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살기 위해, 열린 광장을 만드는 페미니스트들광장에서 시작하였고, 광장에서 멈출 수 없는 목소리들④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뜬금없는 비상계엄 선포로 정국이 혼란과 위험에 휩싸였지만,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 시민들의 힘으로 내란 사태를 막아냈다. 7일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됐으나, 여당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의 무책임한 불참으로 폐기됐다. 국회로, 광장으로, 거리로 쏟아져나온 시민들이 탄핵의 목소리를 높였고, 14일 두 번째 탄핵소추안이 본회의에서 가결(총 투표수 300표 중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되어, 오후 7시 24분부터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탄핵 그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시기 이미 대통령 탄핵 과정과 그 이후의 정치를 겪어보았다.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나아가길 원한다. 그러려면 윤석열 탄핵과 내란 책임자 처벌은 물론이거니와, 권위주의 정치를 청산해야 하고, 여전히 소수자의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는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 변화의 목소리를 더욱더 확장하는 일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거리에서 나오고 있는 목소리-‘일단 탄핵 먼저’가 아니라 ‘탄핵과 함께’ 나오고 있는 목소리-를 기록한다. [편집자 주]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익숙한 감각
12월 3일 밤 10시 23분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날. 3시간도 되지 않아 가까스로 국회에서 계엄 해제를 의결했지만,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계엄 선포 다음 날부터 충북에서는 매일 집회가 있었다. 매일 집회장에 나갔다. 계엄 선포 후 윤석열의 대국민 담화문이 분노 게이지를 계속 높였다. 집회에 나가 시민들을 만나고 구호를 외치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마음을 공유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마음 한 쪽은 늘 쓸쓸했다.
집회를 같이 다니던 친구는 ‘여성으로서, 노동자로서 살기가 힘들어도, 언어가 통하고 함께 하는 공동체가 있으니 한국에서 사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계엄 사태를 알게 된) 순간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반은 농담 삼아 한 말이지만 그 애길 듣는 나는 슬펐다. 친구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사실상 쫓겨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회가 여성이며 노동자인, 소수자이고 약자인 우리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쫓겨나고 있는 것 아닌가. 윤석열의 계엄 선포는 국가폭력으로 이를 보여준 사례였다. 그런데, 계엄 선포 이전에도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혹은 내가 다니는 직장이나 학교와 같은 삶터에서 우리는 그러한 감각을 자주 느껴오지 않았나?
나의 삶이 삶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
다양한 방식으로 이 체제로부터, 권리로부터 쫓겨나는 이들이 있다. 계엄 이후 윤석열 담화에서 끊임없이 등장한 ‘국민 여러분’에 나의 존재가 포함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체제 안에서, 또는 정책이나 사회적 구조 안에서 나의 존재가 지워질 때 ‘여기에는 네 자리가 없다’라는 선고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충북 청주에서 살고 있다. 충북은 소위 ‘지방소멸’ 시대에 최대한 정주 인구를 늘리려 혈안이 되어있는 곳이다.(사실 서울경기권을 제외한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이 그러할 것이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나는 자주 ‘쫓겨난다’는 감각을 느끼는데, 지방정부는 한 명이라도 더 그곳에 살기를 원한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충북도의 각종 정책을 보면 답이 나온다. 충청북도는 민선8기 정책 등에서 ‘출산율 증가’를 중요 과제 중 하나로 발표하며, 청주 시내 곳곳에 “임신출산 가정을 국가유공자처럼 모시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지방소멸을 문제 삼으며 충북의 ‘먹거리 산업’이 되는 기업을 유치하려 규제를 풀고, 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국제학교를 신설하려고 하고 있다. ‘소멸’에 대비하는 충북도의 모든 정책은, 나와 같은 도민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닌 ‘인구’를 늘리기 위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희한한 건, 소수자와 약자의 삶에 대한 정책적 배제가 ‘자유’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네가 원하고 싶을 때 원하는 만큼만 ‘프리’하게 노동하고, 이 지역이 마음에 안 들면 떠나가고. 정상적인 가족을 구성하고 싶지 않으면 혼자 살 ‘자유’. 그 ‘자유’에 따라, 올해도 충북도에서는 20대 청년의 유출이 가장 컸다. 그 유출 인구 중 여성의 수는 남성의 두 배였다.
내 친구들 중 상당수도 충북을 떠났다. 대부분은 서울로 상경했다. 남아있는 친구들도, 그리고 나조차도 일자리 때문에 또는 학업 때문에 서울로 떠나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서울이 좋아서 떠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친구들 중 대부분은 서울의 높은 집값, 너무 높은 인구밀도 때문에 ‘여기서 살 수 있다면 (서울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나와 동료들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서 계속 살 자유를 누리고 싶다. 이곳에서 그냥 ‘사는’ 것뿐만 아니라, 평등하고 좀 더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들며 살고 싶다.
‘이곳’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을까 마음껏 말하고 공부하고 행동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하지만 “‘이곳’에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쉽게 드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고민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을 때, 고립되어있다고 느낄 때 더 그렇다. 거대한 구조적 차별 앞에 선 개인은 너무 나약하고, 그럴 때 구조는 더더욱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나는 늘 무력감과 동시에 무력감을 느끼는 나에 대한 분노를 느껴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을 때 ‘청주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걔네’를 만났다. ‘걔네’를 처음 만난 것은 2022년 ‘걔네’가 지방선거를 치르고 평가회를 하는 자리였다. 이 작은 동네에서 거대양당 체제에 수렴되지 않는 페미니즘 정치를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크게 감동을 받았다.
아직은 나를 ‘활동가’라고 정의하는 게 어색하지만,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은 위계 없이 평등하게 이야기하고 활동할 수 있는 광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걔네는 스스로 광장을 만든다. 그 광장은 자그마하다. 하지만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이 광장이 없었다면, 나의 문제의식을 구체화하기도, 그것을 실행에 옮길 생각도 쉽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역에서 이슈가 생길 때마다 집담회가 열렸고, 집담회가 끝나면 함께 할 행동이 기획됐다. 나 자신을 내보이고 목소리를 내는 작은 광장이었다. 이곳에서 서로를 통해 ‘이곳에서 살 힘’을 얻고, 여기서 살기 위한 투쟁을 할 수 있었다. 아직은 많은 것을 바꾸진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함께 목소리를 내며 내가 사는 이곳의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 거대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졌던 기후위기와, 기후위기를 초래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가 우리 지역의 문제로 이해되었고, 또 우리 지역의 문제가 거대한 체제의 문제와 맞닿아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체제의 문제가 나의 삶의 문제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지워지지 말고, 우리의 광장을 만들자
12‧3 계엄 선포 이후 지난 14일까지 전국적으로 매일 윤석열 탄핵 집회를 했고,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에도 계속 집회가 이어질 예정이다. 한편으로는 윤석열 퇴진에 집중해 여러 소수자의 목소리가 배제되기도 하지만, 또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의 집회 문화에 대한 문제 제기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계속 나오고 있다.
지금 이 광장에서, 우리의 삶과 노동을, 기후를, 페미니즘을 이어 목소리를 내자.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던 이들을 만나자. 탄핵 국면은 거대한 광장에서 빠르게 흘러가고 있지만, 우리의 삶을 연결하는 작은 목소리들은 조금씩, 지난한 과정을 통해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치지 말고 작은 우리의 공론장을, 일상의 광장을 계속해서 만들어가자.
[필자 소개] 정누리. ‘삶과 노동을 잇는 배움터 이짓’, ‘청주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걔네’에서 활동하고 있다. 공부와 활동을 병행하며 중심을 찾는 것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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