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태지역 페미니스트…폭력의 구조도, 연대도 연결돼있다

‘아시아·태평양 페미니스트 포럼’ 참여 후기

안소정 | 기사입력 2024/10/23 [18:40]

아태지역 페미니스트…폭력의 구조도, 연대도 연결돼있다

‘아시아·태평양 페미니스트 포럼’ 참여 후기

안소정 | 입력 : 2024/10/23 [18:40]

지난 9월 태국 치앙마이에 많은 다양한 아시아·태평양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모였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정중앙에 위치한 치앙마이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38개 국가에서 500여 명의 페미니스트가 모인 것이다. ‘아시아·태평양 페미니스트 포럼’(APFF)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 2024년 9월 12일~14일 열린 APFF(아시아·태평양 페미니스트 포럼) 참가자들의 클로징 세리모니. 참여자들이 제작한 포스터를 모두 들고 와서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APFF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와 협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비영리 단체 APWLD(여성, 법, 개발에 관한 아시아·태평양 포럼)에서 3년마다 개최하고 있으며 올해 4회를 맞이했다. (사진: APWLD)


2011년 시작해 올해로 4회를 맞이한 APFF 포럼은 유엔 산하 「여성, 법, 개발에 관한 아시아·태평양 포럼」(APWLD: Asia Pacific Forum on Women, Law and Development)에서 3년에 한 번 개최해왔다. 그러나 2017년 제3회 포럼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한동안 열리지 못하다가 올해 7년 만에 열리게 되었다. 이 자리는 여성 인권을 포함해, 식량 주권, 다국적 기업에 의한 자원 착취, 동남아시아의 기후위기와 생존 문제, 군사주의 문화 등 폭넓은 범주의 문제가 여성들의 눈과 입으로 논의되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APWLD의 「Womanifesto」 사업의 일환으로, 한국에서 청년여성들의 열띤 참여 속에 2022년 〈페미스쿨〉을 진행한 바 있다. 이후 APWLD의 활동과 소식을 접해오며 이번 ‘아시아·태평양 페미니스트 포럼’(이하 APFF)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아시아‧태평양 여성들, 삶의 현 주소는 어디인가

방위산업과 군사기지화, 종교적 성차별부터 페미니즘 백래시까지

 

9월 12일에 시작된 3일간의 여정 중, 주로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가 주최한 워크숍이 열린 첫날에 집중하여 현장 후기를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Where We Are)”를 주제로 다섯 명의 연사가 연단에 섰다.

 

▲ “기업 포획은 많은 인권 침해의 ‘근본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기업 포획과 부채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랄라 엠마누엘/스리랑카 ‘경제정의를 위한 페미니스트 단체’ 활동가 (출처: APWLD 공식 소셜미디어에 발행된 ‘기조 강연’ 중 핵심 문장)


사랄라 엠마누엘(Sarala Emmanuel)은 국가 재정의 50% 이상을 채무상환에 사용하느라 복지 위기에 처한 스리랑카 상황을 들려주었다. 한편 스리랑카에서는 여성노동자의 권리와 관련된 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오랫동안 제기되어왔는데, 최근 땅과 자원을 기업에 판매하는 것을 수용하는 대가로 여성노동자를 위한 법 개정 과제를 시행해주겠다는 거래를 정부가 제안했다는 상황을 이야기했다.

개발정의, 노동자 권리와 교차하는 여성운동의 전략, 한 영역에서의 정의 실현이 다른 영역에서 정의 포기를 가리키는 현실 앞에서 ‘함께 이기는 운동’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 “페미니스트들은 방위산업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군국주의와 경제적 통제는 제국주의의 양 날개입니다.” -아즈라 탈랏 사이드/파키스탄 ‘형평성의 뿌리’ 활동가 (출처: APWLD)


파키스탄에서 온 아즈라 탈랏 사이드(Azra Talat Sayeed)는 늘어나는 군비 지출 속에 외면당하는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언급하며, 페미니스트들이 방위산업 문제에 더 관심을 갖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이드는 농촌 지역에서 평생, 농부와 여성의 삶을 위협하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활동을 해온 여성이다.

 

▲ “군대는 종종 (우리의) 왜소함을 이용해 우리의 섬들을 무시하지만, 우리는 희망을 가져오기 위해 그 왜소함을 사용합니다.” -테레사 아리올라/북마리아나 제도 ‘우리의 공유 자산 670’ 활동가 (출처: APWLD)


북마리아나 제도에서 온 테레사 아리올라(Theresa Arriola)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늘어난 군비 지출 규모 데이터를 소개했다. 그리고 마리아나 제도가 미·중 해양기지 경쟁체제 속에 미국의 해양 군사 기지화되면서 파괴되어가는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다.

