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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비슷한 말을 듣는다. 생리 전이면 차라리 마음이 놓인다는 이야기다. 며칠 동안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고, 평소라면 그냥 넘길 일에도 쉽게 눈물이 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다 생리가 시작되면 “아, PMS(월경전 증후군)였나 봐” 하고 지난 며칠의 감정을 뒤늦게 이해한다.
이름이 생기면 감정은 조금 덜 막막해진다. 내가 이상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 되고, 곧 지나갈지도 모르는 상태가 된다.
반대로, 아무런 이름도 붙일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더 자주 의심한다. ‘나는 왜 이러지?’, ‘딱히 힘든 일도 없는데 왜 이렇게 우울하지?’
이름이 생기면 아픔은 진짜가 될까
나는 가끔 우리가 몸의 상태나 감정의 이름을 원하는 이유가 단순히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아프다고 말하고, 쉬고, 무언가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언제나 병명을 아는 것은 아니다. 생리 때문에 힘든 것인지, 원래 좋지 않았던 몸 상태가 생리와 겹친 것인지, 아니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질환이 있는 것인지 당사자도 알 수 없는 때가 있다. 하지만 병가나 돌봄휴가와 같은 제도는 종종 그 모호한 몸을 어느 이름으로 설명하도록 요구한다.
마음의 상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울하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종종 이유를 묻는다. 물론 걱정해서 하는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왜 우울한데?”라는 질문은 때때로 “네가 우울할 만한 일이 있었느냐”라는 질문처럼 들리기도 한다. 최근에 큰일을 겪었다거나, 친밀한 관계가 끝났다거나, 일이 너무 많았다거나. 혹은 의사로부터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원인이나 진단이 생기면 타인의 이해를 구하기가 조금 쉬워진다.
그래서인지 병명이 아닌 감정이나 상태에도 끊임없이 이름을 붙인다. 번아웃, 슬럼프, 무기력 같은 말들은 모호한 상태를 이해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된다. 이름을 알게 된 순간, 자신의 경험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PMS라는 말을 알고 나서 매월 반복되던 감정의 변화를 알아차리거나, 우울증을 진단받은 뒤에야 지난 시간을 다시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이름이 우리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을 넘어, 이름이 있어야만 고통이 진짜가 되는 순간이다.
얼마나 아파야 쉴 수 있을까
우울증을 진단받았다고 해서 이러한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진단 이후에는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나는 오늘 얼마나 아픈가. 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지금 좋지 않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병원에 갈 정도여야 아픈 것일까. 오늘 일을 하지 못할 정도라는 기준은 누가 정할까. 어제와 오늘의 상태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어제는 일을 했고 오늘은 쉬고 싶다면, 오늘의 휴식은 정당한 것일까.’
질병은 진단명이 붙지만, 사람이 경험하는 상태는 그렇게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다. 괜찮음과 아픔 사이에는 수많은 중간 상태가 있다. 우리는 그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그런데 학교와 직장, 때로는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조차 ‘괜찮다’와 ‘아프다’를 비교적 분명하게 구분하고 싶어 한다. 그래야 언제 쉬어도 되는지, 혹은 언제 배려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나는 상담을 받을 때에도 비슷한 순간을 경험했다. 상담은 원래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을 꺼내놓을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누군가 앞에 앉으면 나의 상태를 꽤 잘 설명해야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언제부터 힘들었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하지만 정말 힘든 순간에는 오히려 그것을 설명하는 일이 어렵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례대로 정리할 수 없고, 어떤 감정인지 정확한 단어를 고를 수도 없고, 왜 그런지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그저 모든 것이 버겁거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거나, 평소보다 세상이 조금 더 무겁게 느껴질 뿐이다. 도움을 받으러 갔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는 것 같은 역설이 생긴다.
어쩌면 우리가 조금 더 질문해야 하는 것은 “왜 우울한가”보다 “왜 우리는 우울을 설명할 수 있어야만 쉬게 해주는가”인지도 모른다. 모든 감정에는 당장 찾아낼 수 있는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고통에 이미 이름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다. 과거에는 이름조차 없었던 질병과 경험들이 있었듯, 지금 우리에게도 아직 충분히 언어화되지 않은 몸과 마음의 상태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은 어디에 놓여야 할까. 나는 때때로 내가 느끼는 것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감정까지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생각해본다. 진단서가 없어도, 결정적인 사건이 없어도, 자신의 상태를 매끄러운 문장으로 설명하지 못해도 “오늘은 조금 어렵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 그리고 그 말만으로 잠시 멈추고 쉬어도 되는 사회.
어쩌면 ‘가짜 우울’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감정의 이름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가짜라고 의심하게 만드는 사회가 만들어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필자 소개] 이은선 : 고등학생 시기 학칙 개정과 학생인권조례 제정 활동을 하며 청소년 인권 운동을 만났다. 청소년이 학교와 사회에서 그저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부당한 순간에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시민이 될 수 있기를 고민하며 활동해 왔다. 현재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폭력에 반대하며 비건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청소년-시민입니다』, 『노키즈존 한국 사회』 등을 공저했고 청소년의 경험과 권리, 젠더화된 규범에 대해 글을 써왔다. 주변 존재들에 물들고, 물들이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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