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 가면 성폭력을 이야기한다!’(이하 ‘그 곳에…’)는 성폭력 경험을 자유로이 얘기할 수 있는 자리다. 그 곳은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해서 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성폭력 생존자들과 성폭력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이 자리를 통해 참가자들은 일상 속에서 가져왔던 생각들을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 그물로 만들고 있다. 그 그물은 한동안 우리 눈과 귀를 가렸던 편견을 깨고 성폭력에 관한 우리의 깨달음을 하나하나 잡아낸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성폭력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펼쳐내며 그 속에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낸다. 그러면 성폭력에 관한 우리의 무거움은 그 무게를 덜어나갈 수 있으리라. “나도 그런 공포에 시달렸어요.” 처음 이 모임을 생각하게 된 건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다. 어떤 모임을 준비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삼십대 중반이었던 한 언니가 밥을 먹다 불쑥 “난 저렇게 유리로 된 새시문을 보면 금방이라도 뭐가 깨고 들어올 것 같아. 좀 긴장돼”라고 말했다. 같이 밥을 먹던 이들은 별 생각을 다한다며 핀잔을 줬지만, 그 순간 다가오는 어떤 느낌이 나중에 그 언니와 더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실은 나도 한동안 그런 공포에 시달렸던 적이 있어요. 집에 혼자 있을 때 외판원이나 낯선 사람이 와서 ‘계세요?’하고 물으면 숨을 죽이고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예요. 갑자기 심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느낌도 들고. 사람이 갔다고 판단되면 안심이 되는데 내가 왜 이러나 싶은 거예요. 실은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성폭행을 당했거든요. 그 뒤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아지긴 했는데 한 때는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내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그 언니가 나직이 말했다. “나도 그런 경험 있어. 열다섯인가? 열여섯인가?”, “그래요. 아까 언니가 얘기하는데 느낌이 와 닿더라니…. 그래서 그랬구나!”, “아직 한번도 남한테 얘기한 적 없어. 울 엄마도, 식구들도 아무도 몰라.”, “어머나, 한 이십 년 정도 되가나? 근데도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단 말예요?”, “뭐 그런 일을….” “얘기하고 나면 훨씬 가벼워지고 홀가분해지는데. 그게 내 잘못이 아니잖아요. 근데 마치 죄 지은 것처럼 우리가 말 못하고 살잖아요. 근데 막상 말해 보면 훨씬 나아지던데….” 그 언니와 친분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신뢰가 높은 사이도 아니건만 이십년 가까이 꽁꽁 묶어 두었던 이야기를 내게만 하는 걸 보고, 이건 이 사람이 얘기를 안 하고 싶어서 안 한 게 아니라 얘기를 못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폭력에 관한 진실을 왜곡하는 사회 성폭력 범죄는 100% 가해자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생존자로 하여금 이렇게 입을 다물게 만드는 사회, 이게 바로 우리 사회이며, 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하지만 사회의 변화는 몹시도 더디기에 피해를 겪어 낸 생존자들이 우선 먼저 자신의 경험을 자유로이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단 생각을 이 언니를 보면서 갖게 됐다. 한편으로 성폭력 생존자 국가상대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지원하고 있는 ‘성폭력 생존자 국가소송을 지지하는 사람들(이하 ‘지지하는 사람들’)’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밝힌 다른 생존자들과 만나게 됐다. 2000년 경찰청 통계자료에 의하면 1시간 17분당 한 번꼴로 성폭행 사건이 일어나고, 여성단체들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성폭력 사건 신고율이 2~3%에 그치는 우리나라. 이런 현실을 감안한다면 얼마나 많은 성폭력 사건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성폭력 생존자들의 생존담을 들어 보면 정말이지 다양한 형태로 성폭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성폭력은 말 그대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회의 가치와 분위기는 성폭력에 관한 진실을 알 수 없도록 하고 있으며, 무언가 그럴 만한 사유가 있어야 성폭력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래서 지극히 평범한 여성인 내게는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환상을 갖도록 조장한다. 그런 환상 속에 있다가 성폭력을 당하면 자기 모멸감에서 헤어 나오기가 더욱 힘들다. 그래서 더욱 성폭력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 곳에…’가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지난 9월부터 ‘지지하는 사람들’의 지지자들과 함께 ‘그 곳에…’를 열어 온 것이 이제 3회를 맞이하고 있다. 무엇을 부끄러워했나 ‘그 곳에…’에 참여했던 한 구성원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니 생각이 끊이질 않아서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그게 말이 되어 나와지지 않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며, “왜 내가 말을 못하는지 그 문제에 접근해 보고 싶다” 했다. 그런데 왜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은 말하기를 꺼리는가?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목까지 차올라왔는데 그것이 왜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것일까? 나 또한 성폭행 사건 이후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괜히 말했다가 쓸데없는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하고 싶을 때조차 말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 순간, 나는 곤혹스러웠다. 그러다 20대 후반에 한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처음 하게 됐고 후련하단 느낌을 받았다. 