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만든 광장, 배제하지 않고 연결되어

윤석열 탄핵‧체포 요구를 넘어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다

박주연 | 기사입력 2025/01/09 [18:46]

우리가 함께 만든 광장, 배제하지 않고 연결되어

윤석열 탄핵‧체포 요구를 넘어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다

박주연 | 입력 : 2025/01/09 [18:46]

12.3 내란사태 이후, 사건을 조사 중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지난 3일 체포 영장을 집행하려다 경호처와 부딪혀 5시간만에 윤석열 대통령 체포를 포기하고 돌아갔다. 법치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상황에, 심지어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경호처를 앞세워 비겁하게 숨어있는 모습을 지켜본 많은 시민들은 분노와 울분을 터트렸다.

 

▲ 1월 3일, 공수처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집행하려다 경호처에 막혀 5시간만에 돌아가는 과정이 생중계되었다. 분노한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윤석열 체포!’를 외쳤다. 사진은 체포영장 시한이 만료되는 날인 1월 6일 열린 집회에서. ©일다


이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이 깃발을 올렸다. SNS를 통해 “내란수괴는 오늘 체포영장 집행을 거부하며 다시 한번 법질서와 민주주의를 훼손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직접 그를 끌어내 심판해야 합니다. 민주노총은 한남동으로 향합니다. 굳게 닫힌 관저의 문, 민주주의의 문을 열겠습니다.”라고 공표했다. 민주노총 측은 먼저 한남동 관저 앞에 모여 “곧 응원봉을 들고 달려와 줄 우리의 ‘동지’들을 기다리고 있겠다.”라고 덧붙였다.

 

이에 X(구 트위터)에서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 투쟁이 필요할 때 민주노총을 늘 부르기만 했었는데, 이번엔 민주노총이 우리를 부른다. 함께하겠다.”고 응답했다. 많은 시민들이 한남동으로 달려갔고, 일명 ‘한남동 대첩’이라 불리는 이 투쟁은 눈오는 밤의 철야를 거쳐 3박 4일 동안 진행됐다.

 

국회 앞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한남동까지. 이 집회에 참여하면서, 이전과 달라진 광장의 모습과 광장 문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8년 전 박근혜 탄핵 이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사회의 모습, 자꾸 ‘나중에’로 밀려나는 이들의 절규를 접했던 시민들은 이번엔 달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탄핵 집회가 탄핵만 외치는 곳이 되어선 안 된다는 점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관련 기사: ‘남태령 대첩’ 이후, 여성과 소수자가 열어갈 세상 https://ildaro.com/10085)

 

▲ 2024년 12월 25일, 서울 명동성당 사거리에서 시작된 “All I want for Christmas is 윤석열 퇴진! - 윤석열 퇴진하고 평등세상으로” 집회의 참가자들은 이후 헌법재판소까지 행진했다. 크리스마스 당일임에도 많은 이들이 집회와 행진 행렬에 참여했다. ©일다


광장에서 자기 소개하기

 

전국 1,500여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모여 2024년 12월 11일부터 활동중인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에서 진행하는 집회에선 어느 순간부터 자유발언을 하는 시민들이 “투쟁”으로 시작과 마무리 인사를 하고, 자기 소개를 할 때 자신이 밝히고 싶은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국룰’(당연한 일, 나라 國과 룰 Rule을 합친 말)이 됐다.

 

누군가는 왜 페미니스트, 퀴어/성소수자, 노동자, 전세사기 피해자, 비건(Vegan) 등의 정체성을 굳이 이야기하느냐고 묻는다. 왜일까?

 

2024년 12월 7일 국회 앞, 윤석열 탄핵 표결을 앞둔 촛불집회에서 심미섭 페미당당 활동가가 발언 중에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했을 때, 야유를 보내거나 “끌어내려라” 소리 치는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X(구 트위터)에서 퍼졌던 영향도 있을 것 같다. 심미섭 활동가가 자신의 발언문을 공개했을 때, 많은 이들은 용기 있는 발언 덕분에 외롭지 않았고, ‘우리’가 여기에 있음이 드러날 수 있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발언에 대한 응원과 지지도 계속됐다.

 

사실 이런 정체성 소개가 페미니스트, 퀴어 커뮤니티에서는 꽤 일반적인 일이다. 딱딱하게 이름과 나이, 사는 곳이나 직업을 밝히는 ‘보통의’ 소개와 달리, 페미니스트나 퀴어가 모이는 자리에선 자신이 원하고, 밝히고 싶은 정체성을 이야기한다. 불리고 싶은 이름을 말하고, 공유하고 싶은 자신의 삶의 일부, 예를 들어 시스젠더 여성이고 여자친구와 살고 있다거나, 고양이와 함께 하는 비혼 여성이라거나, 혹은 가정폭력 생존자, 성폭력 생존자임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곳이 안전한 공간이라 믿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여기 있다는 걸 드러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도 여기 있다’고. 그러니까 모두에게 안전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고 말이다.

