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드렛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있죠. 간병을 제가 전담하게 됐을 때는 항상 일을 안 하는 때였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들 급여를 받는 일들을 하고 있잖아. 사회생활을 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네가 (돌봄을) 하는 게 낫지’라는 그런 식의 암묵적인 흐름이 있었어요 항상. 돌봄을 전담하게 되는 데는 그런 것들이 있거든요. 어째서일까요? 실질적으로는 돌봄이 제대로 적절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고 삶의 질도 떨어지고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돈을 주는 건 아깝다고 생각하거든요.〉-(참여자6), 한국여성민우회 ‘10명의 돌봄 경험 인터뷰’ 중
돌봄에 대한 논의는 점차 늘고 있고, 돌봄중심, 돌봄위기, 돌봄국가… 등의 말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우리 사회에서 돌봄은 중요한 키워드가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 관한 논의는 충분치 않다.
돌봄이 힘든 이유 “시간 부족”, “체력적인 부담”, “경제적 부담” 순 돌봄 사회로의 전환에 가장 큰 걸림돌 ‘장시간 노동’
돌봄 경험과 돌봄에 대한 인식을 묻는 이번 설문조사는 ‘돌봄 경험이 있는 시민’을 대상으로 5월 28일부터 6월 22일까지 온라인으로 진행했으며, 참여자는 1,000명이다. 설문 결과를 채윤진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복지팀 활동가가 발표했다. “참여자 성별은 여성 75.6%, 남성 24.3%, 기타 0.1%”이었으며, “연령대는 30대 54.3%, 20대 21.9%, 40대 18.6%, 50대 4.8%, 60대 이상 0.4%” 순이었다.
누군가를 돌본 적이 있는지, 있다면 누구를 돌보았는지에 대해 46.4%는 “혈연/법적 가족을 돌본 경험만 있음”이라고 답했지만, “다양한 대상을 돌본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53.6%를 차지했다. 그 대상(복수응답)은 “친구 22.6%, 반려동물 22%, 파트너(애인/비법적 배우자) 20.2%”가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돌봄을 받은 경험도 54.6%는 “혈연/법적 가족에게 돌봄 받은 경험만 있음”으로 답했지만, “다양한 대상에게 돌봄 받은 경험이 있다”는 응답도 45.2%나 됐다. 역시 그 대상(복수응답)에선 “친구 25.5%, 파트너(애인/비법적배우자) 19.2%가 높게” 나왔다.
돌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대해선 “55.6%가 ‘꼭 필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응답했으며, “모두의 권리라는 응답도 29.6%, 모두의 의무라는 응답 또한 28.3%”였다.
돌봄이 힘든 이유에 대해선 가장 많은 이들이 ‘시간’을 꼽았다. “43.9%가 돌봄에 쓸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서라 답했고, 체력적으로 힘들어서(43.7%), 경제적 부담 때문에(40.3%), 감정노동이 어려워서(31.1%) 순”이었다.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냐는 질문엔 “’매우 동의한다’ 46.0%, ‘대체로 동의한다’ 42.4%로, 동의한다고 응답한 비율을 합하면 88.4%에 달하는 결과”를 보였다.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는 이 전환에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충분히 돌볼 수 있는 시간 부족(22.7%), 일하는 게 돌보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는 생각(17%), 임금노동을 통해 사회가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인식(16%), 돌봄 친화적이지 않은 일터(15%), 돌보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는 돌봄에 대한 가치절하(9%), 돌보는 일은 여성의 역할이라는 성역할 고정관념(6.6%) 등”을 꼽았다.
법적 가족, 혈연 가족만이 돌봄의 대상 아니다
10명의 돌봄 경험자의 인터뷰엔 혈연/법적 가족 돌봄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돌봄 경험 이야기도 담겼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오랜 기간 돌봄은 가족 내에서 해결되어 왔기에 오늘날에도 가족의 몫이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한정된 자원 안에서 돌봄을 해결한다는 것은 쉽게 ‘독박 돌봄’으로 치닫게 되거나, 원하지 않는 돌봄을 의무나 도리로 강요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채윤진 활동가는 “일부 인터뷰 참여자는 법적 가족이 아닌 이들에게 돌봄을 요청하거나, 이에 응해 돌봄을 주고받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인터뷰를 통해 “법적 결혼이나 출산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었지만, 동성 파트너나 친밀한 동거 관계에서 이뤄진 돌봄 경험을 들어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들의 돌봄 과정은 쉽지 않았다. ‘법적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회나 제도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법적 가족이 아닌 이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의 불편함”도 있었고 “돌봄을 나누던 두 사람 스스로도 돌봄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할지 어려움을 겪는” 일도 있었다.
