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가 아니라 ‘소젖’이라 부를 때

그레타 가드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의 세계➁ 소젖은 누구의 것

이윤숙 | 기사입력 2025/02/19 [10:08]

‘우유’가 아니라 ‘소젖’이라 부를 때

그레타 가드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의 세계➁ 소젖은 누구의 것

이윤숙 | 입력 : 2025/02/19 [10:08]

-기후위기 시대, 가장 주목받는 에코페미니즘 사상가이자 생태문학-기후SF 비평가인 그레타 가드의 저서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이 출간되었다. 에코페미니즘의 최신 이론들과 새로운 상상력을 담은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의 세계를, 이 책의 공동번역자인 여성환경연대 부설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 연구원들이 안내한다. [편집자 주]

 

매일 먹고 있는 ‘우유’는 어디에서 어떻게 왔나

 

우리는 매일 알게 모르게 특정 동물의 젖을 먹는다. 아침에 일어나 바나나를 갈아넣거나 미숫가루를 탄 우유 한 잔과 버터와 우유가 들어간 빵 조각으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일터에 가서 라떼 한 잔으로 일을 시작하곤 한다. 일과 중 간식으로 요거트를 마시고, 역시 치즈나 버터가 듬뿍 들어가 과자와 빵,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점심과 저녁 식사 중 먹은 요리에도 수많은 우유 가공식품이 쓰인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매일의 일상에서 우유와 여러 유제품을 수많은 종류의 가공식품의 형태로 소비한다. 한마디로 우유가 없는 일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정작 우유가 도대체 어디에서 왔고 어떤 과정을 통해 인간들에게 소비되고 있는지 알거나 상상하기는 더 힘들다.

 

▲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매일 소젖을 먹는다. 우유, 유제품, 치즈, 버터가 들어간 빵 등 수많은 가공식품의 형태로 소비한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우유(牛乳)’, 순우리말로 쓰면 소젖이다. 영어로는 밀크(Milk)인데, 모든 포유류의 젖을 포괄하여 지칭한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 먹는 것은 대부분 ‘소의 젖’이므로 우리 일상에서 접하는 밀크는 대부분의 경우 ‘우유’이다. 그런데 우유라고 부를 때와 ‘소젖’이라 부를 때 그 어감의 차이는 매우 크다. 사실 ‘우유’라는 말을 순수 우리말로 바꾼 것뿐인데, 왜 그렇게 큰 차이가 나는 걸까. 노골적으로 ‘소의 젖’으로 불리는 순간, ‘깨끗하고 순수한 완전식품 = 우유’라는 이미지가 순식간에 깨지고 만다. 인간이 소라는 동물의 젖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환기되는 순간, 완전무결함의 이미지가 사라지고 왠지 모를 불쾌감과 위화감이 생긴다.

 

실제 EBS 다큐 〈하나뿐인 지구〉(“우유, 소젖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2014년 1월 17일 방송)에서 길거리 청년들을 대상으로 우유를 소젖으로 부를 때 드는 생각을 물었더니 “거부감 든다”, “이상하다”, “비위생적이다”, “퇴화하는 느낌이다”라고 답했고 심지어 “야만적이다”라고까지 말했다. 매일 소젖을 완전식품이라 여기며 먹고 있는데, 소젖을 소젖이라 부르는 순간 비문명인의 지위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면서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어미젖소와 그 젖을 먹는 송아지라는 존재가 환기되고 만다. 그리고 묻게 된다. “짐승인 송아지를 위한 젖을 왜 문명인인 우리가 먹는 것인가”라고.

 

에코페미니스트 캐럴 J. 아담스가 『육식의 성정치』(The Sexual Politics of Meat)에서 육식과 젠더 억압의 연관을 밝히면서, 이처럼 명백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드는 대상, 다른 존재와의 관계와 연결고리가 부정되는 대상을 ‘부재 지시 대상’(absent referent)이라고 칭했다. 우리가 ‘고기’로 부를 때 살아있는 동물들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유’라 부를 때 젖소와 송아지의 존재는 가려진다.

