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뜬금없는 비상계엄 선포로 정국이 혼란과 위험에 휩싸였지만,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 시민들의 힘으로 내란 사태를 막아냈다. 7일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됐으나, 여당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의 무책임한 불참으로 폐기됐다. 국회로, 광장으로, 거리로 쏟아져나온 시민들이 탄핵의 목소리를 높였고, 14일 두 번째 탄핵소추안이 본회의에서 가결(총 투표수 300표 중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되어, 오후 7시 24분부터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탄핵 그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시기 이미 대통령 탄핵 과정과 그 이후의 정치를 겪어보았다.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나아가길 원한다. 그러려면 윤석열 탄핵과 내란 책임자 처벌은 물론이거니와, 권위주의 정치를 청산해야 하고, 여전히 소수자의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는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 변화의 목소리를 더욱더 확장하는 일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거리에서 나오고 있는 목소리-‘일단 탄핵 먼저’가 아니라 ‘탄핵과 함께’ 나오고 있는 목소리-를 기록한다. [편집자 주]
비상계엄이라는 비상체제에서 딥페이크 성폭력 피해자는?
2019년 ‘N번방 사건’(텔레그램을 비롯한 메신저 앱을 이용한 집단적인 디지털 성착취 사건)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 그 후 지금까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돕고, 호주에서 검거된 아동 청소년 성착취범 ‘엘’(가칭) 사건과 서울대 딥페이크(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실물처럼 보이게 합성, 조작하여 만든 이미지/영상) 성폭력 사건을 보도했다. 기자이자 반(反)성폭력 활동가로 일한 지 벌써 5년이 됐다.
‘연말에는 제보받은 딥페이크 성폭력 사건 취재에만 몰두할 것이다.’
12월이 왔고, 외부 일정을 잡지 않아 진득하게 텔레그램 성착취 생태계를 취재할 수 있었다. 폭풍전야는 고요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생태계를 한참 모니터링하고 쉬던 중이었다. 소파에 널브러져 유튜브에 접속했고,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섬네일을 발견했다.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딥페이크인 걸까.
비상계엄 선포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하고 조금씩 현실을 자각했다. ‘그럼, 우리나라 어떻게 되는 거지?’ ‘취재하던 거 보도를 못 하겠네?’ 그 순간 온몸에 공포와 분노가 번졌다.
보도를 같이 하기로 한 언론사의 PD와 4일 오후 2시로 잡았던 회의를 무기한 연기했다. 언론사 보도국은 비상계엄 관련 비상 체제로 전환했다. 직전까지 하던 ‘보도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와 같은 평생 숙제같던 고민이 멈춘 밤이었다. 풀린 문제는 없는데 말이다.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국회로 계엄군이 진군하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흘렀다.
그때, 서울대 딥페이크 성폭력 피해자인 루마(필명) 님의 외신 인터뷰가 취소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해되지 않는 일 앞에서 '이해한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밤이었다. 나도 전날 밤 인터뷰하고 온 피해자에게 같은 말을 하게 될까 봐 아찔했다. 물구나무선 것처럼 눈에 힘이 들어갔다.
‘네 사진을 유포하겠다’라는 협박이 성범죄이고, 딥페이크 성폭력이 ‘중범죄’임을 알려낸 피해자들
비상계엄 석 달 전, 명함 400장을 새로 찍었다. SNS로 연결되는 시대에 명함이 굳이 필요한가 싶었는데, 신변의 보호를 위해 얼굴을 가리고 활동하는지라 가끔 나를 증명하는 용도로 필요했다.
명함을 들고 딥페이크 성폭력에 대한 국내외 언론은 물론 정치인, 법조인을 두루 만나러 다녔다. 그들과 ‘딥페이크 사태’에 대한 견해, 분석, 그리고 대안을 이야기할 때면, 딥페이크 피해자의 주체성에 대해 입이 마르고 닳도록 강조했다.
피해자 대부분 본인이 성범죄 피해자가 됐다는 사실을 가해자로부터 협박 메시지를 받게 되면서 알게 된다. 그 상황에서 정신을 다잡고 피해 구제를 위해 스스로 싸운 일, 다음 피해자를 위해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가.