〈제일 후회하는 것은 병원에 갔을 때 (내가 동성파트너로서 분명 가족이고 보호자였는데) 친구라고 얘기했던 부분이에요. 명확하게 “내가 파트너다.”라고 얘기를 해야 했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의료사회복지사 강의를 듣고 알게 됐는데 병원이 ‘가족만이 보호자가 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법적인 것이 아니고, 병원들이 어떤 종류의 책임감을 전가하기 위해서 가족을 요구하는 것인데, 나도 그 프레임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 너무 후회되고. 어떤 식으로든 내가 이 사람의 보호자라는 것만 명확히 하면 되는 거였더라고요. 〉-(참여자5)
원가족에서 돌봄을 기대할 수 없거나, 받고 싶지 않아서 다른 이들을 선택한 경우도 있다. “참여자8이 돌본 친구는 성소수자로서 성별확정수술을 부모님 ‘몰래’ 받았기 때문에 원가족의 돌봄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결국 먼저 수술을 해본 경험이 있던 참여자8이 그를 돌보는 일을 경험”했다. “참여자3은 본인의 항암치료 과정을 자기 자식에게 보이기 불편해하는 남동생, 그리고 그 조카를 돌보느라 이미 너무 지친 어머니를 보면서, 결국 원가족에게 돌봄 받기를 포기하고 주변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참여자7은 (가정)폭력 피해가 있어 원가족에게 도저히 돌봄 받을 수 없는 친구를 본인의 집으로 데려와 돌보기도” 했다.
채윤진 활동가는 “이처럼 사회적으로 많이 가시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시민들은 법적 가족의 경계를 넘어서 서로 돌봄을 주고받고 실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채윤진 활동가는 또 “인터뷰이들에게 ‘돌봄은 어떤 것인가’에 물었을 때, 한 인터뷰이가 ‘똥과의 사투’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사실 돌봄은 어렵고, 때론 더럽고 힘든 일임은 분명하다. 또한 돌보는 이가 아플 경우, 간병뿐 아니라 가사노동을 돕거나 전담해야 하는 일도 생긴다.
〈어머니 입원하시고 나서 한 달 조금 넘었을 때인가? 동생 깨워서 학교까지 보내고 나면 진짜 동생이 너무 집을 무슨 정말 관리가 안 된 축사처럼 만들어놔요. 저는 청소를 나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진공청소기로 그 침대 밑을 이렇게 청소를 하는데 거기서 본인이 먹다 남긴 페트병을 거기다 그냥 넣어놨더라고요. 마지막 그거 하나를 발견했을 때 그냥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내가 왜 이걸 해야 되지 싶으면서도 너무 억울하기도 하고 또 엄마 생각이 많이 났던 것 같아요. 엄마는 나 없는 동안 다 이런 걸 하셨겠구나. 그래서 많이 울었었어요.〉-(참여자9)
“돌봄의 어려움 중 또 하나는 갑작스럽다는 것”이다. 채윤진 활동가는 “이 문제는 돌봄자들의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언제 본인이 나서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늘 불안함이 상주하고, 자신의 삶을 본인 계획대로 꾸리기 어렵다는 점, 상시 대기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무력감으로 이어지기 쉽고 규칙적인 임금노동을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또한 인터뷰이들은 돌봄의 어려움이자 필요한 일로, “눈에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돌봄에서 빠져서는 안 될 것은 기획, 매니징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돌봄의 공백은 없는지 살피고, 돌봄 받는 이의 병세나 상황에 맞는 돌봄 방식을 고민하는 역할, 돌봄 받는 당사자 대신 주변을 촘촘히 진두지휘하고 계획하는 ‘기획노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러한 역할과 노동은 간과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을 바꾼 돌봄”
채윤진 활동가는 “인터뷰 참여자들은 돌봄을 하면서 ‘좋았던 것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고 했다. 누군가를 돌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대화가 많아지며 서로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는 것도 생기고, 어려운 일을 함께 해나간다는 감각, 내가 이 사람의 보호자가 된다는 감각 때문에 더욱 친밀함을 느꼈다”고 했다. 이런 돌봄의 경험은 또 다른 돌봄 실천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할머니가 절 키우며 항상 하셨던 말이 “장독대를 닦든 뭘 하든, 손에 뭐가 묻으면 씻으면 돼. 손으로 뭘 만지는 걸 겁내지 마. 씻으면 그만이야.” 이렇게 항상 알려주셨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할머니 돌보며 대소변을 치워야 했는데) 그냥 “똥도 씻으면 되지”라면서 했어요. 할머니가 알려준 걸 할머니한테 다시 해 드릴 수 있는 것도 좋았고. 아이 키울 때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참여자10)
더불어 돌봄 경험을 통해 “나도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는 괜찮은 사람이구나”라는 “긍정적인 자아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점”도 의미있는 부분이다.
