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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결국 ‘부동산’, ‘로또 분양’, ‘갭투자’ 등으로 귀결되고 마는 방식에서 벗어나, 이제 좀 다른 집 이야기-청년, 여성,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함께 고민해나갈 주거의 권리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민달팽이유니온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고, 현재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 등에서 활동중인 지수 님이 연재를 통해 화두를 던집니다. [편집자 주]
청년기는 부채기
나의 젊음과 임신 가능성은 곧 신용이다. 정부와 은행은 내가 청년기라는 이유로 청년전용 전세자금 대출을 열어준다. 가임기 여성인 덕에, 출산하는 자녀가 몇 명인지에 따라 대출이자가 낮아지는 혜택을 누릴 가능성도 열려 있다. 내게 기대되는 무언가를 담보로 이 신용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에만 한정적으로 열리는 대출상품들이다. 제때 잡지 못하면 기회는 물 건너간다. 지금뿐이다. 지금 전세 대출을 잘 써먹고, 지금 주택구입자금 대출도 잘 써먹어야 한다고 온 세상이 말 붙인다. 때를 놓치면 다시 이 정도의 기회는 없다며 부추긴다. 청년기가 끝나면 그 땐 늦는 거라고.
내 몸은 젊든 늙든 이 땅에 물리적으로 여전히 존재할 텐데. 월경을 하든 완경을 하든 나는 이 땅에 숨 쉬고 있을 텐데. 몸을 가진 모두에게 집이 필요한데, 집다운 집에 가까워질 신용을 갖춘 ‘몸’에는 어떤 자격이 따른다. 언젠가 늙을, 언젠가 완경할 나는 지금부터 심술이 난다.
가진 건 젊음뿐인 와중에도 돈이 원수다. 중년의 엄마가 하는 소리를 나는 진작부터 마음에 달고 산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 매달 1일 월세, 고정관리비, 공과금, 대출이자, 카드 값을 준비한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려고만 해도 필요한 돈이 얼마더라, 셈을 하다 지친다. 대출 원금을 좀 줄이면 생활이 나아질 것 같은데, 노동이 불안정하고 벌이가 시원찮으니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이런 내게 손 내미는 것은 또 다른 대출이다. 그래도 아직 ‘청년’이라서 ‘디딤돌’이라든지 ‘버팀목’이 되어주겠다는 것들이 있다. 모두 대출상품 이름이다. 어떤 금융상품이 나서서 내 삶의 버팀목이자 디딤돌이라고 자임한다는 게 자본주의 사회답다.
하지만 마음 한 켠, 이런 대출이 있어 너무 반갑다는 사실이, 청년 전세대출 정책이 있는 덕분에 매달 지출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이, 내가 비빌 곳이 진짜 눈앞의 은행 대출이라는 사실이 차츰 우리를 무뎌지게 만든다. ‘청년’으로 산다는 건, 은행으로부터 미래를 담보로 신용을 보장받고 이런저런 부채를 짊어질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구나. 청년이 된다는 건, 본인 명의의 부채가 생긴다는 거구나.
그러나 거부할 수 없다. 신용이 있어야 부채를 가질 수 있고, 빚을 지기라도 해야 어떤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 자유는 마치 시민권과 같다. 원하는 교육을 받고, 안전한 주거를 누리는 시민의 자격이 된다. 책 『페미니즘으로 부채 읽기』(베로니카 가고, 루시 카바예로 공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미 다른 자원이 없기 때문에 빚을 진다. 우리가 극심한 빈곤에 처해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을 때 오직 부채만이 ‘우리를 구하고자’ 다가온다.”
언젠가부터 집은 그 어떤 것보다 우리 일상 안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금융상품이 됐다. 전세든 자가든 집을 마련할 때 대출을 이용하는 것이 상식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다. 월 2백만 원을 채 못 벌어도 보증금 대출은 끼고 사는 것. 전세자금 대출은 평생 1천만 원도 만져본 적 없는 사람이 1억, 2억을 빌려도 된다. ‘젊음’은 그 이유가 된다. 청년전용 보증금 대출은 월세가 부담되는 청년들에게 동아줄이 됐다. 보증금 대출이 활성화되면서 온 동네 전세보증금 규모가 같이 올라갔다는 건 다들 알지만, 아무도 손대지 않았기에 순조롭게 태초에 그랬던 것마냥 자연스러운 질서가 됐다. 전세자금 대출은 그냥 월세보다 저렴한, 합리적이고 경제적이고 현명한 선택이 됐다.
