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자. 안타깝지만 인류에게 엄청난 재난이 닥쳤고 지구에 단 50명만 살아남게 되었다. 생존을 위해서 각자 역할을 나누어 맡기로 했다. 새로운 지구를 위해 당신이 맡고 싶은 역할은 무엇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살고 있을까? 당신의 하루를 묘사해 보라.
※이 글쓰기 주제는 『모든 날 모든 순간, 내 마음의 기록법』의 저자 박미라(‘치유하는 글쓰기 연구소’ 대표)가 『글쓰기 더 좋은 질문 712』(샌프란시스코 작가집단 GROTTO 지음, 라이언 강 옮김, 큐리어스)의 내용을 수정한 것이다.
재난 상황에서 내가 맡을 역할 상상해보기
〈자기 이해 글쓰기〉 프로그램 마지막 시간의 주제는 나의 핵심 가치 찾기이다. 워밍업으로 위의 글쓰기를 한다. 신기한 것은 재난 상황에서 상상한 나의 역할이, 이후에 찾게 되는 나의 핵심 가치랑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의 역할을 분배하는 보스가 되어 있었다는 참가자는 이후에 자신의 핵심 가치로 ‘영향력’을 꼽았다. 생존자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위로가 될 만한 음식을 만들어 나누고 있었다는 참가자는 ‘함께 하기’를 핵심 가치로 선택했다.
이 글쓰기는 자신의 가치랑 맞는 구체적인 직업과 연결되기도 한다. 실제로 내가 기록 활동을 할 당시에 나는 “지구에 단 50명만 남았다면, 남은 사람들이 이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생존하는지 자세히 기록할 것이며, 여자 어린이나 여자 청소년에게 앞서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라고 적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다시 쓸 때는 “나무들로 둘러싸인 고요한 공간에 그루터기 두 개가 놓여있다. 하나의 그루터기에는 내가 앉고 다른 하나에는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이 공간에서 자신의 힘든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고 간다.”라고 적었다. 글쓰기로 만난 이 장면은 내가 상담심리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극한 상황을 설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을 해야 한다’는 당위나 의무, 또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게 한다. 자신이 진짜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지 생각해 보게 하는 힘이 있다.
가치는 무엇인가? 가치는 무엇이 아닌가?
가치란 내가 선택한 삶의 방향이며,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새 어떤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현대 심리치료의 하나인 ‘수용전념치료’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수용전념치료의 핵심 메시지는 한마디로 고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 고통과 더불어 ‘가치’를 향해 ‘전념’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고통을 만들어내는 우리 내면의 경험을 제거하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며, 고통스러운 경험과 함께여도 우리는 얼마든지 가치를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다는 것이다.
가치는 느낌이 아니다. 가치대로 사는 삶은 깊은 충족감과 생동감을 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치가 ‘좋은 느낌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니다. “가치의 방향으로 걸어간다는 것은 좋은 느낌을 느끼는 것(feeling good)이 아니라, 좋은 삶을 사는 것(living good)이다.” 가치를 향해 걸어갈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고 시련이나 좌절과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가치가 분명하다면 그것들과 함께 나의 길을 갈 수 있다.
가치의 길은 일직선이 아니다. 동쪽으로 향해 걷고 있다가, 삶의 어느 시기에 큰 장애물을 만나 돌아가야 한다면, 어느 순간 나는 서쪽으로 걷고 있을 수도, 북쪽으로 걷고 있을 수도 있다. 때로는 멈춰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 하늘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면 내 발자국은 동쪽을 향해 나 있을 것이다. “하얀 눈밭에 나 있는 발자국이 비록 똑바르지 않아도 멀리 보면 동쪽을 향해 있는 것처럼, 내면의 가치는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그 길을 드러낼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치는 방향일 뿐 결과가 아니다. 손에 잡을 수 있는 어떤 결과물이 아니며, 가치로 향하는 삶의 여행에는 종착점이 없다. 오직 과정만 있을 뿐이다.
내 안의 가치와 소망을 각인하기
나는 한 해가 끝날 때마다 1년을 돌아보는 글쓰기를 하면서 내년의 가치를 선택하곤 한다. 내 인생의 핵심 가치가 있지만,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해당 연도의 세부 가치를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엽서 뒷면에 그 가치와 실현 계획을 적어서 냉장고에 붙여 놓은 채 1년을 산다.
어느 날 방 정리를 하면서 몇 년간의 엽서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적어놨던 것들이 다 이뤄진 게 아닌가.
