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던 여성들의 시공간, 돌멩이의 역사에 접속하기

김미례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열 개의 우물〉

손시내 | 기사입력 2024/10/30 [11:11]

반짝이던 여성들의 시공간, 돌멩이의 역사에 접속하기

김미례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열 개의 우물〉

손시내 | 입력 : 2024/10/30 [11:11]

“작은 돌멩이 같은 사람들.”

언젠가 김미례 감독이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2019)의 구성을 설명하며 썼던 표현이다.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감옥에 있거나, 행방을 알기 어려운 이들의 흔적을 더듬는 과정에서, 그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통해 1970년대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제기했던 문제의식이 현재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한 감독은 지금을 사는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렇게 영화에는 과거의 격렬한 시간과 현재의 단단한 생이 함께 고인다. 그 아득한 거리를 그대로 인지하면서, 존재의 힘과 편지의 가능성을 믿고 세상을 솔직하게 바라보려는 마음이 영화를 잊을 수 없게 만든다. 그 세상 속에서 작은 돌멩이들은 각자의 경험과 기억을 품고 오늘의 발걸음을 잇고 있다.

 

▲ 10월 30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열 개의 우물〉(김미례 감독, 2023) 포스터. 1970~1980년대 인천 지역에서 노동하고, 아이를 함께 양육하며 활동했던 여성들을 찾아간다.

 

더 가난하고 열악한 곳에서, 반짝이는 여성들의 말들

“그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좋고 행복했다”는 말

 

작은 돌멩이. 이는 김미례 감독의 새로운 영화인 〈열 개의 우물〉을 말하고자 할 때도 염두에 두게 되는 단어다. 〈열 개의 우물〉을 1970년대와 1980년대 인천 지역에서 일하고 활동하며 살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로 무리 없이 정리할 수 있겠지만,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영화가 ‘작은 돌멩이 같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함께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열 개의 우물〉이 다루고 있는 역사는 그 자체로 놀랍고 귀하다. 더 가난하고 더 열악한 곳에서, 세상 끝으로 내몰린 이들과 더불어 살며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꾸고 또 만들고자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여기 반짝인다. 기존의 노동운동, 빈민운동의 역사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누락됐던 ‘돌보는 여성들’의 존재와 그들의 활동은 역사를 보다 더 확장된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하며, 삶과 운동의 조건에 관해 물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지역의 아이들을 돌보며 ‘일하는 엄마들’을 지원했던 탁아운동이 단지 누군가를 돕는 선의의 행동을 훌쩍 초과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맹렬한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오직 개인의 몫으로만 난폭하게 떠넘겨졌던 노동과 삶, 돌봄의 요구는 이 가려진 운동의 역사 안에서 전복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것’이 된다.

 

▲ 해님방 여성교실. (출처-해님공부방 제공)

 

온 동네가 아이들을 함께 키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이 더불어 살며 꿈을 꾸는 일상은 국가와 자본의 논리를 가장 밑바닥에서 돌파한다. 이는 어떤 의지와 의식의 발현이기도 했고, 동시에 누군가에게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이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통증과 상처를 남긴 날들이기도 했다. 물론 매일의 고된 노동은 뼈를 삭이는 고통을 주었다. 〈열 개의 우물〉은 그 모든 기억을 구체적인 말들 속에 보존한다.

 

김현숙, 안순애, 홍미영, 유효순을 포함해 카메라 앞에 선 인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기왕의 현대사를 다시 쓰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는 숨겨진 역사를 발굴한 자의 의기양양함이나 이들의 이야기를 더 큰 역사에 통합하려는 조급함 대신 천진한 호기심으로 움직인다. 작은 돌멩이들을 임의로 쌓아 올리거나, 그 돌멩이들이 맞춰질 빈칸을 찾아 헤매는 대신 각각의 돌멩이를 궁금해 하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발화하는 이들의 태도와도 연관되는 방향이다.

 

김현숙은 빈민촌 조그만 동네에서,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들어가 아이들 돌보는 일을 시작한 기억을 들려주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게 뭐라고. 얘기는 할 수 있는데, 누구한테 보여주고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과거의 선택들로부터 애써 의미를 길어내지 않는 그의 말에는 어떤 단단함이 있다.

그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좋고 행복했다는 말.

 

김현숙의 말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솔직한 감정 외에 다른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기에 고독하며 자유롭다. 영화는 그 말에 다정하게 반응하며 그가 속한 세상을 원거리에서 응시하려고 한다. 역사의 틈새, 그중에서도 굳이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마음들을 듣고 화면에 새기는 〈열 개의 우물〉은 각각의 인물에 집중하면서도, 세상과 개인의 관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드러낸다.

