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마감을 위해 먹는 진통제

[나의 노동기] ‘번아웃’의 비포 앤 애프터

김윤영 | 기사입력 2025/09/22 [10:21]

오늘의 마감을 위해 먹는 진통제

[나의 노동기] ‘번아웃’의 비포 앤 애프터

김윤영 | 입력 : 2025/09/22 [10:21]

우울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진 것에 대해, 가까운 지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공부만 해서 다양한 경험이 부족하면 우울증에 걸리는 게 아닐까?”

지인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 난 첫 직장에 처음 출근하던 날을 떠올려 본다.

 

영상 제작 회사에 인턴으로 취직했다. 출근길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침 해, 아침 공기. 내가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두근거렸다. 그리고 한 달 후, 첫 회사는 허무하게 망했다.

 

미디어 커머스(Media Commerce, 미디어 형태의 콘텐츠를 활용하여 마케팅 및 제품 판매 효과를 높이는 전자상거래의 한 방식) 붐으로, 영상 제작 회사는 많았다. 그중에 건실한 회사가 몇 개인지는 의문이었지만. 오전에 합격 문자를 보내고 오후에 입사 취소를 통보하는 곳도 있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몇 번의 이직을 거쳐 영상 제작자로 성장해 나갔다.

 

“일에 대한 우리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

 

회사 생활 6~7년 차. 어느 날 열심히 영상 편집을 하고 있는데 눈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특별히 슬픈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시야가 흐려져서 편집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문득, 정신과에 다니던 친구가 나에게도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유했던 게 생각났다. 예전과는 달리 내가 대화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한숨을 많이 쉰다고 했다. 내가 느끼기에는 정신과에 갈 정도로 우울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상태로는 마감일까지 영상을 완성하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정신과에 상담을 예약했다.

 

“우울증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습니다. 원인은 번아웃이에요.”

의사가 말했다.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약을 먹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항우울제 한 알을 2주치 처방받았다. 번아웃의 정의를 찾아보았다.

조나단 말레식의 책 『번아웃의 종말』에서는 번아웃을 “일에 대한 우리의 이상과 직업의 현실 사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분투하는 경험”이라고 정의한다.

 

“번아웃의 경험은 서로 반대쪽으로 쓰러지려는 두 개의 죽마에 올라타 균형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각각의 죽마는 우리가 하는 일의 이상과 현실을 표상한다. (생략) 죽마는 서로 멀어지면서 V자로 벌어진다. 죽마가 높지 않다면, 즉 일이 요구하는 바가 그리 많지 않다면, 조금 벌어진다고 해서 죽마에서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죽마가 높다면, (생략)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조금만 벌어져도 긴장도가 높아진다. 시간이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바람에 두 죽마 중 하나를 놓치거나 아예 굴러떨어져 버릴 것이다.” —『번아웃의 종말』(조나단 말레식, 송섬별 번역, 메디치미디어)

 

광고주 덕분에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 수 있으니 내가 만드는 영상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많은 광고주가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 마감일이 다가오면 수정 사항을 잔뜩 요청한다. ‘최종본 보내드립니다.’ 새벽에 메일을 보내고 퇴근했는데, 집에 도착하니 ‘하나만 더 수정 부탁드려요.’ 문자를 받았을 때 느꼈던 절망감. 수면이 부족한데 잠을 포기하고 작업했던 기억.

 

다음 수주를 위해 광고주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고, 나를 갈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앞만 보고 일하다 보니, 내가 죽마를 탄 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는 것은 몰랐다.

 

▲ 2025년 8월 어느 날, 촬영 현장의 나. (김윤영 제공)


늘 수면 부족 상태로 작업했던 기억, 그리고 항우울제

 

다시 지인과의 대화를 떠올려 본다.

“공부만 해서 다양한 경험이 부족하면 우울증에 걸리는 게 아닐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많은 경험을 해서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라도, 주변과 사회로부터 요구받는 것이 많다면 정신적으로 무너질 수 있어요. 회복할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면, 병원에 가지 않고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아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쉼이 허용되지 않잖아요.”

 

‘컨디션 관리도 실력이다.’라는 말이 있듯, 나의 건강 상태가 일에 영향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일 때 감기에 걸리면 곧장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곤 했다. 감기는 쉬면 낫는다고 하지만 일을 멈출 수는 없으니 빨리 낫기 위함이다.

 

정신 건강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번아웃 상태이고 우울증 경계에 있더라도, 마감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프로답지 못한 것이다. 항우울제는 오늘을 버티기 위해 먹는 진통제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처음 정신과에 간 이후 약 1년 동안 꾸준히 상담을 받고 항우울제를 먹었다. 감정 기복이 줄었고 집중력은 향상되었다. 그러나 병원과 약은 보조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생계를 위해 일을 그만두기는 어려우니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며 일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필요할 땐 쉬면서, 시간 에너지를 능동적으로 쓰며 일하기

 

회사에서 나와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마음씨 좋은 광고주가 있어 가능했다. 그리고 올해 2년 차 프리랜서가 되었다. 무리해서 일을 받지 않고 긴 호흡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대신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준비하고 완성도에 공을 들인다. 이 방식을 존중하는 광고주와 작업한다. 소득은 불안정하지만,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능동적으로 쓸 수 있다. 무엇보다 필요할 때 잘 쉴 수 있다.

 

우울증의 원인에는 트라우마, 가족력 등 다양한 요소가 있다고 한다. 내가 선택한 해결책이 모두에게 맞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일터에서 분투하는 과정에서 평소보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고 느낀다면,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자신만의 속도로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용기 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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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5/09/23 [14:45] 수정 | 삭제
  • 저도 결국에 아파서 진단명을 받고서야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일하고 있었는지 알고. 인정하고. 잠시 휴지기를 가졌습니다. 그걸 무시하고 계속 가면 제명에 못죽겠다 싶더라구요. 이직을 하고 환경을 바꿔보려고 노력하신 거 정말 응원합니다.
  • 쉼표 2025/09/22 [17:26] 수정 | 삭제
  • 그놈의 마감을 위해 많은 약을 먹었다. 나두..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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