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기법 글쓰기’로 만나는 내 안의 비판자[자기 이해 글쓰기-나를 찾아가는 여섯 개의 물음] 무의식 2편2019년, 내 인생 책을 만났다. 바로 『다락방 속의 자아들』(할 스톤, 시드라 스톤 지음, 안진희 옮김, 정신세계사)이다. 당시, 치유하는 글쓰기 연구소에서 박미라 선생님과 함께 12주에 걸쳐서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에서 ‘자아, 인격, 목소리, 부분’이라고 칭하는 것들은 우리 내면의 어떤 측면들을 인격화한 것이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슬픔이’ 캐릭터로, 불안이라는 감정을 ‘불안이’ 캐릭터로 만든 것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락방 속의 자아들』은 내 안에서 주된 힘을 발휘하는 자아들, 외면당한 자아들, 내면의 아이, 부모 자아들 등과 만나기 위해 ‘목소리 대화법’을 제안한다. “목소리와의 대화법은 이들을 객관화하고 인식하고 이름을 붙이고 이해하고, 이들과 함께 창조적인 일을 벌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목소리 대화법과 비슷한 것이 바로 〈자기 이해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하는 ‘대화 기법 글쓰기’다. 내가 인터뷰어도 되고 인터뷰이도 된 것처럼 글쓰기로 둘 간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엥, 이게 뭐야?’ 싶겠지만 한 번 시도해 보면 내 안의 인격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는 걸 경험하게 된다.
나를 비판하는 ‘내면의 비판자’와의 인터뷰
중년의 위기를 통과하며 직업적으로 방황하던 시절, 내 안에서 자꾸 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변변찮은 직업도 하나 없고... 이거 했다 저거 했다 잘 하는 짓이다! 너는 뭐 하나 끝까지 하는 일이 없잖아!”라고 말하던 내 안의 비판자. 그 목소리 때문에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 목소리와 글쓰기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제인’이었다. 제인은 검정 단발 머리에 뿔테 안경을 썼다.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찌푸린 채 뭔가를 감독하고 있었다. 아주 바빠 보이는 그녀에게 겨우 말을 건넸다.
-안녕, 제인! 제인: 됐고 할 얘기 있으면 빨리 해. -앗. 시간을 너무 많이 뺏지는 않을게. 바빠 보이네. 제인: 알긴 아네. 나 지금 감독할 게 너무 많거든. 용건만 간단히 말해. -넌 나랑(필자)에 대해서 어떤 걱정을 하고 있어? 제인: 에휴... 할 말이 많은데 오늘은 한 가지만 말할게. 걔 봐봐. 끝까지 하는 일이 없잖아. 다 때려치우잖아. (...) 지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그런 애를 걔 엄마가 보면 뭐라고 하겠니? (헉!) -그럼 넌 나랑의 엄마 편이야? 제인: 아니? 난 나랑 편인데? (허걱!) 난 걔가 번듯하게 1인분의 몫을 하면서 사람들한테 대접받으면서 살았음 좋겠어. (...) 난 간절했어. 그래서 그렇게 나랑 귀에 대고 끊임없이 말했던 거야. 내가 뭐 대단한 걸 바란 건 아니잖아? -너 간절했구나... (뒷부분 생략)
제인이 “걔 엄마가 보면 뭐라고 하겠니?”라고 말했을 때 깜짝 놀랐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엄마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두려워서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의 엄마가 나에게 뭐라고 할까 봐가 아니라, 내면화된 엄마의 목소리가 나를 혼낼까 봐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놀랐던 건, 그 목소리가 엄마 편이 아니라 내 편이라고 말한 대목에서다. 아, 나를 괴롭히는 ‘내면 비판자’도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었구나...
신기하게도 이 대화를 나누고 난 이후, “넌 끝까지 하는 일이 없잖아.”라고 말하는 목소리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졌다. 물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강도나 빈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밀어붙이는 자아’의 목소리에 조종당하는 우리들
제인처럼 내 안에서 나를 비판하면서 어떠어떠 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측면을 ‘내면 비판자’라고 한다. 내면 비판자는 더 많은 일을 하라고, 시간을 아껴 쓰라고, 규칙에 순응하라고,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고, 너는 너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재잘거린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의 내면 비판자는 속삭인다. “네 글은 아무도 안 읽을 걸?”
이 목소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내면 비판자는 대부분 우리의 어린 시절에 형성된다.
“발달과정에서 우리는 특정한 행동을 하면 보상받고 다른 행동을 하면 처벌받는다. 이를 통해 어떤 자아들은 강화되고 어떤 자아들은 약화된다.” -『다락방 속의 자아들』
부모에게 순응해야만, 열심히 공부해야만, 좋은 결과물을 내야만, 나쁜 충동을 억눌러야만 우리는 미움 받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다. 내면 비판자는 우리가 이 세상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이 사회의 규칙을 지키고, 스스로를 통제하며 살아갈 수 있으며,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다. (안타까운 건 그 과정에서 우리의 취약한 부분들은 깊이 숨어버린다는 점이다.)
내면 비판자는 우리 안에서 점점 힘을 키우고 우리를 조종한다. 우리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일들이 사실 내면 비판자의 지시나 촉구에 의해 행해진다. 『다락방 속의 자아들』의 저자들은 현대인의 핵심적인 자아 중 하나인 ‘밀어붙이는 자아’에 대해서 재치있게 설명한다.