 

▲ 다큐멘터리 영화 〈열 개의 우물〉 중에서 한 장면.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흥미롭지만, 김현숙이 김미례 감독에게 제일 먼저 소개해 주었다는 안순애의 말은 특히나 깊은 인상을 남긴다.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여성 농민’으로 소개되는 그는 처음부터 “노동자를 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농민운동을 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다만 내 꼬라지가 그렇게밖에 살 수 없어서.”라고 말하는 인물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에서 남으로 피난 온 부모님과 함께 인천 만석동에 살다가 어머니를 돕고 싶어 어린 나이에 동일방직에 입사했고, 유신 시대를 거치며 노동운동의 길을 걸었으며, 이후에는 충북 음성에 정착해 농민운동하는 후배들의 버팀목이 되었다는 안순애.

 

굴곡진 현대사 굽이굽이 사적 역사가 겹쳐지지만, 그는 투사로서의 정체성으로부터 단호히 고개를 돌린다. 그저 살다 보니까, 밥줄이 잘려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두려워하면서, 아파하면서, 고통스러워하면서 그렇게 싸우며 살았다고 그는 말한다.

물론 이야기를 들려주다 시원하게 욕을 내뱉고 과거를 회상하며 종종 허심탄회하게 웃어버리곤 하는 안순애는 너무나 매력적인 주인공이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카리스마가 넘친다. 그러나 “운동인지 뭣인지를 위해” 가족들의 생계를 포기해야 했고, 감옥에 가는 것도 각오해야 했다는 그의 중얼거림에는 분명 회한과 체념이 서려 있다.

 

▲ 안순애의 인터뷰 장면.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농민운동가’와 같은 수식어가 붙곤 하지만, 그는 투사로서의 정체성으로부터 단호히 고개를 돌리며 허심탄회하게 지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 픽쳐스 제공)

 

닥치는 대로 일하던 어머니를 돕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는 안순애의 말은 그의 삶과 공명하며 운명에 관해 생각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노동운동으로부터 도망쳐 농촌으로 향했다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WTO 수입개방 반대 운동과 같은 활동을 했고, 마을 이장까지 지냈다. 어쩌면 이건 그에게 주어진 운명 같은 것일 수 있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다큐멘터리 촬영이 “내 삶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는 안순애의 말을 들려주는데, 이때도 그는 스스로를 의식적 주체로 바라보지 않는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아는 형님을 따라다니며 피투성이가 된 세상에서 두 눈을 꼭 감고 꽹과리를 두드렸다는 청년처럼, 어쩌면 나도 잘 모르면서 그렇게 살아온 게 아니겠느냐고 그는 말한다.

 

삶의 조건들과 씨름하며 통증을 부둥켜안고 지금껏 걸어온 사람들

놀랍게 빛나던 역사적 시공간 탐색이자, 작은 돌멩이들을 위한 헌사

 

이 이야기가 어떤 울림을 준다면, 역사를 새롭게 다시 바라보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꼭 주체성의 발굴은 아닐 수 있다는 단서를 전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때로 누락된 역사를 다룬다는 사실만큼 중요한 건 그것을 다루는 방식일 거다.

〈열 개의 우물〉은 역사 속의 개인을 조명하며 그들의 삶 속에서 명료하게 설명되거나 의미화되기 어려운 감정과 정념들에 주목하고, 풍경들 속에 그것을 싣는다. 그렇게 각각이 자기 방식으로 인식하는 역사를 영화는 저만의 방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열 개의 우물〉 중에서.

 

인터뷰와 옛 사진, 인천과 음성 지역의 풍경을 촬영한 장면들 외에도 영화에는 아카이브 푸티지라고 부를 만한 기록 영상들이 삽입된다. ‘경제성장과 산업화라는 미명하에’ 각종 정책을 통해 도시 빈민을 양산했던 박정희 정권의 모습이나 1950년대 한국전쟁과 같은 현대사의 굵직한 대목들이 시대의 매듭을 만든다.

개인사를 발굴하며 그것을 공적 역사와 겹쳐보는 시도를 여러 다큐멘터리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열 개의 우물〉의 선택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국가가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일관된 주체, 결정적인 가해자로 등장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영화가 간간이 끌어들이는 공적 역사와 국가의 행보는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딛고 있던 삶의 조건으로서 불려온다.

 

분명하고 악독한 적과 싸우다 영광의 흉터를 얻은 게 아니라, 지난한 삶의 조건들과 씨름하며 통증을 부둥켜안고 지금껏 걸어온 사람들. 〈열 개의 우물〉이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하는 건 바로 그런 이들이다. 〈열 개의 우물〉은 놀랍게 빛나던 역사적 시공간에 대한 탐색이자, 작은 돌멩이들을 위한 헌사다.

 

[필자 소개] 손시내. 영화평론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2016년부터 영화와 관련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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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루 2024/10/31 [11:36] 수정 | 삭제
  • 지금도 공동체에서 더 가난하고 빈 곳들을 찾아 함께살아내며 돌보는 분들이 곳곳에 계신 것 같아요. 뭐라고 불러야하는지 모르겠지만, 단지 선행이나 개인의 훌륭한 인품으로 말할 수 없는 너무 소중한 실천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영화를 보면 괴거로부터 현재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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