 

▲ 1월 4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5차 시민대행진이 열리는 집회 공간으로 들어오고 있는 무지개 깃발과 트랜스젠더 깃발들. ©일다


퀴어들 특히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건, 트랜스차별적인 사회에서 단지 용기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다. 타인이 자신의 성별을 잘못 인식하거나, 성별 인칭대명사를 잘못 부르는 등의 일이 반복됐을 때,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삶을 부정 당하는 경험하고 매번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폭력적인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체성을 밝히는 건, 사실 비퀴어/시스젠더에게 건네는 배려이기도 하다. 성별을 잘못 부르거나 잘못 인식하지 않도록, 실수하지 않도록 미리 알려 주는 것이며, 이는 자신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는 환대의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마음일 것이다. 내 세계를 이제 당신에게 열 테니, 함께 우리의 세계를 더 넓혀가자고 손을 흔드는 것.

 

낯선 타인과 연결되고 연대하는 광장의 모습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에 가면, 집회의 다양성이 확실히 체감된다. 광장은 점점 더 크게, 서로를 연결하며 뻗어나가고 있다. 농민들과 함께한 다양한 정체성의 시민들이 있었고, 민주노총의 부름에 응답한 다양한 정체성의 시민들이 있었다. 지난 4일, 서울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진행된 집회에선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 퀴어- 네트워크’를 비롯한 여러 시민단체가 ‘트랜스존’ 만들기에 나섰다. 광장에 트랜스젠더 차별과 혐오가 침투하지 못하게, 트랜스젠더와의 연대를 확실히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3일, 서울 한남동 관저 앞에서 민주노총이 진행한 집회 중 경찰이 조합원 두 명을 연행하여 은평경찰서로 이동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도 시민들은 달려갔다. 경찰의 부당한 연행에 항의하기 위해 다수의 은평구민들이 경찰서를 방문해 민원을 제출했다. 이후 4일, 석방된 학교비정규직 노동자 조합원은 집회에 나와 “슬리퍼를 신고 쫓아온 시민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대한민국은 이제 앞길이 훤하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 서울 한남동 탄핵 촉구 집회가 열린 공간 바로 옆에 있던 꼰벤뚜알프란체스코수도원 내 안내 문구. ©일다


3박 4일의 ‘한남동 대첩’에선 꼰벤뚜알프란체스코수도원이 시민들에게 공간을 연 일도 있었다. 무서운 추위 속에서 밤새 투쟁을 이어가는 시민들에게 쉴 공간을 내어주고, 화장실도 쓸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수도원은 집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시민들이 보낸 여러 지원 물품들을 보관하고 그것을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공간, 음식을 먹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성중립화장실이 마련되기도 했고, 비건(Vegan)인 사람들을 위해 감자스프 또한 제공됐다.

 

집회에서 계속되고 있는 시민들의 발언들 또한 정말 다채로웠다. 누군가는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걸 밝히면서 그렇기에 더 소수자와 연대하겠다고 약속하고, 누군가는 가난해서 이 집회조차 올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2030 남성들의 고백과 반성, 사과의 목소리도 있었고, 서울과 달리 아직 느리게 변화하는 지방에서 계속 광장 만들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포부의 목소리도 있었다. 정체성을 밝힌 이도 있고, 익명으로 남은 이도 있었다. 다 ‘우리’들의 광장에 있었다.

 

“게으르지 않게 변화를”

 

이런 광장의 변화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들도 물론 있다. 다양한 이야기의 등장이 하나의 목소리로 연결되지 못할 것을 우려하는 이도 있고, 자신에게 낯설다고 생각되는 이들의 이야기에 불편함을 드러내는 이도 있다.

 

하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많은 시민들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을 광장으로 모여들고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때,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를 앞당길 수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 2024년 12월 25일, 서울 명동성당 사거리에서 시작된 “All I want for Christmas is 윤석열 퇴진! - 윤석열 퇴진하고 평등세상으로” 집회에 등장한 피켓. ©일다


‘남태령 대첩’ 이후 한남동 집회 무대에 오른 권혁주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농민, 전농과 전여농에 대한 여러분들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우리 농민들은 고령입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 할머니·할아버지 세대입니다. 상대적으로 변화에 둔갑합니다. 연대가 무슨 말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밥 한끼 나눌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은 있습니다. 그것이 연대의 원천 아니겠습니까? 부족하더라도 꾸준하게 그리고 게으르지 않게 변화하겠습니다. 우리 노동자, 농민 그리고 모두 함께 윤석열 정권 끝장내고 새로운 세상 만듭시다. 고맙습니다. 투쟁!”

 

부족하더라도 꾸준하게 그리고 게으르지 않게 변화하는 이들이 우리 곁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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