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인권, 빼앗긴 다음에는 돌이킬 수 없는

[그림책 펼치는 마음] 건축물의 기억

안지혜 | 기사입력 2025/02/01 [21:39]

민주인권, 빼앗긴 다음에는 돌이킬 수 없는

[그림책 펼치는 마음] 건축물의 기억

안지혜 | 입력 : 2025/02/01 [21:39]

그림책 『건축물의 기억』의 첫 장면은 새벽 5시 23분, 서울 지하철 1호선 남영역의 텅 빈 승강장이다. 다음 장으로 넘기면 한 건물의 외관을 여러 각도에서 보게 된다.

 

“그곳은 ‘국제해양연구소’로 불렸다. 검은 벽돌, 육중한 철문, 좁고 긴 창문들. 그리고 숨겨진 뒷문.”

 

남영역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다. 독자는 그림이 이끄는 대로 시선을 움직이면서, 대공분실 안으로 따라 들어간다. 철문과 마당을 지나, 우뚝 선 7층 건물 앞에 서게 되고, 옆을 끼고 돌면 보이는 건물 뒤, 쪽문에 다다른다.

“다 국가를 위한 일이야.”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가 치료를 해야 해.”

 

▲ 『건축물의 기억』(최경식·오소리·홍지혜 지음, 2024, 사계절)은 1976년부터 2005년까지 국가폭력이 자행된 ‘남영동 대공분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이다.


이 책은 국가폭력 현장이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장을 넘길수록, 독자는 건물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서게 되고 나선형 계단을 올라 취조실에 이른다. 그즈음, 흑백톤 연필 그림으로 촘촘하게 묘사하던 것과는 다른 그림체가 섞여 들어온다. 추상적인 이미지, 질감이 느껴질 만큼 거친 붓질과 선, 강렬한 색감 대비는 어딘지 불안하고 섬뜩하다. 무언가를 부수고 깨트리고 억압하는 장면들 사이로 인간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확성기, 망치, 새장, 강렬한 빛을 쏘는 전조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책장을 더 넘기다 보면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좁고 가파른 나선 계단을 올라갔다. 긴 복도를 지나고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풀렸다. 변기와 세면대, 욕조가 딸린 기이한 방, 수사관들의 첫인사는 구타였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기억

 

『건축물의 기억』은 실화를 바탕에 둔 그림책으로, 세 명의 작가가 함께 만들었다. 최경식 작가는 건축물의 시선을, 오소리 작가는 가해자 역을, 홍지혜 작가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런 독특한 구성 덕분에 독자는 오늘의 남영역에서 과거의 대공분실로 따라 들어가며 세 가지 시선을 마주한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았”던 건축물에 새겨진 기억부터, “이건 예술과 비슷”하다고 말했던 고문기술자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말했던 가해자를 목격하면서도 “그 방의 그림자. 햇빛이 비쳐 들던 각도. 수사관들의 얼굴과 그들이 찬 손목시계의 시간”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피해자의 고통과 저항을 만날 수 있다.

 

▲ 그림책 『건축물의 기억』은 세 명의 작가가 함께 만들었다. 최경식 작가는 건축물, 오소리 작가는 가해자, 홍지혜 작가는 피해자의 시선을 담았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부터 2005년까지 국가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납치, 감금당한 장소다. 리영희, 김근태를 비롯한 이들이 이곳에서 고초를 겪었고 박종철 열사가 희생된 곳이다. 밝혀진 것만 최소 384명 이상이 이곳에서 피해를 입었다. 피해자는 대학생부터 학자와 운동가, 노동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모두 간첩이라거나 배후가 있는 것처럼 거짓진술서를 쓰게 되곤 했다. 고문기술자들은 수일에서 수십 일 동안 잠을 못 자게 괴롭혔고, 전기고문, 물고문 등 입에 담기에도 끔찍한 폭력을 가했다.

 

이 장소는 다른 건물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뒷문을 열고 들어가면 좁고 가파른 철제 원형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은 다른 층으로는 갈 수 없고 곧장 5층으로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조사받았던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눈이 가려진 채 고문기술자들에 의해 가파르게 회전하는 원형 계단을 오르다 보면 방향 감각을 잃게 되어서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였다고 한다.

 

5층에는 열여덟 개의 방이 있었다. 기계실 등을 제외하면 모두 고문실이다. 똑같이 생긴 각 방의 문은 복도 양쪽을 따라 서로 엇갈리게 배치돼 있었다. 문이 열려도 안에 있는 이가 다른 방을 볼 수 없도록 설계한 것이다. 5층 방들에는 다른 층과 달리 창문 폭이 1/8 정도로 아주 좁고 가늘다. 최소한의 환기만을 위한 틈을 두되 바깥에서 안을 보지 못하게 하면서, 피해자들이 뛰어내리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벽면에는 목재 타공판이 붙어 있다. 천장에 달린 흡음판과 두툼한 벽체가 소리가 외부로 나가는 걸 차단하지만, 비명소리 같은 고음은 옆방으로 더 기괴하고 음산하게 새어나가는 효과를 두기 위함이다. 이 건물은 천재라고 불렸던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했다.

