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피트의 16mm 필름
2024년 11월 13일 저녁. 설레는 마음으로 독립예술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찾았다. 다큐멘터리 〈되살아나는 목소리〉 개봉 날짜에 영화를 보기 위함이다. 개봉하자마자 영화관을 찾은 이유 중 하나는 시사회에 참석했던 분들의 추천 글을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배급사에서 홍보한 카피 문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10만 피트의 16mm 필름. 재일조선인 2세 다큐멘터리스트 박수남의 저항과 투쟁의 기나긴 기록.”
내가 꽂혔던 부분은 “재일조선인 2세 다큐멘터리스트 박수남의 저항과 투쟁의 기나긴 기록”이라는 부분보다 “10만 피트의 16mm필름”이라는 부분이었다. 10만 피트의 16mm 필름이라니!
그런데 2024년 지금. 10만 피트의 필름을 복원해 만든 영화가 나왔다고 한다. 그것도 평생을 원폭 피해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해 일본과 한국을 횡단하며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해 온 감독의 영화라니. 이미 그 시간도 길이도 태도도 집념이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박수남 감독은 왜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이 영화의 공동감독이자 박수남 감독의 딸 박마의 감독이 영화를 함께 연출하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는 영화에 진하게 취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의 고전 노래가 좋다며 누군가에게 ‘마의태자’라는 노래를 소개하고자 노래를 부른 박수남 감독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의 이름을 딴 이 노래의 제목을 가져와 지어낸 이름이 “박마의”. 박수남 감독의 딸 이름이었다. 이 노래 하나로 박수남 감독의 캐릭터, 박수남 감독과 박마의 감독의 관계성, 그리고 등장인물 소개가 끝났다. 한국의 고전 노래를 좋아하고 사람들 앞에서 때때로 노래를 부르는. 한국어 발음이 어눌하지만, 목소리가 멋스러워 그마저도 고혹적으로 들리는 재일조선인 2세 감독 박수남. 그리고 그의 정신을 그대로 닮아 〈되살아나는 목소리〉를 기어코 완성해 낸 그의 딸이자 공동감독인 박마의. 이들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재일조선인 2세인 박수남 감독은 어린 시절 한복 차림의 어머니와 함께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을 향해 돌이 날아 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소리. “조센 더러워! 돌아가!” 이 일로 박 감독은 어머니와 함께 길을 걷는 것이 싫어졌다고 고백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 일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긴 순간”이었다. 박수남 감독은 ‘처음엔 너무나 일본인이 되고 싶었고, 인간이 되고 싶었다’며 당시를 회상한다.
그러나 박수남 감독은 본인의 표현대로 ‘황국 소녀’로 끝까지 자라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관동 대지진 때(1923년 발생한 큰 지진으로 사회가 혼란한 틈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며 일본인과 군경이 합세하여 조선인 대학살을 자행함) 일본인 동료들이 숨겨줘 생존한 그의 아버지가 “좋은 일본인에게 보답하는 길은 좋은 조선인이 되는 거다.”라며 박수남 감독을 조선학교에 보냈기 때문이다. 이렇듯 박수남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재일조선인 2세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성장해야 했다.