물론 내가 예상했던 방식이나 기대했던 타이밍에 이뤄지지 않았을 수 있다. “부처님은 행복으로도 가피(加被, 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이롭게 하는 힘)를 주시고 고통으로도 가피를 주신다”라는 용수 스님의 말처럼, 어떤 가치는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실현되기도 했다. 또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내 삶에서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 가치도 있었다. 하지만 긴 시간을 두고 보니 내가 선택한 가치가 실현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서 나는 내가 추구하는 바를 글로 써서 의식과 무의식에 각인을 하면 부지불식간에 나의 말과 행동이 그 방향을 향하게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 글쓰기 프로그램의 마지막 시간마다 자신의 가치와 가치 실현 계획을 써서 엽서를 꾸미는 시간을 갖고 있다.
‘소망목록’ 쓰기도 내가 자주 하는 글쓰기 중 하나다. 『아티스트 웨이』의 저자 줄리아 카메론이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라는 책에서 안내하는 글쓰기다. 15분 동안 “나는 ~하기를 바란다”라는 문장으로 총 25개의 소망목록을 빠르게 적는 것이다. 저자는 “한 달에 한 번 또는 당신이 특별히 엉망인 상태가 되었다고 느낄 때마다” 이 소망목록을 쓰라고 말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을 헛디뎌 삶의 중심에서 벗어날 때” “다시 완벽하게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글쓰기를 통해 나를 이해하고 발견하는 여정
〈자기 이해 글쓰기〉 프로그램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동안 살펴본 강점과 약점, 욕구, 감정, 무의식, 몸, 가치 총 여섯 개의 키워드를 종합해 자신을 정의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함께 만든 동료 선생님들과 번갈아 시연하며 프로그램을 마치면서, “나는 꽉 찬 사람”이라는 자기 정의를 내렸었다. 실제로 내가 커지고 확장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부끄럽지만 그때 휘갈겨 썼던 글을 공개한다.
“강점과 약점, 욕구, 감정, 몸, 무의식, 가치. 이것들이 다 나를 이루는 것들이고 이것들을 통해서 난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걸 느껴. 강점을 발휘하고 약점을 부끄러워하고 못마땅해하고 또 보완하려고 애쓰고... 욕구를 느껴. 욕구를 느끼는 게 부끄럽지 않아. 욕구를 가진 살아있는 사람! 감정을 느껴. 분노, 불안, 질투, 사랑, 기쁨, 즐거움... 생생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몸... 몸의 감각을 느끼는 게 좋아. 통증은? 난 통증마저 생생하게 느껴. 무의식- 살기 위해서 무의식에 억압해 놓은 것들, 이제는 마주해야지. 나의 보물 창고. 가치- 난 가치가 뚜렷한 사람이야. 그래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올 수 있었고 앞으로도 살아갈 거야. 와~ 내가 꽉 찬 느낌이야. 내가 커진 느낌이야. 이런 것들로 내가 구성돼 있구나. 내가 가진 게 많구나!”
나도 몰랐던 나, 뜻밖의 나를 만나면서 자신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과정은 우리에게 다름 아닌 ‘안전감’을 선물한다. 울퉁불퉁하고 부족한 면도 많지만 이런 나여도 괜찮다는 감각, 남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말이다.
“누구나 개성화 과정을 통해서 엄청나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개발할 수 있다. 점차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본래대로의 자신이 되어감에 따라 가장 안전한 기반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람의 삶을 모방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닌 체할 필요도 없다. 우리 각자는 이미 넘치게 가지고 있고 또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면 작업』(로버트 A. 존슨 지음, 고혜경·이정규 옮김, 동연)
7주의 글쓰기 프로그램만으로 나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여정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참가자들에게 말한다. 죽을 때까지 매번 나를 새롭게 발견하고 ‘나’라는 사람의 퍼즐 조각을 맞춰 가라고, 그게 삶이라고 말이다.
나를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막막할 때, 지금의 내 모습이 맘에 들지 않을 때, 나다운 것인지 무엇인지 혼란스러울 때 이 글쓰기는 나를 새롭게 볼 수 있는 힘을 선물할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글쓰기를 경험하길 바라는 마음을 안고 〈자기 이해 글쓰기-나를 찾아가는 여섯 개의 물음〉 연재를 마무리한다.
[필자 소개] 나랑. 치유하는 글쓰기 안내자. 전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기자. 14년차 인터뷰 작가. 활동가로, 페미니스트로 살아오면서 늘 한 켠에서는 마음공부를 하고 있었다. 뒤늦게 상담 심리 석사 과정에 들어섰다. 여성과 소수자들의 의식 성장을 도우며 그 길에서 나도 함께 성장하기를 꿈꾼다. 인스타그램 @hello.writing.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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