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할 것 없이 아프다. 장시간 노동과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빈곤, 기후위기와 일상화된 성차별과 다양한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아플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 있다. 아픈 것은 자기관리 실패로 여겨지고, 건강은 스펙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건강중심사회, 건강이 개인의 능력이 되어 버린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건강해지라는 ‘정언명령’이 아니라, 질병권(잘 아플 권리)임을 주장했을 때, 많은 이들이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병수당이 있었다면 암에 걸리지 않았을지도…

 

지난 10년 가까이 질병권 운동을 해오면서 강의, 집회, 인터뷰 등에서 ‘질병권을 제도로서 보장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항상 질문받았다. 이에 대해 꾸준히 상병수당을 말해왔다. 상병수당은 잘 아플 권리(질병권)가 보장되는데 실질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유용한 제도가 될 것이라고 답해왔다.

 

▲ 아름다운재단에서 2021년 ‘상병수당’을 주제로 필자와 인터뷰 내용으로 만든 카드뉴스 중에서. (출처-아름다운재단)

 

10년 전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상병수당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었다. 업무 외 질병으로 아플 때 유급으로 쉴 수 있는 상병수당이라는 제도를 이미 100여 년 전부터 운영한 나라가 있다고 하면 놀라워했다. 게다가 OECD 가입국 중에서는 법정 유급휴가가 없는 나라는 한국과 미국(일부 주에서만 시행 중) 뿐이고, 대부분 나라에서 이미 상병수당을 시행하고 있다고 설명하면, 한국도 서둘러 도입되길 바란다는 의견이 줄을 이었다.

 

2015년 여성주의저널 일다 시민강좌 ‘하늘을 나는 교실’에서 〈잘 아프기 위한 몇가지 것들〉 워크샵을 진행했을 때였다. 항암치료를 오래 받았다는 한 참여자는 상병수당에 대한 설명을 듣자마자, 만약 상병수당이 있었다면 자신은 암에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반복되는 야근과 습하던 반지하 원룸 생활에서 몸이 아프기 시작했지만, 먹고 살기 위해 노동을 쉴 수 없었다고 했다. 야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곰팡이와 창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속에서 불면의 밤이 잦았고, 몸이 점점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바빠서 병원 가기를 미루고 약국만 드나들다 보니 암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했다. 만약 상병수당이 있었다면, 월세와 생활비 걱정 없이 몇 달이라도 제대로 쉴 수 있었을 것이고, 암을 피하진 못했더라도 일찍 발견해서 장기를 좀 더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상병수당이 있다면, 작은 질병이 중증 질병으로 이어지기 전에 적극적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질병이 곧 빈곤으로 이어지는 것도 일정 정도 막을 수 있다. 그야말로 잘 아플 권리를 보장하는 기본적 제도가 아닐 수 없다.

 

6주의 병가급여, 최장 72주까지 질병수당 지급하는 독일 사회

‘아프면 민폐’가 되지 않으려면 대체인력 의무화 필요

 

지난해 독일 ‘돌봄혁명네트워크’ 제안자이자 함부르크 대학의 가브리엘 빈커 교수를 초대해서 〈돌봄사회를 향한 사회운동〉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행사를 마치고 한참 대화를 나눴다. 그도 질병권에 대해 들으며 상병수당을 떠올렸다며, 자세히 설명했다. 독일은 1883년에 상병수당을 도입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질병에 걸렸을 때 빈틈없이 소득을 보장해 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독일 돌봄혁명네트워크 제안자인 가브리엘 빈커 교수와 필자가 줌으로 대담을 나누는 모습. (출처-다른몸들)

우선 노동자가 아프게 되면 ‘임금계속지급법’(Entgeltfortzahlungsgesetz)에 따라 6주간 병가급여가 지급된다. 그 이후에도 치료가 완료되지 않는다면 질병보험(Krankenversicherung)에서 최장 72주까지 질병수당(Krankengeld)을 받을 수 있다. 만약 이 과정에서 해고를 당한다면 실업급여를 별도로 받을 수 있고, 질병이 장애로 이어진다면 연금을 지급받게 된다. 질병이 곧 절망이 되지 않도록, 다양한 제도를 통해 촘촘히 보장하고 있었다. 건강을 잃었다고 모든 것을 잃으면 안되고, 당신이 안심하고 아파도 괜찮다고 제도를 통해 돌보고 있었다.