 

세 작가가 각각 건축물, 가해자, 피해자의 시선 그려

 

현재 이곳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운영을 맡아서, 올해 6월 ‘민주화운동기기념관’으로 문을 열기 위해 준비 중이다. 그 작업 중 하나로 “민주인권그림책” 발간 사업을 펼쳤고, 『건축물의 기억』은 그 시리즈 8권 중 한 권이다. 민주인권그림책 시리즈는 열세 명의 작가와 여러 그림책 전문가, 편집자, 디자이너가 차별과 불평등, 혐오, 이주노동, 성역할, 동물권 등을 주제로 2022년부터 3년 가까이 공을 들여 만들었다.

 

이 프로젝트의 총감독은 『나무도장』, 『꽃할머니』, 『식스틴』 등으로 평화에 대한 그림책을 만들어 온 권윤덕 작가가 맡았다. 『건축물의 기억』을 최경식, 오소리, 홍지혜 작가에게 제안한 이도 권윤덕 작가다.

 

▲ 『건축물의 기억』(사계절, 2024)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기획한 “민주인권그림책” 시리즈 8권 중 하나다. 표지는 최경식 작가의 건물 그림, 오소리 작가의 색감, 홍지혜 작가의 하늘 풍경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이 작가들은 모두 남영동 대공분실 외관을 처음 봤을 때 미적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검은빛 외벽과 주홍빛 내벽, 전체 비례를 살리면서도 무늬처럼 가늘고 길게 나 있는 5층 창문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서 설계된 이유와 쓰임을 알게 될수록 그 섬뜩함과 기괴함에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고.

 

최경식 작가는 흑백 연필선을 여리고 섬세하게 쌓아서 그 공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집중했다. 독자들은 투시가 살아있는 건축물의 형태와 연필 선으로 쌓은 입체감을 통해, 건물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감정을 느끼며 책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 안에서 흐르는 시간의 변화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강렬한 색감 대비와 구부러지고 휘어진 선들이 한데 엉킨 터치로 가해자를 그린 오소리 작가는 그들의 얼굴을 망치 같은 도구로 표현하기도 했다. 고문을 가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읽은 뒤, 그들이 스스로를 도구화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질문이 들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작가가 폭력의 행위를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하지는 않으려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홍지혜 작가는 피해자가 당한 폭력과 고립, 단절과 슬픔을 여러 기법을 꼴라쥬하듯 담아냈다. 감시 카메라, 손잡이, 칠성판, 형광등과 백열등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렸다. 멍든 마음과 바늘에 찔리는 고통, 온 신경이 감전되는 아픔은 푸르스름한 빛깔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은유, 상징의 요소를 담으면서도 독자들이 이 모습을 피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도록, 작가가 오래 고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책의 표지에는 세 작가의 그림이 다 들어가 있다. 최경식 작가의 건물 그림, 오소리 작가의 색감, 홍지혜 작가의 하늘 풍경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건축물의 기억』은 굳이 교훈을 주려고 하거나 비현실적인 결말로 이끌지 않고, 섬세한 시선과 깊은 성찰로 담담하게 오늘을, 과거를, 그리고 미래를 담아내고 있기에, 이 끔찍하고 비극적인 이야기에서 슬픔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가 나뿐은 아닐 것이다,

 

▲ 최경식·오소리·홍지혜 작가들이 함께 만든 그림책 『건축물의 기억』 중에서.


‘민주인권’이 일상에 깃들어 있는가?

 

민주인권그림책 시리즈는 ‘민주인권이 일상에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기획된 것이라 한다. 이 시리즈를 만든 실행팀은 작가들에게 ‘민주인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은 바 있다. 최경식 작가는 어릴 적 동네에 늘 최루탄이 터지고, 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민들을 보며 자란 경험을 회상하며, ‘민주인권이라는 것은 뺏기지 않았을 때는 생각조차 안 나는 것이지만, 폭력을 당하고 빼앗긴 다음에는 돌이키기 어렵다. 그러니까 더욱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홍지혜 작가는 ‘일상 가운데서 계속 생각해야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고 했고, 오소리 작가는 ‘생존’을 위한 서로의 약속이라고 답했다. 어느 시대이든 서로 해치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필수 약속이 있었고, 이 약속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약속이자 미래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에 꼭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두 달 전 겪은 충격적인 계엄 사태와 그 이후 지속되고 있는 내란 사태,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의원이 과반을 차지하는 여당, ‘백골단’을 자처하는 단체의 국회 기자회견을 주선한 여당 정치인, 서부지방법원에 난입해 폭동을 일으키며 사법권의 무시하는 극우세력의 가시화된 모습 등을 보며 ‘민주인권’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긴다.

 

[필자 소개] 안지혜. 날마다 그림책을 읽는 사람.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을 썼고 여러 권의 그림책을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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