현재 팔라우도 같은 상황으로 미군 시설이 들어서서 긴장이 한층 고조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발표를 마친 후 구호가 현장에 울려 퍼졌다. “No Justice No Peace!”(정의 없이 평화 없다!)

 

▲ “여성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최전선에서 조직을 이끌고 우리 종교(무슬림)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변화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자니아 안와르/말레이시아 ‘무사와(평등)’ 활동가 (출처: APWLD)


말레이시아 무슬림 공동체 내 여성인권을 위한 운동을 하고 있는 자니아 안와르(Zaniah Anwar)는 성차별 인식이 종교적 신념 체계와 왜곡된 방식으로 결합되어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싸우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의 과제를 전했다.

자니아가 활동하는 단체는 “무사와(Musawah)”로 아랍어로 ‘평등(equality)’을 의미한다. 무사와는 무슬림 가족법 개혁을 위한 글로벌 캠페인으로 시작하여, 종교적 신념 체계와 성차별에 대한 인식을 분리해내고, 다면적 인식 체계 구축을 위한 교육, 캠페인 등을 펼치고 있었다.

 

▲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그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일부 사람들의 반감을 이용하여 여성들과 소외 계층에 적극 반대하고 있습니다.” -오경진/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 (출처: APWLD)


한국여성단체연합 오경진 사무처장은 정치권의 ‘페미니즘 백래시(backlash)’와 여성가족부 폐지 시도 등 한국의 성평등 후퇴 현상에 대해 발표했다. 여성혐오가 정치권에 의해 촉발되고 혐오 정서를 부추기고 있는 현실을 공유했다.

 

기조 강연이 모두 끝나고, 플로어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필리핀의 여성 농민운동가이자 작가인 아만다 에차니스(Amanda Echanis)의 석방을 촉구하는 연대의 목소리였다. 2020년 12월 조작된 무기 소지 혐의로 1개월 된 자신의 아기와 불법 구금된 이후, 에차니스는 법적 소명의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채 구금된 상태였다. 동료 활동가들은 아만다의 구금 해제를 위해 연대와 관심을 요청했다.

 

▲ 구금된 필리핀 여성 농민운동가 아만다 에차니스(Amanda Echanis) 구명 포스터를 들고 다니는 필리핀 참여자들. (사진: APWLD)


이어진 서파푸아 지역의 페미니스트 활동가 에스터 할루크(Ester Haluk)는 서파푸아가 아직도 인도네시아 식민지로 있으며, 6만여 아이들이 자신들의 안전한 영토에서 쫓겨나 난민 신세가 되었다고 호소하며 식민주의 종식과 서파푸아 해방을 외쳤다.

지금도 아시아에 식민지로 남아 있는 국가가 존재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던 필자는 스스로의 무관심에 더 놀랐다. 식민지 종식을 외치는 서파푸아 활동가의 목소리에 아시아를 새로 알게 된 기분이었다. (현장에서 서파푸아 해방을 외치는 할루크의 목소리는 공식 소셜 미디어에 인터뷰 영상으로 올라와 있다.)

 

▲ 서파푸아 해방을 외치는 에스터 할루크(Ester Haluk) 활동가의 목소리. (사진: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한국 사례 발표 “어떻게 한국은 디지털 성폭력 온상이 되었나”

인도네시아도 딥페이크, 디지털 성폭력이 심각한 문제

방글라데시 참여자 “미투 이후 소진됐지만, 이 자리에서 많은 힘 얻어”

 

매일 오전 기조 강연이 끝난 후 점심시간 전후로 APFF에 참여한 개인, 단체들이 주최한 워크숍들이 열렸다. APWLD는 사전에 포럼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워크숍 신청을 받았다. 200개가 넘는 워크숍 신청이 있었고, 그중 60여 개의 워크숍이 2박 3일간 배치되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첫날 오후 3시, “Knock Knock, Have You Survived?: The Survival Story of Struggling Feminists in South Korea”(똑똑, 살아 계신가요?: 한국에서 투쟁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생존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워크숍을 열었다.

“디지털 성폭력 A to Z : 어떻게 한국은 디지털 성폭력의 온상이 되었나?”, “미투의 용기와 연대 : 한국 정치의 권력형 성폭력 고발과 현실”, “‘예술’이란 이름 뒤에 숨은 성폭력” 등 크게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한국 최근 이슈를 다루었다. 발제를 마친 후 워크숍 참여자들과의 소통과 나눔을 이어갔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디지털 성폭력 관련 현안에 대해 어떤 관점으로 사안을 바라보고 접근해야 하는지 꾸준히 논평을 내고 있다. 2024년 8월 28일에는 “딥페이크 성폭력이 놀이가 된 대한민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나?”라는 제목의 논평을 냈다. 