 

그래서 그레타 가드의 『비판적 에코페미니즘』 3장 ‘Milk’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다른 동물의 젖이 아닌 경우 전부 ‘소젖’으로 번역했다.(이 글에서는 상품화된 소젖이라는 뜻에서 종종 ‘우유’라고 혼용해 쓰기로 한다.) 우리가 우유를 ‘소젖’이라 부르고 ‘젖소’라는 살아있는 동물들의 삶에 다가가 그들 존재들과의 얽힘을 세밀히 보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게 될까, 그레타 가드는 3장 ‘밀크’를 통해 우리들을 그 존재들과의 관계 속으로 정성스레 안내한다.

 

‘우유는 완전식품’이라는 신화와 전혀 다른 현실

 

성장기 어린이들에게 우유는 급식 필수식품으로 여겨져 왔고 더불어 ‘완전식품’으로 교육, 홍보되어 왔다. 우유를 완전식품으로서 자연적이고 건강에 좋은 것으로 마케팅해온 것에는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작용한다.

 

인간이 소젖을 먹게 된 것은 약 1만년 전, 가축을 길들이기 시작한 농업혁명 시기로 추정된다. B.C. 3000년 이전에 기록된 성경에도 가나안 지역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표현하며 소젖이 빈번하게 언급되었고, B.C. 600년경 인도의 베다 경전에도 석가모니가 고행 후 소젖과 꿀로 만든 유미죽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소젖을 먹은 역사는 꽤 오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소젖이 완전식품의 형태로 홍보되어 상품화되고 일상생활에서 소비되기까지는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여러 문화 경제적 조건의 변화가 있었다. 구미의 낙농업계는 의료계의 힘을 빌어 ‘우유’를 인간에 필요한 영양소를 거의 모두 갖춘 완전식품으로 홍보하였다. 낙농업계는 각종 박람회, 학회, 컨퍼런스를 통해 우유가 완전식품이라는 것이 과학적 근거를 가졌다고 선전했다. 그레타 가드는 이 과정에서 소젖을 무리없이 소화해내는 백인 신체의 완벽함이 선전되어 ‘미국인 정체성의 정치’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 도시화와 산업화와 함께 ‘우유’가 완전식품으로 여겨져 미국 식단의 필수품이 되기까지의 역사와 논쟁을 다른 멜라니 뒤피(Melanie DePuis)의 저서 『Nature's Perfect Food: How Milk Became America's Drink』 표지(좌), 그레타 가드(Greta Gaard)의 저서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원제: Critical Ecofeminism, 김현미‧노고운‧박혜영‧이윤숙‧황선애 번역, 창비, 2024) 표지(우)


하지만 정말 ‘우유’는 완전한 식품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최근에 전세계 식품업계와 의료계의 커다란 쟁점이 되고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와 같은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서구화된 식생활의 영향으로 우유 소비가 늘어나고 있지만, 사실 우유의 젖당(락토스)를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지구상의 인구 중 약 80%는 우유를 분해하여 체내에 흡수하도록 도와주는 효소인 락타아제라는 효소가 체내에서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소화되지 않은 우유는 설사를 유발하기도 하고, 장에서 독소가 되어 각종 알레르기와 질병을 가져온다는 게 밝혀지기도 했다. 또 우유의 여러 성분들이 철분과 결합해서 장흡수를 방해하게 되면서 유아들의 철분결핍성 빈혈을 유발한다는 것도 알려졌다.(파란우유병 신드롬)

 

더 심각한 것은 우유가 생산되기까지 투여되는 성장호르몬, 항생물질, 잔류성 유기오염 물질 축적 등으로 사람의 몸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복합적이고 광범위하다는 사실이다. 우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어미젖소에 투여하는 ‘재조합 소 성장호르몬’은 인슐린 유사 성장인자(Igf-1)의 농도를 더 높여 암세포 성장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은 여성들의 유방암 증가의 원인이 되며, 이외에도 전립선암이나 난소암 같은 성호르몬 관련 암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

 

이뿐 아니다. 뼈를 튼튼하게 하고 골다공증을 예방한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우유의 인성분이 오히려 칼슘흡수를 방해해 거꾸로 골다공증을 유발한다고 연구되고 있다. 실제 미국 등 우유 섭취량이 많은 국가들에서 오히려 골다공증 환자가 많고, 최근에 우유 소비량이 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골다공증 환자가 많아지고 있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비건(vegan) 운동가로 유명한 존 라빈스는 다국적 아이스크림 회사 베스킨라빈스사의 상속자였지만 스스로 상속을 거부하고 육식의 폭력성을 알리는 활동가가 되었는데, 그 계기는 아이스크림과 일상생활을 함께한 자신의 삼촌과 친척들이 많은 경우 오십이 되기 전에 사망한 사실이었다.