〈전에는 제가 사랑불능자라고 생각했어요. 내 안에 사랑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랑하고 싶고 사랑에 대한 열망이 있는데 적당한 대상을 찾지 못한 것 같았고, 사랑해야 되는 대상을 사랑하지 못하는 게 되게 힘들었던 것 같거든요. 근데 엄마 돌봄 이후에는 ‘내가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고, 특히 우리 고양이들을 만났을 때도 그랬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내가 너무 좋다.’〉- (참여자1)
남성도 돌봄을 거드는 게 아니라 책임지는 경험을 해봐야
돌봄의 경험은 여러 감정의 습득, 배움으로 이어지고 그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인터뷰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채윤진 활동가는 “대다수의 인터뷰 참가자가 돌봄 받는 미래의 자신에 대해 상상하기 어려워했다”고 밝혔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에 갈 길이 멀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토론회에서는 ‘돌봄교육’의 필요성, 더 많은 돌봄의 경험과 논의들, ‘돌봄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 남성의 돌봄 참여도 필수적이라고 지적되었다. 이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깨는 일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10인의 인터뷰이 중 유일한 남성 참여자는 ‘남성들의 돌봄 경험 부족’ 문제를 말했다. “다른 남성들에게 단순히 주말에 육아를 돕는 차원이 아닌, 육아휴직을 통해 반드시 아이를 온전히 홀로 책임질 수 있는 주돌봄을 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돌봄을 책임진다는 경험, 돌봄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해 본 경험을 해봐야 육아, 돌봄을 힘들어하는 여성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어린이집 가니까 친해진 엄마, 아빠들이 있거든요. 근데 아빠들하고는 얘기 안 통해요. 몰라요. 아니, 같이 애를 본다는데 왜 모르는지? 그 당시에는 이해 못 했는데 진짜 말이 하나도 안 통해요. 하나도 안 통해요. 왜 그러는지 봤더니 육아휴직을 안 했어요. 돌봄을 주체적으로 해본 경험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이 안 통해요. 말을 해도 엄마들이랑 대화가 되지. 아빠들이랑은 대화가 안 돼요. (웃음) 안 하게 돼요. 〉-(참여자4)
채 활동가는 “남성의 돌봄 참여를 배제나 낙오로 만들지 않는 기업과 사회의 적극적인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며 “노동시간 단축, 일터의 인식 변화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언급했다.
발표를 마무리하며 채윤진 활동가는 “다양한 모습의 돌봄”을 상상해 보자고 제안했다. “더 다양한 상상력으로 돌봄을 주고받는 모습을 꿈꾸고 이야기해야 하자”고. 그러면 “우리도 좀 괜찮은 돌봄을 주고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아픈 사람이 보여주는 부정적인 면에 너무 휘둘리지 않고 ‘얘가 지금 아파서 그래. 이 짜증은 얘도 지금 감당하기 힘들 거야’ 그렇게 해석해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늘 사람 사이에 유머가 존재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유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어도 좋겠고요. (중략) 돌봄은,,, 다양한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서 돌봄을 받았고, 각자의 방식이 참 다르고 모양새도 다 달랐어요.〉-(참여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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