 남녀차별금지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점, 간접차별개념을 비롯해서 다수의 법 규정이 아직 실효화되지 않은 점 등을 과제로 지적했다.

할당제가 실효성을 거두려면

법여성학의 관심은 법적으로 여성들에게 형식적인 평등권을 부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법이 아무리 형식적 권리를 보장해도 제반 여건이 변하지 않는다면, 여성들의 현실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화여자대학교 김선욱 교수는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제도적으로 구제하기 위한 장치로써 ‘적극적 조치’에 대해 소개했다. 김 교수는 한국의 경우 정치, 의사 결정직에서 여성들이 소외돼있기 때문에 할당제와 같은 적극적 조치의 제도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적극적 조치의 제도화를 통해 여성 집단이 겪는 불이익에 대한 사회적 각성이 일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실시 중인 할당제는 국가고용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공무원 채용에서 실시되는 양성평등채용목표제, 국공립대 여교수 채용목표제, 공기업여성채용인센티브제, 정부위원회여성위원목표제, 여성공천할당제, 여성과학기술인력의 채용 목표제가 있다. 특히 여성공천할당제의 경우 정치와 관련된 법여성학의 주요 과제로 지적됐다. 박숙자 국회여성위원회 전문위원은 “비례대표의원과는 달리 지역구 의원의 경우 여성할당제가 ‘권고 사항’이었기 때문에 실효성이 거의 없었고, 공천제도 대신 상향식 경선제가 도입되면서 여성후보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여성의원의 수는 이전과 비슷한 수준에 머물렀다”면서, “여성할당제가 실효성을 거두기 위해서는 의무규정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여성의 경험 토대로 법학 구성해나가야

이 자리에선 그간 양성평등의 방향으로 개정된 법 역사 및 개정이 필요한 각 분야별 법조항에 대한 논의가 상세하게 이루어진 반면, 법여성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한 큰 테두리의 공통적인 관점을 접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소송들이 많이 발굴, 제시되지는 못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양현아 교수는 ‘종회회원 확인의 소’를 낸 종중 여성들의 소송을 예로 들면서, 여성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개념화하는 곳에서 법적 추론과 근거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법학이 보다 여성에게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아직 법학이 기록하지 못한 여성들의 경험과 세계를 토대로 새로운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 역할이 한국 법여성학이 담당해야 할 과제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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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양모여교수도 2014/07/23 [17:03] 수정 | 삭제
  • .
  • 00 2014/07/23 [17:01] 수정 | 삭제
  • 상대를 더 견제하는데 노력합니다.
  • 빌리 2003/11/10 [22:37] 수정 | 삭제
  • 서울대 법대를 중심으로 드디어 법여성학 논의가 시작되려나봅니다.
    기사 보니까 그래도 꽤 많은 얘기들이 나온 것 같은데요.
    이번 학술회의 자료집을 구해봐야겠습니다.
    한국은 법학이 너무 고루한 게 문젭니다.
    법여성학 논의가 법학의 보수성에 금을 가게한다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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