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의 저자 파스칼 길렌(Pascal Gielen)은 번아웃이 올 때까지 일하고,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도 여러 일을 동시에 해내며, 그 불안정성에 완벽히 적응하는 오늘날의 예술계는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 윤리가 시연되는 실험실이 되어 왔다고 말한다. 너무나도 바쁘게 살아가는 예술가들은 자본주의적 삶에 포획되기 쉽다. 하지만 길렌은 그 속에서도 이들이 만들어내는 창조적 에너지는 초도덕적 관점의 기회주의가 되어 예상치 못한 저항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고 언급한다.
예술계의 불안정한 조건과 번아웃, 실천과 저항의 움직임 간의 관계는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온 주제이다. 언제부턴가 아침부터 밤까지 시간을 쪼개어 살아가는 너무 바쁜 예술가 동료들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유로운 창작 시간과 단기 임금 노동 시간과 이동 시간 틈틈이 여러 사회적 사안과 현장들에 연대하고 목소리를 내고 글을 쓰고 작업하며 세계와 깊숙이 얽힌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시간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예술적 실천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래서 정말 바쁘게 살아가는 예술가 친구들, 그리고 친구의 친구들의 발자국을 뒤따라가보려 한다. ‘예술적 실천의 현장들’이라는 주제로 연재를 시작하면 꼭 첫 번째로 쓰고 싶은 작업이 있었다. 작년 한해 동안 지켜본 최희범, 손나예, 오로민경, 권효원, 이호연, 박이현의 〈근력 연대 운동〉이다.
작년 5월 즈음부터였을까. 인스타그램을 열면 자주 친구의 이름이 태그된 영상 게시물이 뜨기 시작했다. 작은 화면 안에는 SEJONG이라고 적힌 건물이 보였고, 차가 달리는 도로 위에 세워진 높은 구조물 위로 작게 사람이 보였다. 차소리로 시끄러운 거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무언가를 외치는 사람과 그 곁에 선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은 늘 구조물 위의 사람을 향해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는 자세였다. 거리에 은박 깔개를 펴고 앉거나 눕거나 선 사람들은 나란히 한 곳을 바라보며 같은 동작을 따라하곤 했다. 무더운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영상 속 사람들은 복장만 조금씩 달라진 채로 그곳에 나와서 몸을 움직였다.
화면 속 친구는 때로는 기쁜 얼굴일 때도 있었지만, 방금 눈물을 닦은 것 같은 얼굴일 때도 있었고, 피곤함을 애써 감추는 얼굴일 때도 많았다. 미묘하게 달라지는 친구의 얼굴이 궁금해서 보기 시작한 영상이었지만, 점차 나란히 한 곳을 올려다보는 얼굴들과 그들을 마주하는 얼굴이 궁금해져갔다.
그렇게 자주 검색창에 ‘세종호텔’, ‘노조탄압’, ‘복직투쟁’, ‘고공농성’, ‘고진수’를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이미 탐사보도 기사와 인터뷰 등 많은 곳에서 기록해왔지만, 내가 한 번도 관심 갖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상 속에서 내가 본 건물이 서울 중구 세종호텔이라는 사실, 그 맞은편 왕복 6차선 도로 위 10미터 높이 지하차도 안내 구조물 위에 고공농성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 사람이 세종호텔에서 주방장으로 20년간 일한 고진수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이라는 사실, 2025년 연말 기준 300일 가까이 그 위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진수는 2025년 2월 13일부터 336일간 고공농성을 이어갔고 2026년 1월 14일 건강 악화로 농성을 해체한 뒤에도 지상에서 복직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정리해고를 하기 위해서는 이에 준하는 공정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수이지만 세종호텔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 코로나19를 핑계로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만 해고하며 ‘노조파괴’를 실행했다는 사실, 코로나19 이후에도 해고한 노동자들을 복직시키지 않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 노동자로 채웠다는 사실, 부당 해고를 법원에서도 인정해주지 않아 노동자들이 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사실과 사실이 서로를 지탱하며 지금까지 버텨왔구나 싶었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구나. 저기에 저렇게 있고,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구나 이런 것들이 너무 당연해서 사실은 우리가 잘 잊어버리는 것들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나면 그게 되게 희미해지고, 다른 것들의 이 뿌리를 내릴 자리가 없어진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정말 농성도 너무 중요하고, 외치고 있는 아젠다도 너무 중요하고, 투쟁도 너무 중요하지만 그랬을 때 그걸 하고 있는 그 몸이 거기에 그렇게 있다라고 하는 그 감각을 농성을 하시는 그분 자체도 잃지 않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최희범, [얽힘 1호] 인터뷰-오로민경)
여기에 이렇게, 저기에 저렇게, 거기에 그렇게 있다는 감각. 10미터 높이의 좁은 공간 위에 있는 고진수 동지와 지상의 참여자들은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며 목을 움직이고, 허리를 기울이고, 다리를 뻗고, 팔을 돌리곤 했다. 참여자들은 근처에서 지켜보거나, 따라하거나,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시청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함께 그곳에 존재했다. 그렇게 근력연대운동은 농성자를 위한 운동 수업으로 시작해서, 점차 세종호텔 부당해고 사태와 고공농성의 존재를 알리는 홍보 활동이 되었고, 그곳을 찾은 모두를 위한 단체 운동이면서도, 동시에 거리의 예술 퍼포먼스처럼 보이기도 하는 기묘한 시간이 되어갔다.