“밀어붙이는 자아는 한 손에는 채찍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끝내지 못한 목록을 든 채로 우리를 다그친다. ‘학술지를 아직 안 읽었어. 침대도 아직 정돈 안 했어. 논문도 아직 안 썼잖아. 운동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어. 정원의 잡초도 뽑아야 해. 수도꼭지에서 물이 줄줄 새고 있어...’ 목록은 끝이 없다. 일한 시간은 인정받지 못하고 오직 한 가지만이 확실하다. 우리가 목록의 꼭대기에서 항목을 하나 지우면 밀어붙이는 자아는 맨 아래에 또 한 항목을 추가할 것이다. (...) 우리는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이런 목소리의 지배 아래서 살고 있을까? 자신은 분명히 스스로 선택한 일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삶의 대부분을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면 비판자와의 대화에 성공하려면
〈자기 이해 글쓰기〉 프로그램에서는 내면 비판자와 대화 글쓰기를 시도한다. 이때 주의할 점이 있다. 그의 말을 반박하거나 논쟁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절대 그를 이길 수 없다.) 나를 평가절하하는 그의 말은 너무 쓰라려서 어떻게든 항변을 하고 싶어지지만, 그의 말을 반박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그에게 설득당한 참가자들이 많다.
대화에 성공하는가는 얼마나 열린 자세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의 말을 경청하는가에 달려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인다는 건 그에게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니 일단 한번 들어 보자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내면 비판자는 다름 아닌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제대로 하지 않을 거면 시작도 하지 마”, “처음부터 완벽하게 해야지!”라고 말하곤 하던 완벽주의자 자아는, 자신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지 않았다면 아마 너는 인정도 못 받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됐을 거라고도 말했다. 나를 평가하고 흠집 내려 드는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한 거라고 말이다.
비록 그의 방식이 경직돼 있고 서툴긴 하지만, 내면 비판자는 나를 위해 존재하고 일해 왔다. 섣불리 그 목소리를 없애거나 떨쳐버리려 하기보다는 먼저 그의 얘기를 충분히 들어줘야 한다. 신기하게도 자신의 존재와 노고를 인정받고 나면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제인과의 대화의 말미에 제인은 어느새 팔짱을 풀고 있었다. 당시 제인은 몸에 꽉 끼는 검정 투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대화를 마친 후에는 스커트의 단추를 몇 개 풀더니 시원한 맥주를 마시러 갔다. 나를 보호하느라 긴장하고 있었던 그녀가 좀 이완되고 느슨해진 거다. 또 내 안의 완벽주의자는 그와 나눈 대화의 말미에 나한테 이렇게 말했었다.
“난 네 인생의 무대에서 주연을 너무 많이 했어. 피곤해. 이제는 그냥 조연으로 살고 싶어.”
그때 알았다. 내면 비판자 때문에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날 걱정하고 위하느라 많이 애썼고 그래서 지쳐있다는 것을. 그도 쉬고 싶어한다는 것을.
이렇게 내면 비판자와 한번 말을 트고 나면 그의 성질이 조금 순해지고, 그러면 그는 더이상 뼈아픈 비판자가 아닌 나의 협력자가 될 수 있다.
탈동일시-내 삶이라는 자동차의 핸들은 내가 잡는다
내면 비판자와 대화를 나누는 이유는 한 마디로 그와 ‘동일시’(identification)하지 않기 위해서다.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 인생이라는 버스를 운전하고 있다고 치자. 버스에는 다양한 승객들이 타 있다. 그런데 완벽주의자라는 승객이 와서 이리로 가면 안 된다고, 버스 운전대를 내놓으라고 나를 위협한다. 그때 운전대를 완벽주의자 자아에게 넘겨준다면 그에게 사로잡히는 것이 된다. 결국 “목소리와의 대화 과정의 목적은 당신 자신의 ‘심리적 자동차’를 운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다락방 속의 자아들』)
내면 인격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관찰의 힘, 알아차리는 능력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고 요가를 하는 것도 이 관찰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아닌가.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을 그저 바라보는 것, 내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어떠한 판단도 없이 지켜보는 것. 생각이나 감각이 곧 ‘나’는 아님을, 그저 흘러가는 것임을 깨닫기 위한 수행이다.
그렇게 나의 신체 감각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아, 내 안의 완벽주의자, 네가 또 발동 걸렸구나’라고 알아차려 본다. 그리고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네 요구를 다 들어줄 순 없어.”라고 말해본다.
‘너 별 볼 일 없구나?’라는 말이 내 안에서 들릴 때,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 나를 별 볼 일 없다고 말하는 인격이 또 나를 사로잡았구나. 가만, 그때의 신체 감각은 어떤지 살펴볼까?’라고 생각하며 거리를 둘 수 있다.
내면 비판자와 글쓰기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하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다.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일단 나에게서 떨어뜨려 놓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의 내면 비판자에게 글쓰기로 말을 걸어보자. 먼저 그의 얘기를 충분히 듣고 그의 노고를 인정해 주자. 그러고 나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해주자. 너로 인해서 나도 많이 힘들었다고. 너의 충고는 고맙지만, 이제 내 삶이라는 버스의 운전대는 내가 잡겠다고.
▶[자기 이해 글쓰기 -나를 찾아가는 여섯 개의 물음] 가을 과정 참여자를 모집 중이다. https://blog.naver.com/meetme_writing/223587609250
[필자 소개] 나랑. 치유하는 글쓰기 안내자. 전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기자. 14년차 인터뷰 작가. 활동가로, 페미니스트로 살아오면서 늘 한 켠에서는 마음공부를 하고 있었다. 뒤늦게 상담 심리 석사 과정에 들어섰다. 여성과 소수자들의 의식 성장을 도우며 그 길에서 나도 함께 성장하기를 꿈꾼다. 인스타그램 @hello.writing.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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