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계 성폭력, ‘구조적 위계’ 지우고 개인갈등으로 다루나?민우회, 원로배우 강제추행 사건 항소심 판결 평석회 열어지난 11월 11일, 수원지방법원은 연극계 원로배우 오영수 씨의 강제추행 사건 항소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심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할 것을 명령했지만 항소심이 이를 뒤집은 것이다.
피해자를 지원한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이번 판결은 구조적 성폭력 피해자의 용기를 법이 외면하고, 여전히 ‘피해자다움’을 판단의 근거로 사용하는 사법부의 현실”을 보여준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평석회 참여자들은 입을 모아 항소심 판결이 미투 운동 이후의 변화된 사회적 흐름에 역행하며, 사법 시스템 전반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렸다고 지적했다.
‘혹시 서운한 일이 있었어요?’
최원진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성인지 감수성이 부재할 때 사법 시스템이 어떻게 ‘피해자다움’이라는 낡은 통념으로 퇴행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비판했다. 항소심 재판부가 연극계 성폭력 사건의 본질인 ‘구조적 위계’를 간과하고, 개인적 감정 다툼으로 축소했다는 것이다.
최 활동가에 따르면, 재판부는 예정된 선고 기일을 앞두고 두 차례 일정을 변경한 뒤 판사 직권으로 변론을 재개하였고, 피해자에게 증인으로 다시 출석할 것을 통보했다. 그리고는 “신문 과정에서 판사가 피해자에게 ‘혹시 서운한 일이 있었어요?’, ‘피고인과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라는 질문을 하며, 위력 성폭력의 배경을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지적했다.
2018년 미투 운동을 통해 연극계에서 여러 성폭력 사건이 제기된 이래, 피해자와 연대자들은 입을 모아 권력 구조의 문제를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이것은 누군가의 일탈이나 삐뚤어진 행위가 아니라고 말이다. 최원진 활동가는 연극계 성폭력은 “연극계의 도제식 위계 구조, 인맥과 평판 중심의 불안정한 노동구조로 인한 생계 위협과 경력단절 위험, 공식적인 신고창구가 없는 등의 제도적 보호장치 부재가 결합된 결과”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 사건에서도 피해자는 인턴 배우였고, 피고인은 연출가가 특별 초빙한 명성과 지위를 가진 59년 경력의 원로 배우였다. 명백한 위계 관계가 존재했다. “1심 재판부는 이러한 구조적 위계와 권력 차이를 고려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혹시 서운한 일이 있었어요?’ 같은 질문을 하며 개인적 관계의 오해나 감정적 갈등으로 치부하는 퇴행적 접근을 했다”고, 최원진 활동가는 평가했다.
또 다른 문제로 지적된 것은 재판부가 ‘미투 운동’과 피해자를 바라본 방식이다.
최 활동가는 “재판부가 피해자가 2018년 3월경 일기장에 남긴 단어와 문장 20여개(미투, 남자, 할아버지, 비밀, 여태까지 합리화, 어떻게 해야 하지 등) 중에서 ‘미투’라는 단어에 집중하며, 피해자에게 ‘피고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다가 2018년 3월에 갑자기 미투가 언급되고, 이때부터 심경의 변화가 있는데 계기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했다”고 밝혔다.
“피해자는 분명하게 ‘미투 때문에 없는 사건이 있는 사건이 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미투 운동을 보면서 제가 겪은 일이 성폭력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라고 답했지만, 그럼에도 재판부는 다시 ‘2018년 3월에 미투가 시작됐죠?’라고 되물었다.”
최원진 활동가는 “재판부가 이와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피해자의 인지 과정을 외부 요인에 의해 인위적으로 생성된 것으로 의심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는 피고인 측 변호인단이 내내 주장해 온 논리, 즉 피해자가 ‘미투 운동에 편승해’ 진술이 변질되었다는 주장을 재판부가 전제하고 확인한 것”이라며, “재판부가 중립적인 검증이 아니라 피고인 측의 변론 논리를 확인하고 반복하는 방식으로 심문 과정을 활용했다.”고 지적했다.
