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2024년 12월 7일 토요일, 처음으로 여의도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집회에 나갔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투표를 거부한 채 국회를 떠났고, “투표해!”를 외치면서 오후 2시에 시작했던 집회는 밤 10시까지 연장되었다. 거리에서 길고 긴 집회가 예견되었던 그날, 아직은 한국 사회에 다시금 몰려오는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어떤 모습을 띠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초유의 비상계엄 이후 대통령 탄핵이라는 거대한 국론 속에서 소수의 목소리가 묵살되지 않기를 바라며 긴장된 마음을 갖고 광장에 있었다. 그날의 자유 발언 중 〈페미당당〉 활동가의 한마디가 내 귀에 와서 박혔다.
“페미당당을 비롯한 소수자 단체들은 늘 여기 광장에서 여성, 페미니스트, 퀴어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대통령 탄핵을 외칠 것이며, 동시에 투쟁 현장에서의 소수자 혐오를 막을 것입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페미당당의 지난 8년이 궁금해져서 검색하던 중, 페미당당을 다룬 다큐멘터리 〈해일 앞에서〉를 발견했다. 이 영화는 안타깝게도 지금은 볼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럼에도 한때 광장에서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호명되었지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금방 잊힌 이야기를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시 한번 불러내고 싶었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도록 스크리너를 보내준 전성연 감독님에게 감사하다.
용감하고 유약한 Fearless and Vulnerable
〈해일 앞에서〉는 페미니스트 문화예술 활동 단체 페미당당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페미당당은 2016년부터 시작되었고, 이들은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박근혜 퇴진 행동-낙태죄 폐지 ‘검은시위’를 거치며 페미니스트 리부트 시기 동안 깊은 인상을 남긴 활동들을 펼쳐왔다. 친구들끼리 ‘페미니스트가 뽑을 정당이 없으니, 우리가 만들자’는 대화를 하다가 농담처럼 지은 이름인 ‘페미당당’은 작은 모임으로 시작해서 여러 집회와 퍼포먼스를 기획하는 활동력 있는 단체로 거듭났다.
이즈음 페미니즘에 막 발을 들인 20대 초반의 나에게는 ‘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확성기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당당하고 자유로운 이 여성들의 모습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페미당당의 이미지는 마치 영화 포스터의 한 장면처럼 퀴어퍼레이드 트럭 위에서 멋진 자세를 취하고 있는 히어로들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SNS를 통해서 보여주었던 페미당당의 당당한 모습을 살짝 우회하며 공동체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기 위해 페미당당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개개인의 모습에 주목한다.
네빌 모먼트, 용감한 우정
영화는 페미당당의 활동이 펼쳐지는 거리에서, 지난한 토론과 회의가 이어지는 어느 활동가의 거실로, 그리고 각각의 활동가들이 일상을 보내는 개인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페미당당은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하 모낙폐)의 일원으로 참여하며 경구용 임신중절 약 ‘미프진’을 알리는 퍼포먼스를 조직한다. 페미당당은 연대활동의 범위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운동의 방식과 방향성에 대해서 조직 내적과 외적으로 많은 토론이 필요했다. 회의를 하며 이들은 서로의 의견과 입장의 차이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 차이는 불화와 갈등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따르는 치열한 토론을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 한다. “우리가 친구로 시작했고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갈등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아.”라는 민아의 말처럼, 공통점을 찾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차이를 마주하는 과정은 어렵다.
그러면서 지안은 페미당당 활동을 하며 우리는 모두 ‘네빌 모먼트’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네빌 모먼트’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한 장면에서 나온 말인데, 네빌은 질 걸 뻔히 알면서도 해리와 헤르미온느, 론의 위험한 무단 외출을 막으려 한다. (결국 네빌은 헤르미온느의 주문에 마비가 된다.) 하지만 이후에 호그와트의 교장선생님인 덤블도어는 이런 네빌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며 “적에게 맞서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친구에게 맞서는 것은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긴다.
모든 활동가들은 자신 안의 질문을 가지고 페미당당이라는 깃발 아래 모여 있다. 〈해일 앞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나의 몸은 불법이 아니다’ 퍼포먼스 이후에 평가 회의를 하며 활동을 돌아보는 회의로 끝이 난다. 페미당당을 통해 우정을 나누고 활동해 왔던 이들은 각자의 버거웠던 속마음을 공유한다. 여전히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졸업과 그 이후의 진로를 위해서 더 이상 활동에만 매진할 수 없는 현실 위에서 이들은 잠정적인 휴식을 갖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멈춤’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는 치열한 우정이 있기에 가능했다.
다양한 몸의 연대
이 시대에 만연한 혐오와 차별은 나와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서로가 가진 차이가 공동체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불안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다양성의 민주주의는 건강한 차이를 드러낼 수 있어야 가능해진다. 그 차이를 토론하기 위해서는 이 다름이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해일 앞에서〉의 출연진들이 서로의 차이를 토론하는 장면들은 단단한 우정에 기반한다. 그 우정은 비단 시간으로 쌓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과 고민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서로에게 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연말과 새해를 광장에서 보내야 하는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이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시민들 덕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남태령에서, 국회 앞에서, 4호선 지하철 안에서 차이를 가진 존재들이 서로의 곁을 지키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다양한 몸들이 연대하는 용감한 우정의 경험은 우리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것이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소개] 2004년 설립된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통과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다양한 현장에서 미디어로 연대하며 다큐멘터리, 극영화, 웹 콘텐츠 등을 제작하고 있다. pink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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