 

인간이 소젖을 일상적으로 소비하면서 생기는 건강상의 문제가 여러 연구를 통해 제기되었지만, 이것에 대한 반박과 논쟁은 계속되고 있고 우유가 완전식품이라는 신화는 쉽사리 깨지지 않고 있다.

 

‘우유’와 생물식민주의

 

그레타 가드는 ‘우유’를 둘러싼 정치경제적, 문화적 관계들을 면밀히 검토한다. 인간의 모유 수유에는 엄청난 경제적 가치가 있으나 인종이나 계급에 따라 그 혜택이 다른데, 예컨대 상류층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아프리카계 유모는 정작 자신의 아이에게는 모유 수유를 하지 못하고 소젖을 먹인다. 북미 원주민 여성 또한 강제 기숙학교에 분리된 아이에게 모유 수유를 할 수 없다. 이처럼 이들의 낮은 모유 수유율의 그 저변에는 식민주의적, 인종주의적 폭력의 역사가 자리한다. 한부모 등 가난에 내몰린 계층의 여성들은 복지수당 낙인을 두려워하며 일터에서 유급휴가를 얻지 못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모유 수유를 포기한다.

 

가드는 이처럼 모유 수유의 높은 경제적, 문화적 장벽을 말하면서, 여성의 젖과 노동이 비가시화되면서 국가 경제체제에 전용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한편 ‘우유’를 둘러싼 식민주의적 역사는 가난한 나라를 원조하는 방식으로 그 나라에 ‘우유’를 상업화하고 보급했다. 이때 ‘서구적인 생활방식’도 같이 장려된다. 인도 또한 이 원조를 받아들여 ‘홍수작전’이란 이름으로 서구적 낙농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이것은 녹색혁명과 더불어 ‘백색혁명’으로 홍보되었다.

 

하지만 도시 중산층에게 소젖을 제공하고 가난한 이들의 경제 상황을 개선한다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이 작전은 오히려 토종 소를 기르던 가난한 농촌 여성들이 첨단 낙농시스템에 밀려 더 가난해지고 더욱 착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에코페미니스트 반다나 시바는 현대화된 우유 생산은 서구의 기업식 농업을 진보로 위장한 ‘생물식민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 지속적인 우유 생산을 위해 어미소들은 강제적인 임신과 출산, 강제적인 젖떼기를 반복해야 한다. 우리들이 소젖을 먹기까지는 어미젖소의 생식 과정을 지배, 착취하고 송아지와의 유대관계를 끊는 폭력적인 시스템이 자리한다. (출처: Animal Equality UK 홈페이지)


‘우유’ 생산 시스템과 폭력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소젖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인간이 편리하게 소젖과 소젖가공품을 먹기 위해서는 어미젖소가 지속적으로 젖을 생산해야 한다. 이는 곧 강제적인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숫소에서 뽑은 정액을 주입하여 강제로 임신시키는 장소를 일컬어 서구 낙농업자들은 ‘강간 베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단시간에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좁은 콘크리트 축사에서 암소의 몸에는 항시적으로 성장호르몬을 주입한다. 강제적인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 어미젖소는 출산 후 최대한 빨리 젖을 떼고 송아지와 이별하게 된다. 강제적인 이 ‘젖 떼기’ 과정에서 송아지가 젖을 먹지 못하도록 날카로운 키트를 코에 끼우기도 한다. 우유 생산에 쓸모가 없는 수송아지는 어미와 강제로 분리되어 폐기물로 취급되어 도살장이나 판매장으로 보내져 얼마 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윤과 관련 없는 잉여 암송아지도 같은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다.