인도네시아의 한 참여자는 인도네시아 또한 딥페이크나 디지털 성폭력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는데, 정치가 이러한 폭력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이선희(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는 “디지털 성폭력이 플랫폼 기반으로 형성되는데, 인터넷 사업자와 국가 산하 공공기관과의 유착도 확인했다. 국가는 이 문제에서 인터넷 사업자에게 디지털 성폭력 방지 의무를 형식적으로만 부과하고 있고 사실상 방조하고 있다. 국가가 젠더 기반 폭력, 특히 디지털 기반 폭력에 페미니즘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한국의 정치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페미니즘 정치 세력화’를 통해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다양한 세대와 지역이 페미니스트의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페미니즘 정치 세력화를 이루어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에서 디지털 성폭력의 기반이 되고 있는 인터넷 사업에서 젠더평등 문화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답변했다.

 

질문을 했던 인도네시아 참여자는 답변에 감사를 표하며, 인도네시아에는 아직도 강제 결혼 문화가 남아 있으며, 이후 워크숍 시간에 그 주제로 진행할 예정인데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한국에서는 이미 겪고 지나온 성차별 의제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진행 중인 현안이라는 것을 배우고, 워크숍 현장에서 대응해나가야 할 과제를 시사 받는 시간이었다. 한국이 대응의 모델을 만들면 그것이 또 다른 국가의 같은 문제를 겪는 여성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방글라데시의 한 참여자는 방글라데시에서도 2019년에 ‘미투 운동’이 있었고, 이후 여성 활동가들이 많이 소진된 채 버티고 있었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많은 힘을 얻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태국의 한 참여자는 자신의 부족 커뮤니티에서 성평등 운동을 하면서 겪고 있는 고충을 나누었다. 같은 지역사회 내에서는 여성 주민뿐 아니라 남성 주민도 설득해야 하기에 더 많은 어려움이 많이 따른다는 이야기였다.

 

통역자로 함께한 태국의 활동가는 동료 활동가의 목소리를 모두 통역해준 후, 자신의 경험도 따로 전했다. 오늘 한국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미투 운동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고맙다고. 자신도 미투 생존자이며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낸 이후 임파워링되었다고 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용기가 되어 마음속에 꽁꽁 안고 있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낼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이 말해야 한다’며 지지와 격려를 보냈다.

 

중국의 한 활동가는 오늘의 자리가 정말 힘이 된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도 디지털 성폭력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으며, 미투 생존자들이 있는데 내년에 「베이징+30」이 열릴 때 ‘젠더 폭력 생존자 모임’이 구성되고 젠더폭력에 대항하는 네트워크가 결성되면 좋겠다는 제안을 전했다. (「베이징+30」은 1995년 북경에서 개최된 제4차 유엔세계여성회의로부터 30년 후인 2025년에 개최될 세계여성회의를 칭한다. 당시 북경여성대회에서 세계 각국의 입법과 정책 등에 ‘성 주류화’ 전략을 제시하였으며, 한국의 여성발전기본법 제정 배경이 되었다.)

 

워크숍이 끝난 후, 네팔의 한 참여자는 따로 찾아와 자신도 생존자라며, 이후 서로의 경험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면 같이하고 싶다는 연대의 의사를 전해왔다.

 

각 나라와 사회에서의 경험과 운동의 고민을 기반으로 진행된 워크숍에서 참여자들과 주최자 모두 서로에게 힘과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서로 다른 국가에서 여성으로서 너무나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워크숍을 통해 다시금 확인했다. 같은 마음으로 다르고도 같은 문제를 안고 싸우는 여성들이 있다는 것, 처음 만난 자리에서 같은 감각으로 서로에게 위로와 용기를 나눌 수 있는 꽉 찬 두 시간을 보낸 것이 벅찬 감동을 주었다.

 

‘아시아·태평양 페미니스트 포럼’ 2박 3일간의 기조 강연과 워크숍을 통해 한국의 여성들, 페미니스트들이 겪는 문제는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동의 경험과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국경을 넘은 연대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실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제4회 APFF 기조연설 주요 내용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apff4.apwld.org/apff-plenary-digest

 

[필자 소개] 안소정.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운영위원.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위해서는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후, 시민의 정치 무대인 ‘동네’와 ‘정치정당’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활동하던 정당에서 남성 헤게모니로 인한 당내 민주주의 훼손을 목격한 뒤, 여성주의 정치 세력화에 인식을 함께하게 되었다. 2021년까지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가 2022년부터는 경기 시흥에서 상임 마을활동가로,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에서 비상임 운영위원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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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즈커플로 태어난 북극성커플 2024/11/24 [16:12] 수정 | 삭제
  • 여성에 대한 폭력을 여기서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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