내가 몇 번의 ‘드러내기’ 경험을 하고 나서 깨달은 게 있다. 내가 성폭력 경험을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나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나 자신을 지켜내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고, 죽을까봐 저항하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다. 순결을 잃었다거나 엄청난 일을 겪었다는 그런 것보단, 폭력 앞에 무릎 꿇었던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런 나를 다시 본다는 게 두려웠다. 그러나 이것도 거듭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니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단 생각이 들었고, 지금껏 괜한 책망으로 나를 줄곧 할퀴어왔단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이것이 비단 나, 개인의 문제였단 말인가? 상처를 분명히 봐야 치유할 수 있다 돌아보면 성장기엔 순결 이데올로기 때문에 세상에서 ‘흠’이라 말하니, 밖으로 얘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폭력 사건이 생기면 피해 생존자에게서 그 원인을 먼저 찾으려 하는 세상인데, 생존자들이 입을 다물게 되는 건 당연하지 않나? 그러나 순결 이데올로기나 피해자 책임론은 극복해야 한다. 성폭력에 대한 사회 편견임이 분명하니까. 이렇게 보면 성폭력은 본인에겐 자신만의 문제로 보일지 몰라도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성폭력은 개인의 성향이나 기질, 경험의 문제가 아닌 그것을 바라보고 방조하는 사회의 문제다. 심각한 것은 자신의 경험을 말 못하게 하는 사회, 나아가 자신의 몸이 겪은 경험과 자기 스스로를 분리시키게 만드는 사회, 그래서 성폭력이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도 그것 따로 이것 따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떨어져 있는 섬처럼 그 문제만 오롯이 나와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게 만들고, 자아분열을 일으키게 만드는 것, 이것이 더욱 치명적인 상처가 아닐까? 성폭력 생존자가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은 치유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경험과 자신을 하나로 통일되게 하는 것, 그래서 분명히 바라보게 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과정이다. 분명 상처는 났다. 그게 크든 작든. 상처를 바라봐야 어떤 상처인지, 연고를 발라야 하는지, 빨간약을 발라야 하는지, 찢어 고름을 내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나? 성폭력 생존자의 ‘말하기’는 바로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그러나 ‘말하기’를 강제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것이 말이든 글이든 혼자 일기를 쓰든 내 안에서 정리하고, 스스로 부딪혀 싸울 수 있다면 좋다. 그렇지 않아도 상처 난 자신을 들볶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 곳에…’를 통해 생존자들의 경험이 말이 되어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말하는 것이 치유니까 말해야 한다’는 당위론 그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다. 말할 수 있을 때 들어주는 것 또한 말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 곳에…’와 같은 소그룹 모임은 정말 소중하다. 다양한 답을 찾아 나선 ‘그 곳에…’ “내가 며칠 전에 오빠를 만나서 밥 먹었거든. 근데 오빠가 오빠친구 00 얘기를 하는 거야. 밥 먹다 말고 내가 오빠 눈 똑바로 보면서 얘기했어. ‘오빠, 나 그 오빠 싫어. 언젠지 기억 안 나는데 어릴 때 그 오빠가 내 치마 속으로 손 넣고 이상한 짓 하고 해서, 나 그 오빠 싫어해. 오빠 몰랐지?’ 오십 줄에 접어든 울 오빠가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도 눈 똑바로 보면서 얘기하니까 숟가락 들고 빤히 쳐다보는 거야. 내가 한마디 더 했어. ‘그 오빠가 어디 나한테만 그랬겠어? 안 그래?’ 그랬더니 울 오빠가 나보고 ‘그래. 그래.’ 그게 위로라도 된다는 듯이 그러는 거야. 근데 막 통쾌한 거 있지? 마치 가해자랑 대면한 것 같은 기분이야. 내가 처음 얘기했거든. ‘그 곳에…’서 내가 그런 얘기들을 안했으면 아마 말도 못 꺼냈을 거야. 참 소중해, 그 모임. 그지?” (모임 참가자, 40대 초반) “아무데서나 얘기 할 수 없지만 이 모임에선 걸림 없이 다 얘기할 수 있어서 제일 좋은 것 같아. 듣는 사람이 이해하든 못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나 자신이 다 쏟아낼 수 있다는 게 좋아. 얘기를 하면서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런 과정 속에서 치유된다는 느낌이야. 일단 성폭력에 집중해서 얘기하고 모임 구성원들이 성폭력에 대해 치유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약속들이 되어 있잖아. 그러니까 술술 얘기가 나오는 것 같아. 우리가 나 그런 경험 있소, 하고 얘기하고 다닐 필요 없잖아? 그냥 약속된 사람들과 약속된 이야기를 하니까 시원한 것 같아.” (모임 참가자, 30대 후반) “살면서 성희롱이나 성추행이나 뭐 아무튼 성폭력을 많이 당하잖아요. 근데 그걸 무시했거든요. 기분 나쁘지만 귀찮다고 그냥 지나친 것도 있고, 분위기상 그냥 지나친 것도 있고. 내 달력 보면 매달 셋째 주 목요일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 뒀어요. 다른 일정보다 이걸 먼저 챙겨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살다가 ‘그 곳에…’ 가서 사람들 얘기 듣다보면 저런 생각도 하는구나 정신이 번쩍 들어요. 그리고 그런 성폭력들이 내 성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난 그게 궁금해요. 아직 딱히 정리된 생각은 없지만 정리되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모임 참가자, 30대 중반) ‘그 곳에…’를 통해 성폭력에 대한 우리들의 기억을, 경험을, 생각을 한 가닥 한 가닥 붙잡는 길 찾기를 시작했다. ‘그 곳에…’는 한 사람, 한 사람 성폭력이라는 공통의 경험을 가졌거나, 성폭력 없는 세상을 바라는 공통의 바램을 가진 이들이 서로를 아우르고 치유하며 성장하도록 할 것이다. 그 길 찾기에 어떤 이야기들과 어떤 그림들이 쌓이게 될지, 또 어떤 사람들이 함께 할지 모르지만, ‘그 곳에…’는 굳건한 버팀목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고 희망이 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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