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사태 이후, 사건을 조사 중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지난 3일 체포 영장을 집행하려다 경호처와 부딪혀 5시간만에 윤석열 대통령 체포를 포기하고 돌아갔다. 법치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상황에, 심지어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경호처를 앞세워 비겁하게 숨어있는 모습을 지켜본 많은 시민들은 분노와 울분을 터트렸다.
이에 X(구 트위터)에서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 투쟁이 필요할 때 민주노총을 늘 부르기만 했었는데, 이번엔 민주노총이 우리를 부른다. 함께하겠다.”고 응답했다. 많은 시민들이 한남동으로 달려갔고, 일명 ‘한남동 대첩’이라 불리는 이 투쟁은 눈오는 밤의 철야를 거쳐 3박 4일 동안 진행됐다.
국회 앞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한남동까지. 이 집회에 참여하면서, 이전과 달라진 광장의 모습과 광장 문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8년 전 박근혜 탄핵 이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사회의 모습, 자꾸 ‘나중에’로 밀려나는 이들의 절규를 접했던 시민들은 이번엔 달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탄핵 집회가 탄핵만 외치는 곳이 되어선 안 된다는 점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관련 기사: ‘남태령 대첩’ 이후, 여성과 소수자가 열어갈 세상 https://ildaro.com/10085)
전국 1,500여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모여 2024년 12월 11일부터 활동중인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에서 진행하는 집회에선 어느 순간부터 자유발언을 하는 시민들이 “투쟁”으로 시작과 마무리 인사를 하고, 자기 소개를 할 때 자신이 밝히고 싶은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국룰’(당연한 일, 나라 國과 룰 Rule을 합친 말)이 됐다.
누군가는 왜 페미니스트, 퀴어/성소수자, 노동자, 전세사기 피해자, 비건(Vegan) 등의 정체성을 굳이 이야기하느냐고 묻는다. 왜일까?
2024년 12월 7일 국회 앞, 윤석열 탄핵 표결을 앞둔 촛불집회에서 심미섭 페미당당 활동가가 발언 중에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했을 때, 야유를 보내거나 “끌어내려라” 소리 치는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X(구 트위터)에서 퍼졌던 영향도 있을 것 같다. 심미섭 활동가가 자신의 발언문을 공개했을 때, 많은 이들은 용기 있는 발언 덕분에 외롭지 않았고, ‘우리’가 여기에 있음이 드러날 수 있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발언에 대한 응원과 지지도 계속됐다.
사실 이런 정체성 소개가 페미니스트, 퀴어 커뮤니티에서는 꽤 일반적인 일이다. 딱딱하게 이름과 나이, 사는 곳이나 직업을 밝히는 ‘보통의’ 소개와 달리, 페미니스트나 퀴어가 모이는 자리에선 자신이 원하고, 밝히고 싶은 정체성을 이야기한다. 불리고 싶은 이름을 말하고, 공유하고 싶은 자신의 삶의 일부, 예를 들어 시스젠더 여성이고 여자친구와 살고 있다거나, 고양이와 함께 하는 비혼 여성이라거나, 혹은 가정폭력 생존자, 성폭력 생존자임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곳이 안전한 공간이라 믿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여기 있다는 걸 드러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도 여기 있다’고. 그러니까 모두에게 안전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고 말이다.
사실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마음일 것이다. 내 세계를 이제 당신에게 열 테니, 함께 우리의 세계를 더 넓혀가자고 손을 흔드는 것.
낯선 타인과 연결되고 연대하는 광장의 모습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에 가면, 집회의 다양성이 확실히 체감된다. 광장은 점점 더 크게, 서로를 연결하며 뻗어나가고 있다. 농민들과 함께한 다양한 정체성의 시민들이 있었고, 민주노총의 부름에 응답한 다양한 정체성의 시민들이 있었다. 지난 4일, 서울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진행된 집회에선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 퀴어- 네트워크’를 비롯한 여러 시민단체가 ‘트랜스존’ 만들기에 나섰다. 광장에 트랜스젠더 차별과 혐오가 침투하지 못하게, 트랜스젠더와의 연대를 확실히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3일, 서울 한남동 관저 앞에서 민주노총이 진행한 집회 중 경찰이 조합원 두 명을 연행하여 은평경찰서로 이동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도 시민들은 달려갔다. 경찰의 부당한 연행에 항의하기 위해 다수의 은평구민들이 경찰서를 방문해 민원을 제출했다. 이후 4일, 석방된 학교비정규직 노동자 조합원은 집회에 나와 “슬리퍼를 신고 쫓아온 시민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대한민국은 이제 앞길이 훤하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집회에서 계속되고 있는 시민들의 발언들 또한 정말 다채로웠다. 누군가는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걸 밝히면서 그렇기에 더 소수자와 연대하겠다고 약속하고, 누군가는 가난해서 이 집회조차 올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2030 남성들의 고백과 반성, 사과의 목소리도 있었고, 서울과 달리 아직 느리게 변화하는 지방에서 계속 광장 만들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포부의 목소리도 있었다. 정체성을 밝힌 이도 있고, 익명으로 남은 이도 있었다. 다 ‘우리’들의 광장에 있었다.
“게으르지 않게 변화를”
이런 광장의 변화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들도 물론 있다. 다양한 이야기의 등장이 하나의 목소리로 연결되지 못할 것을 우려하는 이도 있고, 자신에게 낯설다고 생각되는 이들의 이야기에 불편함을 드러내는 이도 있다.
하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많은 시민들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을 광장으로 모여들고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때,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를 앞당길 수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부족하더라도 꾸준하게 그리고 게으르지 않게 변화하는 이들이 우리 곁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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