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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조선동〉 다큐멘터리 영화(황나라 감독, 2025)는 시설에서 나온 선동의 ‘서울 상경기’다. 황당무계함과 날것의 현실감이 동시에 육박해오는 이 영화는, 2026년 박종필상을 받았다.
그리고 2022년, 선동은 시설 밖으로 나온다. 14년 만이었다. 동료들은 김포자립생활센터에 터전을 마련한다. 그리고 3년 후, 선동은 집을 새로 구해야 한다. 센터의 거주기간 3년이 끝났기 때문이다. 센터를 나가기 하루 전날. 그는 활동가들을 불렀다.
“나는 내일 서울로 간다. 용달 두 대 불러놨다.”
서울 종로가 그의 고향이고, 노들장애인야학 동료들이 있는 곳이라는 이유다. 동료들은 한사코 만류한다. 서울에 간다고 당장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이 뚝딱 나온단 말인가? 게다가 김포에서는 24시간 활동지원 시간이 제공되지만, 서울은 턱없이 못 미친다. 최중증 와상장애인인 그에게 활동지원은 생존의 문제, 부족한 시간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는 오히려 묻는다. “같은 몸인데 왜 김포는 되고, 서울은 안 돼?”,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평범하게 사는 게 권리라며?”
그렇게 2025년 3월. 시청, 종로구청, 국민연금공단을 넘나드는 “조선동(독)립투쟁” 와상노숙농성이 시작된다. 공무원들은 ‘이기적’이라 비난하고 야학 동료들도 쩔쩔맨다. “우리가 가르친 거에 우리가 당한 거죠.”
인터뷰라기보다는 스무고개 같다. 그것도 영희가 묻고 영희가 맞추는. 선동이 하는 발화는 “어” 정도, 대부분 비언어적 소통을 한다. 눈빛, 표정, 손짓, 팔짓, 고개 젖히기…. 선동의 모든 동작, 온몸이 언어다. 그걸 읽어내기 위해 영희는 끝없이 스무고개를 넘는다. 문제는 질문이 단답형이 아니라는 것. 영희는 열린 질문을 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차에서도 자고, 길바닥에서도 자고 공단에서도 자고 노들야학에서도 자고… 힘들었어?” 선동이 긍정의 신호를 보낸다. 다시 영희, “어떤 게 좀 힘들었어?” 선동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몸을 흔든다. 다시 영희. 선동의 몸짓과 표정을 음성 언어로 번역한다. “밥을 못 먹어서?” 선동을 살핀다. 선동의 표정이 마땅치 않다. “씻지를 못해서?” 이것도 아닌 듯. 다시 영희가 묻는다. “아니면 잠자는 데가 불편해?” 선동을 살피던 영희는 다시 고쳐 묻는다. “세 개 다?” 선동이 눈매가 누그러지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제야 영희는 그의 뜻을 받아 적는다.
드디어 종로 집을 얻어 이사하는 날 장면도 재밌다. 노들야학 동료들이 이사짐을 나른다. 거실 한복판, 선동은 휠체어에 앉아 동료들을 지켜보고 있다. 침대 놓을 자리로 토론이 붙는다. 선동은 작은 방에 두라고 했지만 동료들은 큰 방에 두자고 한다. 작은 방에 전동침대가 들어가지 않으며, 다용도실로 갈 때는 침대를 건너다녀야 한다며 한목소리로 선동을 설득한다. 설득이 안 되자 동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활동가 명희가 나선다. “모두 조용해 봐.” 좌중이 조용해지고 모든 동작을 멈춘다. 명희가 선동을 향해 묻는다. “형! 침대, 작은 방에 놓을 거면 손 들어봐.” 선동이 손을 번쩍 든다. 결국 침대는 작은 방을 향한다.
인간이 어떻게 소통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 같은 장면들이다. 동료들은 선동을 살피며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것을 추론한다. 모르면 다시 묻는다. 알아맞히기 위해 질문을 수정해가며 계속 제출한다. 오래 걸려도 그의 답을 기다린다. 소통에 방해가 되는 잡음을 끄기도 한다. 마음결을 맞추고 선동이 향하는 곳을 같이 향한다. 선동 역시 최선을 다해 듣고 묻고 답한다. 좋은 질문, 좋은 답에 조금씩 다가가기 위해 이들은 스무고개든 손짓이든 가리지 않는다. 아니 그 모든 것을 한다.