서울대 딥페이크 성폭력 사건의 1심은 검찰이 구형한 10년형이 그대로 선고됐다. 2020년 도입된 ‘딥페이크 처벌법’ 이후 확정판결 중 절반 이상이 집행유예 선고된 것(참조 기사: ‘집유’가 절반 이상… 딥페이크 성범죄 솜방망이 처벌 논란, 문화일보 2024년 9월 26일)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판결이다.
그리고 ‘딥페이크 처벌법’이 개정되어 10월 16일부터 시행됐다. '디지털 성범죄 강국'이란 오명을 썼지만, 범죄의 정도만큼 관련 법 개정 또한 '강국'이란 '웃픈' 이야기를 들었다. 전 세계가 ‘한국의 딥페이크 성폭력’을 주목하고 있다. 일본, 중국, 대만, 독일, 미국, 호주 에서 연락이 왔는데, 수면 아래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이제 막 언론에서 인지하기 시작한 걸로 보인다. 실제로 딥페이크 사태 이후 외신에서 온 인터뷰 섭외는 2020년 N번방 사건 때보다 많았다.
이렇게 많은 이가 딥페이크 성폭력 피해자의 존엄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한 그 순간에도, 사건은 터졌다.
지난 8월 말, 가해자 A가 피해자 최현진(가명)에게 어떤 여성의 나체 사진과 합성된 피해자의 사진, 즉 딥페이크 사진을 보냈고 ‘합성할 너의 다른 사진을 더 내놓지 않으면 유포하겠다’며 협박했다. 딥페이크 성폭력 특별단속 기간이었다. 언론에서 앞다퉈 주요 뉴스로 보도하던 때였다. 가해자는 나의 역린을 건드렸다. 감히 이 시점에 피해자를 협박하다니, 피해자로부터 제보를 받은 날의 감정을 글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네 사진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이 성범죄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일, 본인이 겪은 피해에 이름 붙이는 일 등 피해자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럴 때 어떤 선택을 재촉하기보다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고, 다른 피해자가 내게 알려줬었다. 그렇게 최현진 님과 3개월간 이메일로 소통했다.
비상계엄 며칠 전, 현진 님과 나는 공익을 위해 사건을 보도하기로 했다. 어떤 언론과 함께할지, 어떤 타이밍에 사람들에게 알릴지 고민했다. 12월 2일은 본격적으로 취재에 들어간 날이었다. 피해자가 용기를 내었고, 함께 논의하며 언론에 공론화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윤석열이 오물을 끼얹은 것이다. 피해자들이 지금까지 바꿔낸 시간을 되돌릴 판이었다.
윤석열 OUT 성차별 OUT 성범죄 OUT 여성은 민주주의 정치의 ‘주체’…우리는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텔레그램 성착취 생태계를 모니터링하며 마음이 힘들 땐 정신건강의학과의 도움을 받는다. 의자에 오래 앉아 있으려면 체력을 길러야 하니 2년째 풋살을 하고 있고, 요즘은 ‘저속 노화’ 식단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든 딥페이크 성폭력과 같은 여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 살고 있고, 피해를 겪게 됐을 때 혼자 싸우기 무서워서 누군가가 나를 위해 같이 싸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말이다.
지난 국회 앞 윤석열 탄핵 촉구 시위에서 10대부터 30대까지 ‘젊은 여성’의 참여가 특히 눈에 띄었다. 그에 대한 언론, 전문가 분석이 나오고 있는데 대부분 여성을 주변화하는 내용이다. 아니, 여성은 민주주의 정치의 ‘주체’다. 광장에 나온 여성들은 잃을 게 없는 ‘사람’이고, 지켜내야 할 게 많은 ‘여성’이다. 내가 그랬듯, 시위에 모인 젊은 여성은 딥페이크 성폭력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담아 '탄핵이 답이다'를 외쳤을 것이다.
윤석열 탄핵 이후에도, 세상을 성평등하고 안전하게 바꾸려는 여자들과 함께 추적단불꽃 ‘응원봉’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필자 소개] 원은지 추적단불꽃 대표. 프리랜서 기자이자 반(反)성폭력 활동가이다. 저서로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이봄, 2020), eBook 『나 잡으려고 텔레그램 가입했어?』(alookso, 2024), 공저 『N번방 이후, 교육을 말하다』(학이시습, 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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