전세사기 피해를 호소하는 5만 명 이상의 피해자들의 75% 이상이 청년이다. 전세자금 대출을 이용했다가 빚을 짊어지게 된 청년의 이야기는 이미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소비’된다. 문제 해결은 운이 좋아야 가능하다. 2015년에 전세사기 당했던 사람은 ‘너무 과거의 피해’라면서 논외가 된다. 2025년 6월 이후에 전세사기 당할 사람도, 한창 이슈일 때가 지난 후에 생긴 일이니 개인의 책임일 뿐 구제 대상에서 제외다. 법이 그렇다. 전세사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 건 문제라고 고개 끄덕이지만, 전세 대출은 만고불변의 질서처럼 취급한다.
청년들에게 유독 매섭게 몰아친 전세사기는, 우리의 젊음을 담보로 빚져야만 멀쩡한 집에 몸 뉘일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가 만든 결과다. 그 구조는 여전히 견고하다. 월세를 더 내면 그만큼 식비를 줄여야 하니, 전세사기가 내게는 벌어지지 않을 거라 굳게 믿고 전세 대출을 쓴다. 월세 지원, 주거급여, 세입자권리 보호를 비롯한 온갖 제도들에 구멍이 있는 와중에, 그나마 믿을 건 은행이 되고 만다. 청년은 기꺼이 전세 대출을 이용한다.
그렇게 우리는 은행과 임대인이 목돈을 주고받는 통로가 된다. 그 정도 돈이 오갈 수 있도록 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나, 그것이 유지 가능하도록 이자를 내는 것도 나, 미반환 시 갚는 것도 나다. 모든 돈의 흐름이 나로부터 시작된다. 돈이 흐른 뒤 도착하는 곳만 내가 아니다. 오히려 협박을 받는다. 임대인이 망하면 나한테 더 안 좋단다. 보증금 못 받을까 봐 두려운 건 난데, 임대인 사업 잘 되길 냉수 떠놓고 빌어야 하는 입장이 된다. 이쯤 되면 임대인과 세입자의 관계란, 사실상 위기를 나누는 가족 같은 게 아닌가. 그럼 이득도 나눠가지는 게 이치에 맞지 않나. 이건 또 안 된단다.
출산하면 포상처럼 주어지는 집과 대출은 또 어떤가. 자가일수록 출산율이 높다는 통계를 많은 전문가들이 들먹이지만, 순서가 틀렸다. 자가 마련이 가능한 계층의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결심한다. 한 푼 두 푼 아쉬운 사람에게 ‘출산할수록 대출이자가 저렴해진다’는 사실은 분명 매력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어차피 내가 구매할 수 없는 매대 위 상품이다. 그걸 집어가는 계급은 적어도 여긴 아니다. 그 계급이 자신의 계급성을 부정할 순 있을지언정, 닿을 수 없는 이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있느니만 못한 내 몫의 신용, 대단한 거품 덩어리다. 거품에 뒤덮인 채 모두가 허우적거린다.
주택구입자금 대출을 이용하지 않으면 내 집 마련을 할 수 없고, 내 집을 마련할 수 없으면 주거불안은 죽을 때까지 나와 가족을 괴롭힐 것만 같다. 그러니 서서히 우리는 자발적인 채무자가 된다. 그리고 빚진 크기만큼 기대를 품는다. 비쌀수록 더 많이 오르겠지, 월급보다 더 큰 수익이 되겠지, 노후 준비를 할 수 있겠지, 나이 들어서 혹은 누군가를 더 부양해야 할 때 든든한 자산이 되겠지. 1억짜리 집이 6억이 되고, 10억짜리 집은 20억이 되고, 다음 타자가 분명 나타날 것이라 모두 믿는다.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은 남의 몫이다. 늦지 않게 상급지로 갈아탄다면 나와 관계 없는 문제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믿음 가진 사람들이 아직 믿지 않는 자들을 전도한다. 너 빼고 모두 ‘영끌’한다고, 지금이 가장 저렴할 때라고, 아파트는 불패한다고, 빨리 빚져서 집을 사고 갈아타고 더 많이 소유하며 더 많이 얽혀 들어오라고.
부채는 우리가 흔히 ‘권리’라고 떠올리는 자리들을 파고든다. 좋은 교육을 받고 싶고, 더 나은 집에 살고 싶을 때. 이 감각은 인간다움,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 기꺼이 부채를 가져도 괜찮다고 말씀 전하는 전도사들에게 효과적으로 쓰여, 그 틈을 파고들며 우리를 평생 빚 지는 삶에 길들인다. 그러면서 믿게 만든다. 부채가 있음으로써 더 나은 개인의 미래가 다가올 것이라고.