 

우리는 노동 시간에 대해서도 한참 대화를 나눴다.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주당 69시간 노동을 주장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장시간 노동은 건강한 사람도 아프게 만들지만, 만성적으로 아픈 몸으로 노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에게 더욱 절망임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빈커 교수는 유럽의 주 4일 노동 실험을 비롯한 노동시간 단축 운동 과정을 말했다. 질병권과 돌봄 중심 사회를 위해 모두 노동시간 단축 운동이 필수라는 것도 강조했다. 그러나 독일에 비해 한국은 여러모로 갈 길이 멀다.

 

2020년 희망연대노조 딜라이브 지부에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북토크를 하러 갔을 때, 참여자들에게 ‘잘 아플 권리가 보장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지’ 물었다. 콜센터 소속 노동자는 아프면 안 된다고 했고, 케이블 작업을 하는 노동자 역시 아프면 안 된다고 했다. 아프면 동료들에게 미안하기 때문에, 아파도 쉴 수 없다고 했다. 열악한 노동 조건은 잘 아플 권리는 커녕, ‘아프면 안 된다’ ‘아프면 민폐다’라는 말과 다짐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 덕성여대 청소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연대의 간담회 자리. (출처-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2022년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이 시급 400원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고 있을 때, 〈덕성여대 청소노동자와 연대하는 페미니스트 연대〉를 꾸렸고 현장 간담회를 했다. 청소노동자들에게 ‘아플 때 쉴 수 있는지’ 물었다. 한원순 부지부장님은 몇 년 전 단체협약에 무급이지만 병가를 사용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아프면 무조건 참기보다는 쉴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하셨다. 아파도 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가운데 정말 다행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드렸다. 장기 병가 사용 시 대체인력 배치를 의무화하는 규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드렸다. 그러자 이후 단체협약 때는 사측에 요구해야겠다고 답변하셨다.

 

직장 내 병가제도가 있어도 대체인력이 없다면, 동료가 과로하게 되고 과로는 다시 질병으로 이어진다. 나의 병가가 다른 노동자의 과로와 질병으로 이어지는 현실에서, 유급이든 무급이든 병가 사용은 미안한 일이 되고,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상병수당에서도 대체인력이 의무화되지 않는다면 실질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워진다는 의미다.

 

질병을 자기관리 실패로 보는 ‘질병의 개인화’ 사회에선

노동자가 아플 때 수당을 받으며 충분히 쉬기란 어려운 일

 

또 한편 상병수당에 대체인력 배치를 의무화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상병수당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제도화 논의가 시작됐다. 대통령 직속 특별위원에서 상병수당 설계를 위한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당시 나는 해당 연구에 참여해서 한국 사회는 유독 ‘질병의 개인화’가 심각한데, 이런 현실에서 상병수당 제도가 도입된다고 해도 정착하기는 쉽지 않은 현실임을 강조했다. 질병이 자기관리의 실패로 여겨지는 질병의 개인화 사회에서, 아플 때 수당을 받으며 쉰다는 게 수용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질병이라는 것은 사회의 여러 구조가 얽힌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관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문화가 강하다. 이를테면 누군가 질병을 진단받았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이 그가 지닌 나쁜 생활 습관을 ‘진단’하는 것은 흔한 풍경이다. 폐암을 진단받으면 흡연을 지적 받고, 간암을 진단받았다고 하면 주말에 등산같은 운동을 하기보다는 넷플릭스를 보며 맥주 한캔을 해온 습관을 지적 받는다. 난소 낭종을 진단받았다고 하면 퇴근 후 요가를 하고 신선한 음식을 조리해서 먹기보다는 배달음식을 먹고 유튜브를 보며 소화를 시키는 생활습관이 지적되는 것들 말이다.