언어장애는 소통을 멈추기는커녕, 섬세하고 정교한 소통의 장, 상호작용이 들끓는 장으로 모두를 이동시킨다. 언어장애가 있는 와상장애인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한 사람의 온전한 시민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노들야학에서 시청으로, 다시 공단으로 간이침대를 옮겨다니고, 그의 질문과 요구를 피켓에 적어 선동 옆을 지킨다. 그가 공무원들과 협상하는 테이블도 지켰을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 둘 선동이 시작한 투쟁에 참여하고, 그의 노숙농성은 장애활동지원제도 전국동시다발 투쟁으로 확장된다. 결국 전국 162명의 장애인이 필요한 활동지원을 받게 되고, 장애인활동지원 심사제도의 판정 기준 문제를 드러낸다. 선동과 이들의 소통은 장애운동의 한 발짝을 내딛게 했다.
인류의 ‘상호작용 엔진’을 장애 앞에서 꺼버리는 사회
언어인류학자 스티븐 C. 레빈슨은 청각·시각·촉각의 여러 채널, 음색과 억양, 동작 등 모든 자원을 끌어모아 소통하기, 상대의 의도를 예측하기, 타이밍을 포착해 말할 순서를 주고받기 등, 진화가 다져온 이 정교한 능력의 집합체를 ‘상호작용 엔진’이라 부른다. 이 ‘상호작용 엔진’이 사회적 삶과 인간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고 강조한다. 그 결과 언어가 만들어지고, 문화와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언어가 있어 상호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엔진이 가동한 결과가 언어인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다. 아기가 태어나 보호자에게 안기고,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듣고, 눈 맞추며 웃는 시간. 아기의 욕구가 충족되고, 서로의 마음을 잇는 시간은 언어 없이 충만한 상호작용의 시간이다. 부모가 치매가 있다서 사람들은 그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다. 더 조심스럽게 묻고 귀 기울인다. 인간 종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반려동물이 인간의 언어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의견이 없거나 소통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상식이 장애 앞에서는 멈춘다.
지난해 1월, 세종, 40대 남성 지적장애인 입소자가 거주시설 직원으로부터 ‘신체적 학대’를 당해 갈비뼈 6개가 부러지는 등 전치 12주 중상을 입은 사건이 올해 4월 보도되었다. 이미 1년 여가 지난 시간이었다. 피해자 가족의 신고를 받은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은 신체적 학대를 받았다고 결론짓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3개월 후, 경찰서는 ‘증거불충분’으로 입건도 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 처리했다. “직접 증거가 없고 목격자인 장애인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취재 결과, 경찰은 법적 의무인 ‘진술조력인’을 제공하지 않았고, 피해자에게 단 한 차례의 방문조사만 실시했을 뿐, 정식 진술도 확보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났다.
또한 이 회로는 “장애인 학대·집단 성폭행·보조금 횡령–신고-조사-은폐 담합-무혐의 사건 종료”의 무한 연쇄를 돌리는 엔진이기도 하다.
이 엔진은 20년 전 광주 인화학교 청각장애인 성폭행 사건에서 2025년 인천 색동원 거주 여성장애인 성폭행 사건까지,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반복시켰다. 또한 이 엔진은 장애인의 진술을 듣기를 거부한 무책임을 장애인에게 떠넘기고, 부정의와 비효율, 담합과 범죄의 위험을 무릅쓰고 가해자들을 지켜왔다.
세종 장애인 학대 사건은 지난 5월, 관련 단체들의 항의 시위로 1년 만에 재수사에 들어갔다.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다룬 2011년 영화 〈도가니〉가 상영된 이후, 우리 사회는 가해자를 처벌하고, 학교를 폐교시키고, 장애인 대상 성범죄 공소시효와 친고죄를 폐지시켰다. 다시 2026년, 〈이기적인 조선동〉이 세상에 나왔다. 이 영화의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필자 소개] 호미 : 장애활동지원사이며 동화 집필 노동자. 전국귀농운동본부 ‘귀농통문’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장애활동서비스 이용인’ Moon을 돌보고 Moon으로부터 돌봄을 받으며 하루하루 연명합니다. 일하고 사랑하며, 투쟁하고 놀며 새로운 몸으로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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