나는 평생 이렇게 나이 들게 될까? 할머니가 되어서도 빚을 지고, 빚을 갚고 있을까? 할머니와 엄마 세대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와 친구들은 잘 모르겠다. 집이 없으니 보증금 대출을 받았고, 돈이 없으니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나이 들수록 노동력이 약해지고 노화와 장애는 필연적이니 소득은 절대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빚을 갚는 속도는 더 더뎌질 것이다. 오히려 아파서 빚이 더 생기지 않을까. 다만 그때에는 더 이상 은행이 돈을 빌려줄 것 같지 않다. 담보 잡을 젊음이 없기 때문이다. 돈 나갈 일만 남은 몸으로 보일 테다. 그럼 그때 가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더 이상 부채가 ‘우리를 구하고자’ 하지 않을 때.
젊은 내가 부채를 짊어지고 있는 현재와, 나이든 내가 빈곤에 처해있을 미래는 연결되어 있다. 개인화된 사람들이 각자 부채 부담을 가진 채, 미래 어느 순간의 안정과 자유를 꿈꾸는 방식은 페미니즘이 도달하고자 하는 사회와 방향키 자체가 다르다. 우리의 방향키는 우리가 다시 설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빚지지 않고 교육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외치고 쟁취하는 것.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가난해도 멀쩡한 집에서 안정적으로 돌봄 주고받으며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외치고 쟁취하는 것. 나이 들어 신용이 하락한 은행고객이 되든 말든 ‘필요한 의료와 돌봄이 온전하게 보장될 수 있는 체제’를 요구하고 쟁취하는 것. 이것이 평등하고 정의로우며 누구도 낙오되는 이 없이 지속 가능한 세계를 지향하는 페미니즘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신용 없는 할머니들의 신뢰 모으기
당장의 부채 상환을 거부하자는 이야기도 하고 싶다. 세계의 페미니스트들이 “부채는 우리에게 빚을 졌다”고 외치고, “그들이 우리에게 삶을 빚졌다”고 외친다. 물론 부채에 저항하기 위한 파업과 불복종은 사회운동이 함께 만들어야 할 과제다. 영 어렵다면, 친구들과 쑥덕이며 시작할 수 있는 것들부터 고민해본다. 할머니가 됐을 때를 미리 준비하는 것부터 같이 시작해도 좋겠다. 할머니가 됐을 때, 신용점수가 높지 않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신용을 기반으로 부채가 ‘승인’되는 것인데, 더 이상 대출이 불가능해지면 그때는 어떻게 부채를 통해 획득했던 것들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들을 미리 생각하고, 함께 준비해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젊은 사람에게, 은행 및 증권회사는 ‘다 돈이 문제니, 젊을 때 미리 투자해서 준비하라’고 할 것이 뻔하다. 그런데, 정말로 그 경지에 이른 채 할머니가 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2020년 기준 65세 이상 여성의 단 2.6%만이 부동산 등으로 생활비를 마련한다.(통계청, 2020) 생활비의 원천이 금융자산인 경우도 단 2.9%다. 한편,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여성 노인 빈곤율은 60.3%에 달한다. 많은 할머니들의 생활비 원천은 자녀의 도움(15.5%),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보조(15.1%), 공적 연금(10.6%)이다. 자신을 부양해줄 자녀가 없을 경우, 기댈 수 있는 건 결국 제도다. 그 제도가 얄팍할 때, 많은 할머니들의 일상이 쉽게 위기에 처한다. 그 어딘가에 나와 친구들의 미래가 있는 것만 같다. 이렇게는 안 된다.
좀 다른 걸 믿고 살 순 없을까. 빚지고 공부하고 빚지고 집 사면, 나중에 더 큰 자산이 될 것이라는 믿음 말고. 그런 믿음으로 돈 빌리는 나를 평가하는 은행의 신용점수 말고. 결국 은행이 신용을 작동시킬 수 있는 원천은 사람들에 있다. 사람들을 모으자. 신용의 진짜 뜻, ‘믿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망을 형성하자.
함께 갔던 10여명의 청년 여성들이 무엇보다 인상 깊게 느낀 것은, ‘믿을 수 있는 관계망’을 만든다는 점에 있었다. 우리는 학자금도 각자의 몫이고, 보증금도 각자의 몫인 것에 익숙하다. 여전히 혼자 생각하면 막연해지지만, 진작부터 함께 모여 의료와 돌봄을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함께 연결해가고 있는 주체들을 만나니, 이번에야말로 진짜 ‘비빌 곳’이 생긴 것 같아 기뻤다.
부채는 ‘우리를 구하고자’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서로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구하는 관계를 만들자. 시간이 걸리겠지만, 할머니가 되었을 때에는 반드시 우리에게 진정한 ‘디딤돌’과 ‘버팀목’을 부채가 아닌 페미니즘 공동체에서 함께 찾아내고야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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