 

물론 흡연은 폐암과 상관관계가 있다. 그러나 흡연을 비롯한 생활 습관은 노동을 포함한 여러 삶의 조건과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면 콜센터 노동자들이 고도의 감정노동 속에서 5분의 흡연은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시간이 된다. 기업은 콜센터 노동자가 응대해야 하는 고객의 숫자를 줄이거나 다양한 복지 제도를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흡연실을 만드는 것으로 감정노동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전략을 사용해 왔다.

 

▲ 희망연대노조 딜라이브 지부에서 주최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북토크에서 필자의 강연 모습. (출처-공공운수노조 더불어사는희망연대본부 딜라이브비정규직지부)

또 한편 장시간 노동자는 신체 활동이 적을 수밖에 없고,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회사에서 장시간 노동 이후 퇴근해도 집에 가면 청소 빨래 같은 일이 넘쳐 나고, 헬스나 등산 같은 ‘건강한’ 신체 활동을 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정시에 퇴근한다고 해도 여성이라서, 비정규직이라서, 퀴어라서, 학벌이나 스펙이 적어서 등의 이유로 일상화된 차별 속에서 일하다 보면, 퇴근 후 감정적 탈진이 온다. 배달음식을 먹고 유튜브를 보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잠시 잊는다.

 

질병을 개인화하는 것은 우리가 아플 수밖에 없는 조건과 구조를 삭제하고, 아픈 몸에게는 죄책감을 심어주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현실을 왜곡해 왔다. 그리고 여성의 외모를 사회가 공동으로 평가하고 통제하려고 하듯, 아픈 몸에 대한 비난과 통제를 일상화시켰다. 이러한 질병의 개인화 문제를 변화시키기 위해 10년 가까이 여러 운동을 전개해왔다. 상병수당과 질병의 개인화 문제는 사실 해당 연구에서만이 아니라, 그 전후로 언론이나 여러 기관 등과 인터뷰에서도 꾸준히 말해왔고, 대중들이 깊이 공감하는 것도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상병수당이 제도화되더라도 만연한 질병의 개인화 현실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작동하기 쉽지 않다. 노동인권이나 성희롱 관련 여러 법조항들이 있지만 현장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 수많은 사례들처럼 말이다. 현재 병가제도가 잘 되어 있는 대기업에서도 상사 눈치가 보이거나 인사고과에 지장이 생길까봐 연차를 사용해서 치료를 받거나, 퇴근 이후 응급실을 통해 진료를 받는 노동자가 적지 않은 현실을 떠올려 보면, 상병수당의 미래도 명백히 보인다.

 

그래서 상병수당을 제도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법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 아프다는 것이 미안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고, 아플 때 충분히 쉬고 치료받으면서 잘 아플 수 있는 전반적 토대를 만드는 과정이어야 한다.

 

근로기준법 적용 못 받는 비정규, 플랫폼노동, 무급 가사돌봄까지

‘일하는 누구나’ 적용받는 보편적 제도로서 상병수당 필요

 