 

젖소들이 겪는 고통은 이뿐 아니다. 물건처럼 폐기되는 송아지들은 도살장과 판매장으로 운송되는데, 너무나 어린 송아지들이 경사를 오르고 트럭에 타는 혹독한 운송 과정에서 가혹한 학대를 당하고, 먼 길 운송에서 이른바 ‘운송열(shipping fever)’에 걸리거나 밀집 운송으로 부대끼다 죽어나가기 일쑤이다.

 

이렇게 우리가 소젖을 원활하게 공급받아 마시기 위해서는 어미와 새끼 유대관계를 강제적으로 단절시키고, 어미젖소의 생식 과정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이윤을 얻는 시스템이 숨어있다. 가드는 이와 같은 산업화되 낙농 시스템은 젖소와 소규모 낙농업자, 유제품 소비자를 모두 희생시켜 이익을 얻는 ‘무임승차자’라고 비판한다.

 

젖소의 저항을 우리가 ‘본다면’

 

이러한 착취적이고 폭력적 낙농 시스템에서 동물을 길들이고 그것을 통해 이윤을 얻는 방법이 ‘관계의 단절’, 즉 어미와 새끼의 단절, 생산자와 소비자 관계의 비가시화 등이기 때문에 ‘젖소’의 삶과 젖소의 행위 또한 보이지 않게 된다. 하지만 새끼를 빼앗긴 어미젖소는 살아있는 동물로서 이 가혹한 폭력에 무력하게 있지 않고 저항한다. ‘우유’와 유제품 소비자에게 들리지 않지만, 새끼를 빼앗긴 어미젖소는 스톨에 머리를 찧고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트럭에 운송되는 새끼를 끈질기게 쫒아가고, 심지어 풀숲에 몰래 새끼를 숨기기도 한다.

 

▲ 우유 생산을 위해 강제로 분리되어 빼앗긴 송아지를 필사적으로 뒤쫒아가는 어미젖소. (출처: SAFE for Animals New Zealand 유튜브 @SAFEAnimalAdvocacy)

 

우리는 이렇게 적극적이고 정교한 젖소의 저항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또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레타 가드는 바로 이러한 젖소의 행위자성을 무시하는 인간 중심의 식민주의적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책에서 그려진 것과 같이 이타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어머니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어미젖소, 암소의 ‘눈’을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그렇다. 우리에겐 이제 우리가 소비하는 ‘우유’를 하나의 상품이 아니라 ‘소젖’으로 환기하고, 젖소의 생식 과정에 대한 폭력적 통제에서 겪는 그들의 고통의 경험을 알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어떻게 다종간의 얽힘과 관계맺음을 알아차리고 소통할 것인가”라는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의 물음과, 동등한 행위자로서 다른 종의 행위를 ‘경청’하는 방법론이 필요하다. 이렇게 될 때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물음이 있다. “소젖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젖소는 답할 것이다. “내 새끼의 것이지!”

 

[필자 소개] 이윤숙.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 연구위원. 에코페미니즘 연구공동체 꿈꾸는지렁이들의모임(꿈지모) 회원으로 활동했고 일본에서 동양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 한국YWCA연합회에서 탈핵운동 담당자로 활동했으며, 자급적 삶과 여성의 몸과 양생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공저), 『꿈꾸는 지렁이들』(공저), 역서로 『자연의 죽음』(공역),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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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4 [15:57] 수정 | 삭제
  •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지만 한 명이라도 더 읽었으면 하는 기사
  • 독자 2025/02/22 [10:15] 수정 | 삭제
  • 기업화되는 것의 무서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다른 동물과의 연결성이 끊기고 착취만 가동된다는 것
  • 원두 2025/02/20 [13:43] 수정 | 삭제
  • 어릴적 학교에서 매일 반강제적으로 먹었던 우유.. 그게 배탈의 주범이란 걸 그때도 알았지만, 빈혈까지 유발하는지는 몰랐네요. 당시 심한 빈혈이었음 ㅠㅠ 소의 젖이 인간에게 완전식품이라는 말 자체가 좀 괴이하단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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