몸에 남아있는 현장의 기억을 가져오는 공연
올해 여름, 근력연대운동이 공연으로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8월의 첫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공연장에 도착하니 신발을 벗고 짐이나 가방도 두고 입장해달라는 안내가 들린다. 편한 복장으로 와달라는 안내 문자도 미리 받았기에, 오늘 분명 어떤 운동을 하겠구나 예상했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니 일인용 방석보다 조금 큰 은박 깔개가 곳곳에 깔려 있었다. 영상 속에서 보던 그 깔개였다. 공연장 앞쪽으로는 큰 화면이 보였고, 천장 곳곳에 모양이 각기 다른 작은 사각 천들(정확히 말하면 모퉁이가 잘려나간 사각형이었다)이 매달려있었다. 그 외에는 별다른 소품이 없는 단출한 공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곳곳에 영상 속에서 보았던 근력연대운동의 얼굴들이 보였다.
공연장에서 나에게 다가온 가장 강렬한 감각은 경계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작은 은박 깔개의 안쪽에서만 움직이려 했지만, 자꾸만 그 바깥으로 떨어지는 다리와 삐죽 튀어나가곤 하는 발은 나의 세계 바깥으로 연루되고 얽히는 모습 그 자체였다. 한쪽 귀퉁이가 잘려나간 작은 사각 천에서 상영되는 과거의 기록은 현실이 그 위에 이미 중첩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손나예의 손에 들린 프로젝터는 작은 사각천에서 관객의 등으로 얼굴로 다리 위로 과거의 장면을 중첩시켰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몸을 통해 그곳의 몸을 보는 것이며, 그곳의 몸 또한 지금 이곳의 몸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음을 상연하는 순간이었다.
점차 현장에서의 활동 이름도 ‘근력연대운동’이었으며, 공연장에 나타난 작품 제목도 ‘근력 연대 운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공연장에는 현장에서의 질문과 감각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의 공연은 명동역 1번 출구 앞에서의 근력연대운동을 예술적으로 재연하거나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이미 현장에서 이들이 했던 활동들 속에는 퍼포먼스적 요소가 있었으며, 공연장에서의 활동은 단지 미적 도약을 의도한 예술로 연출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공연은 지상의 몸과 고공의 몸이 만났던 것처럼, 그곳의 몸과 이곳의 몸이, 과거의 몸과 현재의 몸이 하나의 세계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타인을 지키는 나를 지키는 타인’, 이미 연결되어 있는 세계
돌이켜보면, 근력연대운동이 내게 특히나 흥미로웠던 건 바로 이 지점이었다.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시간. 타인을 위한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던 운동은 어느새 나의 목과 어깨를 이완시켜 피로를 풀어주며 자기돌봄의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 따라했던 동작이 어느 순간 연대라는 이름으로 호명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나를 돌보는 일은 타인을 돌볼 수 있는 몸을 만드는 일이라는 걸 배워가고 있었다. 그것은 고공농성을 하는 사람도, 농성자에게 음식과 생활용품을 올리고 내리는 사람도,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도, 일상에서 잊지 않고 이곳을 기억하는 사람도 지치지 않기 위한 연습이었다.
근력연대운동은 ‘타인을 지키는 자신’을 지키는 일이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이 순환하는 연결 동작이라는 점을 알려주며 연대를 연습한다. 명동역 1번 출구 앞은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 여전히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 남아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자리였다. 이 ‘운동장’은 노동자의 자리를 언제든 박탈할 수 있는 불안정한 것으로 바꿔나가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질문을 ‘던지는’ 근육과, 사람을 돈으로 손쉽게 교체할 수 있는 세상은 잘못되었다고 ‘목소리 낼 수 있는’ 근육, 그리고 최희범의 표현처럼 마음속에 무언가 무겁게 자리 잡아 명치 근처가 묵직하게 ‘조여오는’ 느낌을 매주 함께 연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인을 지키는 나를 지키는 타인. 나를 기억하는 너를 기억하는 나. 이미 연결되어 있는 세계.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감각할 수 있을까? 이미 잃어버린 감각은 아닐까? 그 감각을 일깨울 때 우리가 무엇을 되찾을 수 있을까? 거대한 질문이지만 답을 찾아가는 연습은 이미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필자 소개] 전솔비 : 시각문화 연구자. 독립기획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 기사 좋아요 11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예술적 실천의 현장들 관련기사목록
|
문화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