또 한편 상병수당은 일하는 사람 누구나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상병수당 대상이 또다시 정규직이나 대기업 노동자 중심이라면, 의미가 없다. 일하지만 노동자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하는 다양한 이들에게 더욱 절실한 게 상병수당이기 때문이다. 베이비시터, 대리운전, 청소, 배달, 작가 등 다양한 플랫폼 노동자, 5인미만 사업장, 프리랜서 노동자 등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고 몇 년째 주장하고 있다. ‘사적 영역’이라고 불리는 집 안에서 무급으로 노동하고 있는 전업주부나 가족 돌봄자에게도 상병수당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지난 봄에는 한국 사회에서 상병수당이 제대로 도입되도록 노동/시민 단체를 중심으로 ‘아프면 쉴권리 공동행동’(준) 회의에 참여해서 이를 제안했다. 아프면 쉬고 치료받을 ‘잘 아플 권리’가 유급 노동자에게만 적용되어서는 안 되며, 사적 영역에서 무급으로 노동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게 진정한 상병수당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무급 돌봄노동을 제도적으로 존중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무급 돌봄노동의 가시화와 가치화에도 유의미한 일이다.

 

▲ 뉴욕 가사노동임금위원회에서 1974년경 제작한 포스터 (출처-위키피디아)

그러나 상병수당의 기본 목적이 아픈 임금노동자의 소득 보전을 위해 고안된 것인 만큼, (무급 돌봄노동을) 법안에 반영하기 쉽지 않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한편 이해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사적 영역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수행해온 가사돌봄 노동은 성역할(gender role)이었지, 노동이 아니었다. 가부장제는 모성을 여성의 본성으로 규정하면서 자연화(naturalized)했다. 이를 두고 1970년대에 실비아 페데리치는 “너희는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부불노동(unpaid labor)이라고 부른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사실상 사랑과 헌신의 ‘아름다운 행위’를 ‘노동’으로 규정한 것은 최근의 일이며, 그 자체가 오랫동안 논란과 비난이 되었다. 한국 사회만 보더라도 자녀 양육을 비롯한 다양한 돌봄 행위가 ‘노동’으로서 전면적으로 수용된 것은 최근 20년 안팎의 일이다. 사적 영역의 돌봄이 노동으로 명명된 것도 근간의 일인데, 임금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법제도를 사적 영역의 무급 노동에 적용시키기에는 기존 제도나 범주들과 충돌하거나 잘 부합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애초 그 지점을 ‘문제화’하는 게, 변화를 만들어 가는 출발이고 사회운동이기도 할 것이다. 상병수당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꾸려진 노동/시민사회 연대체에서도, 그렇게 급진적으로 모든 것을 포괄해서는 상병수당 법안을 통과시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도 계속 나오고 있다. 법제도 운동 과정에서 항상 제기되는 논지다. 하지만 나는 상병수당의 제도화가 일부 한정된 사람들에게 소득을 보전해 주는 것으로만 앙상하게 마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2022년 9월 24일 청계천 일대에서 열린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 행진 현장. 적자생존이 아닌 약자생존을 이야기하며 다른몸들, 신경다양성 지지모임 세바다, 한국여성민우회가 함께 연 자리다. (출처-약자생존 기획단)

 

상병수당 시범 사업이 2022년 7월부터 일부 지역에서 시행되고 있지만, 여러 문제를 안고 진행되고 있다. 상병수당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과거와 달리 오히려 저조해졌고, 윤석열 정부는 애초 2025년 본 사업을 시작하겠다던 약속을 두 해 미루며 제대로 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에 대응하며 제대로 된 상병수당을 도입하기 위한 노동/시민사회계의 노력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법률을 하나 더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길 바란다.

 

상병수당을 제도화한다는 것은 아픈 게 비난과 차별의 이유가 되고, 아파도 쉴 수 없고,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는 사회 전반을 바꾸는 과정이어야 한다. 상병수당이 누구나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아픈 몸으로 살게 된 모두를 위한 최소한의 보편적, 사회적 돌봄 제도가 되길 바란다.

 

[필자 소개] 조한진희. 정상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의식 위에서 질병권과 돌봄 등을 주요 의제로 하는 ‘다른몸들’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썼고, 『돌봄이 돌보는 세계』, 『포스트 코로나 사회』, 『삶을 바꾼 페미니즘 강의실』, 『라피끄: 팔레스타인과 나』, 『비거닝: 채식에 기웃거리는 당신에게』 등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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