박수남 감독이 ‘기록인의 정체성’을 갖고 가장 처음 만난 재일조선인은 ‘고마쓰가와 사건’(1958년 재일조선인 청소년이 일본인 여학생을 살해한 사건으로, 미성년자임에도 유래 없는 사형 선고와 빠른 집행으로 논란이 되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이 사건을 소재로 〈교사형〉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의 사형수 이진우다. 박 감독은 이진우와 서신을 교류하며, 그의 폭력성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가 자라온 차별적 환경에 귀 기울였다. 당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던 박수남 감독에게 조총련 측은 일본 정부와의 관계를 의식해 이진우와의 교류를 중단하길 요청하지만, 집념의 박수남 감독은 교류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후 이진우의 사형이 집행됐고, 이들의 왕복 서신을 담은 책 『죄와 죽음과 사랑과』(1963)가 출간됐다. 그리고 이 책은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박수남 감독은 ‘소리의 채집’을 통해 피해 증언을 기록한다. 박 감독은 원폭 피해자들의 증언을 모으기 위해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감독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나서는 사람을 만나기보단 피폭당한 이들의 깊은 침묵과 가난을 목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나이가 드신 피해자들의 경우, 일본어와 조선말로도 자신의 피해를 증언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박수남 감독이 찾게 된 것이 바로 ‘영상’이었다. “떨리는 말 떨리는 몸 자체를 표현하는 데는 영상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 안에는 자신의 피해를 말로는 차마 다 증언하지 못하는 수많은 피해자의 울음, 표정, 몸짓 등이 정성스럽게 모아져 끈끈하게 직조되어 있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돌려 말하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는다. 이 피해증언이 담긴 필름을 복원함으로써 피해의 기억은 말소되지 않고 되살아나고 있었다. 박수남 감독이 평생을 걸쳐 이뤄온 기억의 기록을 통해.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또 다른 인터뷰어, 딸 박마의 감독
박마의 감독은 박수남 감독의 딸이자 〈되살아나는 목소리〉의 공동감독이다. 재일조선인 3세인 박마의 감독 또한 박수남 감독이 겪은 차별의 경험을 비슷하게 공유하고 있다. 박마의 감독은 일본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부터 ‘박’이라는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일로 조선인인 자기 자신을 미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박마의 감독은 도망치듯 전학을 가 ‘아리이’라는 일본 이름을 쓰며 일본인인 척 학교생활도 해보았지만, 할머니 댁에 갈 때면 조선인이라는 사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3년 후, 고민 끝에 시험 답안지에 자신의 본명을 적어 내며 ‘본명 선언’을 했다.(참고 기사: ‘본명’을 선언해야 하는 현실 https://ildaro.com/4336) 박마의 감독은 그 사실을 듣고 기뻐하던 어머니의 미소를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렇듯 박마의 감독의 기억은 영화 안에서 재일조선인 3세의 이야기로 또 하나의 축이 되어 자리 잡는다.
더불어 박수남 감독을 향한 박마의 감독의 질문은 지금 젊은 세대와 박수남 감독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 예로 박마의 감독이 ‘기미가요’를 부르는 조선인들을 보며, ‘기미가요’의 의미를 박수남 감독에게 묻는 장면이 있는데, 이에 박수남 감독은 “일본 천황에게 바치는 맹세의 노래가 ‘기미가요’”라고 설명한다. 박마의 감독은 이러한 접근을 통해 박수남 감독의 기록을 젊은이들에게 설명하고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때론 두 감독의 대화 그 자체가 재일조선인으로 투쟁해 온 피해 증언과 기억의 기록으로 영화 안의 또 다른 목소리가 되어 살아난다.
박수남, 박마의 감독의 ‘혁명 영화’
박수남 감독과 박마의 감독을 인터뷰한 어느 기사를 보니, 박수남 감독이 자주 쓰는 단어가 기록영화, 혁명 영화라고 한다. 두 분 모두 나와 같은 세대는 분명 아니지만 지금, 이 시대에 영화를 배급하는 과정에서 ‘혁명’이라는 말과 개념을 들고 와 세상에 말을 거는 것이 오히려 나는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수남 감독의 혁명은 창과 칼이라기보다 꽃 같은 것이다. 영화의 말미, 박수남 감독은 돌아가신 분들의 학살 현장을 방문한 뒤에는 언제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촬영 차 간 것이니 제대로 된 상을 올릴 수도 없었다며. 박수남 감독의 최선이 노래였다고 한다. 그리곤 박수남 감독의 투쟁을 선언하는 노래인 ‘봉선화’와 이 영화의 장면들이 합쳐져 아름다운 몽타주가 흐른다.
[필자 소개] 변규리. 2016년부터 ‘연분홍치마’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첫 장편 연출작인 통신설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팟캐스트 방송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Play On〉(2017)을 연출. 두 번째 장편으로 “성소수자 부모”라는 정체성을 마주한 두 여성의 성장 서사를 그린 〈너에게 가는 길〉(2021)을 연출했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소개] 2004년 설립된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통과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다양한 현장에서 미디어로 연대하며 다큐멘터리, 극영화, 웹 콘텐츠 등을 제작하고 있다. pink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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