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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시대, 가장 주목받는 에코페미니즘 사상가이자 생태문학-기후SF 비평가인 그레타 가드의 저서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이 출간되었다. 에코페미니즘의 최신 이론들과 새로운 상상력을 담은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의 세계를, 이 책의 공동번역자인 여성환경연대 부설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 연구원들이 안내한다. [편집자 주]
제주도의 작은 미술관에 간 적이 있다. 한 가족이 몇 대에 걸쳐 살던 작은 집을 기증받아 설립된 곳이었고, 이 지역과 관련된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 그 중 한 작품이 매우 인상 깊었다. 작물이 없는 쓸쓸한 밭 한쪽에 자리잡은 바위를 찍은 사진으로, 제목은 ‘바위는 보았다’였던 것 같다. 사진 속 장소에는 원래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4‧3 항쟁 때 완전히 불타 없어졌고 지금은 밭으로 변했다. 마을이 사라지자 그곳의 역사도 잊혀졌다. 하지만 이 마을이 생겨나기 전 제주의 화산 폭발 때부터 4‧3 항쟁을 거쳐 현재까지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바위는 그 곳에서 일어난 몇만 년의 역사를 겪었다. 4‧3 항쟁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지낸 70여 년의 세월이 지났고, 이제 마을의 후손들은 마을의 역사와 이야기를, 그들의 억울한 죽음과 상실을 증언해 줄 존재가 이 바위밖에 없다고 느꼈다고 한다.
바위가 역사를 기억하고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가? 인간만큼 지능이 높지 않은 생물은 인지능력과 함께 도덕성도 부재하다고 여기는 현대 사회에서 생물도 아닌 무생물 바위가 어떻게 부당한 역사를 증언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물론 이들이 바위가 인간과 똑같은 방식으로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아니고, 바위가 인간보다 윤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 맥락에서 바위는 상징적인 존재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이 사진에 공감하듯이, 우리는 바위와 같은 비인간 존재들이 아무런 생동성이나 힘이 없는 물체라고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실제로 바위가 모든 것을 보았다는 것을 안다.
기후위기 시대, 인간-비인간의 연결성, 상호성, 호혜성 재건해야
생태문학 비평가이자 환경운동가이며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리버폴스 캠퍼스의 영문학과 교수인 그레타 가드(Greta Gaard)는 그의 저서 『비판적 에코페미니즘』(Critical Ecofeminism)에서 우리는 인간-비인간의 연결성, 상호성, 호혜성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재의 기후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자연의 행위자성을 무시하고 인간을 모든 지구타자들(가드가 모든 비인간 존재들을 지칭하는 용어)보다 우월한 존재로 여기는 근대 인본주의 사상에 있다고 본다. 근대 유럽 식민주의의 영향으로 현재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회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하고 인간만이 특정한 능력을 가진다고 믿는다. 그러한 능력은 언어, 법과 정치, 윤리/도덕, 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 도구 사용과 개발, 이성적 판단 등인데, 따라서 인간이 비인간 존재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간은 지구에서 행위자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라고 주장한다.
인본주의 사상에서 행위자성이란, 사회구조 대 개인의 이분법적 틀에서 개인이 가지는 주체성을 의미한다. 개인은 이성적, 지성적이고, 다른 존재들로부터 분리된 온전한 하나의 개체이며, 사회구조 속에서 기계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에 따라 행동하고 이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로서 행위자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행위자성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인간만이 행위자성을 가지고, 비인간 존재들은 행위가 일어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수동적 사물(객체/대상)밖에는 되지 못한다. 따라서 자연은 주체인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도구로 여겨지게 된다.
인간의 행위자성은 비인간의 행위자성 없이 발휘될 수 없어
그레타 가드와 같은 최근의 에코페미니스트들은 비인간 존재의 행위자성을 인정하는 포스트휴머니즘, 신유물론 페미니즘 이론을 받아들여 인간을 넘어선 생태윤리 및 생태정치 이론을 주장한다. 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지구의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로부터 경계 지어진 신체를 가진, 이미 육체적으로 완성된 개체가 아니라, 얽힌 내부적 관계맺음의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변화하는 존재들이다.