최 활동가는 또한 “재판부가 피고인 측 변호인이 피해자 신문과정에서 이 사건과 무관한 다른 성폭력 사건 가해자를 거론하며 피해자에게 2차피해를 야기했음에도 이를 제지하지 않았을 뿐더러, 피해자 측의 이의제기에 대해 ‘왜 부적절한가요?’라고 반문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는 성폭력 재판에서 요구되는 성인지 감수성의 부재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며, “피고인 측의 신문 전략-피해자의 경험을 상대적으로 축소하고 진술의 신빙성을 흔드는 방식-이 재판부의 관점과 맞닿아 있음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성폭력상담소의 역할에 무지…상담기록 왜곡 사용했다
한편으로, 재판부가 “성폭력상담소의 역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상담 기록을 왜곡하여 사용한 점”도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었다. 최원진 활동가에 따르면,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2018년 한 지역 상담소에서 상담한 기록을 마치 수사기록처럼 해석하면서, 상담일지에 적힌 내용과 피해자의 증언이 다른 부분에서 상담일지 내용을 더 정확한 것으로 판단했다.
최 활동가는 “이미 1심 재판부가 지적했듯, 성폭력 피해자 상담은 녹취를 하지 않고 상담원이 수기로 작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상담일지는 완전무결한 사실 기록이 될 수 없으며, 피해자의 법적 진술과 다르다고 해서 피해자가 거짓말을 했다는 근거도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재판부가 상담소와 상담일지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덧붙여졌다. “실제 상담현장에서 어떤 피해자는 사건의 일부만 이야기하고, 다음 상담에서 더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술하기도 한다. 또 어떤 피해자는 ‘강간은 아닌데요~’라는 말로 상담을 시작하지만, 여러 차례 상담을 거치며 자신이 겪은 일이 강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다 사실대로 말하려고 상담소를 방문한 것이 아니었나요?’라는 질문을 했다. 이는 성폭력상담소의 역할과 상담 활동에 대한 무지를 그대로 드러낸 질문이다.”
최원진 활동가는 “상담은 ‘사실확인’ 절차가 아니라, 피해자가 혼란과 두려움, 지연인지, 관계상 압박 등 복합적 심리상태를 안전하게 표현하고 성폭력 사건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며, “항소심 재판부는 상담일지를 조각 내어, 피해자에게 불리한 부분만 골라 근거로 활용했다.”고 비판했다.
오선희 변호사(법무법인 해명)는 항소심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기준인 ‘경험칙’과 ‘논리’가 제대로 작동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성폭력 사건은 검증 대상이 피해자의 진술, 즉 피해자의 인격과 경험, 기억, 정서, 태도와 붙어 있는 특수한 영역이기에, 다소 일관성이 없다는 등의 사정만으로도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부정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 『김지은입니다』 저자인 김지은 씨 또한 자신의 경험을 토로하며 ‘피해자답지 않다’는 낡은 통념과 프레임을 지적했다. “법정은 성폭력 이후의 연속적인 삶(생계, 직장, 일상)을 잘라 조각 내어, 피해자가 생존을 위해 유지해 온 선택들을 ‘왜 신고하지 않았느냐’, ‘왜 평소처럼 메시지를 보냈느냐’는 질문을 통해 모순으로 뒤바꾼다.”
김지은 씨 역시 항소심 재판부가 미투 운동의 영향을 왜곡하였다고 비판했다. “미투는 구조적 폭력에 맞선 인권의 역사이자 집단적 자각”이며, “피해자가 자기 상황을 낯설게 보고 용기를 얻게 된 것은 미투 덕분의 결과”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겪은 성폭력 사건을 고발하는 건 “대한민국 사법 정의에 대한 마지막 믿음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평석회 발제자들은 최근 법원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갖춘 판결이 나오고 변화가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 항소심 판결은 그와 다른 퇴행적 판결이라며, 그렇기에 이 판결은 꼭 바로잡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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