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의례적으로 “새해에는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건네게 된다. “건강하세요”라는 말은 ‘좋은’ 인사말로 여겨지기에, 편하게 꺼내는 말 중 하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왜 “건강하세요”일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 서로 그 말을 건네며 건강해야 한다는 압박을 나누고 있는 건 아닐까?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 사회
조한진희 다른몸들 대표는 “질병의 원인을 진단받기 어렵고, 그렇기에 치료법을 제시 받지 못하는 질병을 경험”한 후, “아픈 몸, 회복할 수 없는 몸으로 이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질병권’을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올림픽에 나가는 운동선수처럼 엄격한 투병 생활을 했지만 몸이 좋아지지 않는 일을 겪으며, 건강이 개인의 노력으로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배웠다. 이후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라는 말을 열심히 비판”하게 됐다고.
“건강을 잃어도 아무것도 잃지 않는 사회여야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게 만드는 사회다. 건강을 잃으면 빈곤한 삶을 경험하게 되는 이런 현실을 목도하면서, 우리 사회가 굉장히 ‘건강중심사회’라는 문제 의식, 그리고 한국 사회는 생산성이 높은 건강한 사람을 기준으로 설계된 사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또한 조한진희 대표는 “보수, 진보 상관없이 기존의 건강을 말해온 영역에선 아픈 몸을 임시적이고 예외적인 형태로 보고, 건강한 상태를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향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한 문제 의식이 적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사실 모두 알다시피 건강이라는 건, 빈곤의 문제, 계급의 문제 혹은 젠더의 문제 등 사회 구조적인 위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의 결과로서 건강이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건강이라는 것이 ‘내가 조심하면 혹은 내가 노력하면 쟁취할 수 있는 무언가’로 인식된다.”
질병권 운동은 그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가며 “잘 아플 권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아픈 몸이 노동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 수 있는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아파도 못 쉬는 이유 노동자의 잘 쉴 권리는 ‘일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문제
우리 사회에서 ‘아픈 몸’과 ‘노동’은 서로 잘 붙지 않는 말로 여겨진다. 많은 노동자들이 ‘아파도 쉴 수 없다’는 말을 달고 산다.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활동가는 30명 정도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인터뷰했을 때, “사실 인터뷰이 모두가 아픈 상태였다”고 밝혔다. “근골격계 질환, 만성피로나 우울, 불안장애, 수면장애도 있었고, 콜센터 노동자의 경우 방광염, 대리운전이나 배달 노동자는 도로 위에서의 사고들 그리고 온열질환 등 사례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쉬지 못하고 있었다. 왜 못 쉴까? 김혜진 활동가는 “대부분 생계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1순위는 ‘내가 아파서 빠지면 동료에게 일이 전가되기 때문’ 그리고 ‘회사로부터 받는 불이익이 두려워서’였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아파서 쉬게 되면, 회사 측에서 ‘너는 좀 아픈 사람이구나. 앞으로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사람이겠구나’ 판단해 해고되기 쉽고, 승진에도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강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복귀하는 대부분의 일터가 여전히 경쟁과 위험을 강요하는 곳이다. 일터 자체가 하나도 바뀌지 않는다면, 내가 잘 쉬고 돌아와도 또 아플 수밖에 없는 조건에 있는 거다. 결국 노동자가 잘 쉴 권리는 ‘일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문제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전한 일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일터에서의 휴게 시간은 어떻게 보장되고 있는가? 휴게 시간에 쉴 공간은 있는가? 그 공간은 어떠한가?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만성질환, 질병, 장애가 있으면 일 못하나요?
장애인 당사자이자, 장애인의 노동과 건강에 대해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는 문영민 연구자는 “장애인 노동자 중엔 가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야근하거나 무리해서 일을 많이 하는 사람, 그래서 결국 건강을 소진하는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장애인은 일할 수 없는 존재라는 편견이 강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장애인 노동자들이 많은 거다. 문영민 연구자는 “연구를 하면서, 일하며 더 아픈 몸이 되는 장애인들을 너무 많이 봤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 장애인 노동자들이 계속해서 노동을 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뭘까 고민했다는 문영민 연구자는 “아픈 노동자가 쉬어야 한다는 말은 당연히 맞지만, 그 ‘아프다’는 것조차 건강한 노동자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아파서 쉬어도 계속 아픈 사람, 평생 아플 수밖에 없는 장애인이나 만성질환자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일할 수 있는 제도’도 필요한 것 아닌가? 평생 아플 수밖에 없는 사람이 일할 수 있는 곳, 노동 시간과 노동 형태를 조정할 수 있는 그런 사업장을 만들어낼 변화가 필요하다.”
소리 활동가는 “국제 노동 기준에서 보면, ‘감염 여부가 채용이나 고용의 지속의 차별 근거가 되어선 안된다, 배제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선 여전히 감염인의 노동을 상상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HIV감염인도 공동 생활을 할 수 있고, 특히 미검출 단계일 경우 전파 위험도 없지만, HIV/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낙인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감염인이 일한다는 생각을 못한다는 것이다.
소리 활동가는 “노동 환경이 비의과학적인 정보에 기반해 감염인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게 아니라, 질병을 가진 사람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동 환경이야말로 모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라고 강조했다.
아프면 쉬고, 아파도 일할 수 있는!
김혜진 활동가는 “얼마 전에 청소노동자들의 이야기에 대한 인상적인 인터뷰를 읽었다.”며 그 내용을 소개했다.
“그들의 연령대가 높다 보니 아무래도 몸이 일하기 어려운 분들도 있다. 근데 일하는 방식이 무척 재미있다. 그 분들에게 ‘공평’이라는 개념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의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일을 같이 시작해서 같이 끝낼 수 있는 게 공평이다. 예를 들어, 청소해야 하는 건물이 a,b,c동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a동과 b동은 지금 더 일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이 한 명씩 담당하고, c동은 조금 더 나이가 있고 움직임에 어려움이 있는 두 사람이 담당하는 거다. 그러면 한 동을 다 하는 사람이 힘들지 않냐고 했더니, ‘무슨 소리냐. 그게 훨씬 더 빠르게 일할 수 있고. 같이 시작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일을 끝낼 수 있는데. 이게 공평하지.’라고 답했다는 거다. 서로를 돌보고 각자의 역량을 존중하는 업무 방식인 거다.”
김 활동가는 “결국 아픈 몸으로 노동할 권리가 보장되기 위해선, 함께 협동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서로 경쟁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업무를 나누고, 함께 발전해 나갈 수 있는지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질병권과 노동권, 어떻게 하면 잘 아플 수 있을까, 잘 쉬고 또 일할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는 쉽지 않다. 하지만 꼭 보장되어야 할 권리이기에, 이렇게 조금씩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건강 중심 사회’를 타파하고자 하는 질병권 운동의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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