달의 주기가 인간의 수면 및 생리주기와 임신 가능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됐듯이, 인간은 비인간 존재들과 함께 지구 생태환경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해왔다. 모든 지구 생물은 사는 동안 서식지인 육지와 바다를 변형시키면서 다른 생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죽어서는 흙, 물, 기체 등 무생물이 되어 살아있는 생물의 몸을 끊임없이 관통하며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생물종은 몸 안에 균과 같은 미생물, 즉 다른 생물종이 서식하기에 생존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인간이 자신의 몸을 침투하려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 이 바이러스와 인간의 몸이 만나 얽히면서 서로를 변형시키며 공존해 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은 서로에게서 뚜렷하게 구분될 수 없고, 서로의 행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구의 모든 존재들은 이종적(inter-species), 다종적(multi-species), 횡단종적(trans-species)이기에, 인간의 행위자성은 비인간의 행위자성이 없이는 발휘되지 못한다.
그레타 가드는 서구 유럽과 달리 아시아와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를 비롯한 여러 비서구 사회에서는 인류와 자연이 친족중심적으로 관계맺고 있다고 설명하는 비서구 학자들의 연구를 소개한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고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지배, 착취하도록 하는 서구의 근대주의적 존재론과 달리, 비서구 문화는 여러 인간 및 비인간 존재들이 공통 조상에서 기원하는 생태적 확대가족으로서 서로 친족 관계로 맺어져 있다고 믿는 ‘친족중심적’ 존재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생명은 주변의 다른 생명체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주체-객체, 지배자-피지배자의 관계가 아닌 다종 간의 공생 관계를 이루며 살아간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회에서 비인간 자연은 목소리와 생동성, 변화를 일으키는 힘, 그리고 역사를 지닌 행위자들이다.
우리가 지구타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그들이 지속적으로 발산하는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불신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라고 가드는 말한다.
그는 나무와 바위의 생동성을 목격하고 이들과 소통한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가드는 대학원생 시절 날마다 달리기를 하던 숲에 책을 읽으러 갔는데 한 나무가 자신에게 이미지로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 메시지에 순응하면서 따라가자 나무가 묘사한 것과 똑같은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 너무 놀라 나무의 대화 능력을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자마자 나무는 소통을 멈춰버렸다.
바위가 가드에게 자신을 보여준 경우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강둑에 앉아 흐르는 강물과 바위를 바라보고 있는 가드에게 바위는 용암으로, 얼음으로 변하면서 흘러가더니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 바위의 역사와 이야기를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가드는 인간 너머 세상(more-than-human worlds)의 행위자성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가드는 기후 위기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종의 얽힘을 통한 돌봄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지구타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할 것을 강조한다. 지구타자들은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를 생물종의 쇠퇴와 죽음, 생물종 대멸종 등 여러 방식으로 알리고 있지만, 우리 인간은 이를 경청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경청’은 사회적 권력을 갖지 못한 자가 지배자의 말을 들어야만 할 때 발생하는 것일 수 있기에, ‘발화’에 비해 수동적인 행위이며 불평등한 사회적 위치를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인본주의적 사회에서 자연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백인이 유색인종에게, 이성애자가 성소수자에게, 남성이 여성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과 같이 오히려 불평등에 맞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운동의 방법론이다. 경청은 단지 듣는 행위만이 아니라, 배제당하고 억압당하는 존재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상호협력의 기반을 다지는 과정이다.
가드는 경청이 가능하려면 특권자들이 자신의 삶 속의 특권과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특권자의 입장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태도가 아니라, 특권을 내려놓고 동등한 행위자로서 지구타자들과의 친족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 그 자체가 경청이다.
기후 위기의 시대에 비인간 존재들은—바위와 나무와 소는—기후 위기를 나타내는 지표를 통해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경청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지구의 모든 존재들이 협력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자.
[필자 소개] 노고운.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UC Davis)에서 인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전남대학교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다종민족지, 포스트휴머니즘, 에코페미니즘 이론을 중심으로 생태 및 환경 문제를 연구한다. 주요 연구 주제는 근대 국가의 비인간 생물 관리 정책과 생명 정치, 생태계 교란종과 생태민족주의, 감염병 바이러스와 인종, 젠더와 섹슈얼리티, 그리고 생물종에 기반한 차별의 교차성, 산호와 해조류와 바위를 중심으로 한 다종의 연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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