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한국 여성음악인 재조명-1

주문정언 | 기사입력 2004/03/01 [00:26]

장덕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한국 여성음악인 재조명-1

주문정언 | 입력 : 2004/03/01 [00:26]

1990년 2월 4일. 이상은이 ‘담다디’로 겅중거렸고, 이선희가 시집을 발표했으며, 김완선과 이지연이 누나부대를 몰고 다니던 그 무렵이었다. 아 물론, 변진섭과 이승철이 쌍벽을 이뤘고 홍콩 느와르가 유행하던 그 무렵이기도 하다.

스물아홉, 한 여자 가수의 죽음이 알려졌다. 밝혀진 사인은 수면제 과다 복용이다. 그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귀여운 외모, 씩씩한 무대매너. 그런데도 죽음 이후 세상에 알려지기로 그는 늘 우울했다. 죽기 전 묘하게도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란 노래를 불렀다. 그의 보이쉬한 평소 패션 코드와 달리 공주처럼 꾸민 화려한 자켓 사진에다, 일설에 의하면 1989년 어느 날 동료였던 양하영과 임병수를 불러 놓고 “맘에 드는 곡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던 일화. 그래서일까. 그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추측이 돌았다.

최초 여성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

장덕의 죽음을 두고 넋두리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장덕을 기억하는 이유의 대부분이 바로 ‘자랑스러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장덕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혹시 귀여운 보조개와 동그란 눈, 단발머리의 소녀가수 이미지만을 떠올리는 건 아닐까? 그가 즐겨 입던 쫄바지와 패드가 두툼하게 들어간 헐렁한 자켓, 즐겨 쓰던 동그란 빵모자-지금으로선 조금 촌스러운-와 같은 그 패션감각은 아닐까?

이전에도 그를 말할 때 싱어송라이터나 프로듀서란 말보다는 그의 예쁜 외모와 늙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에 대한 찬양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사람이다. 그 당시로서는 드문 싱어송라이터였고 그의 곡을 부르고 싶어했던 많은 동료 가수들을 가진 음악인이었다.

장덕의 등장은 1977년 ‘소녀와 가로등’때였다. 이 곡은 진미령이 불렀는데 국제 가요제의 규정상 작곡가와 가수가 함께 무대를 꾸며야 했기 때문에, 당시 겨우 고등학생이었던 장덕이 빵모자를 눌러쓰고 나와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렇게 데뷔한 장덕은 1980년대 당시에는 신세대적인 감각이 출중했던 가수이자 프로듀서였다.

때문에 그의 동료들은 갑작스런 비보를 안타까워했으리라. 그의 장례식 날 이선희가 자신의 시집에서 추억하길 “너무 많이 남은 너의 삶을 묻어야 했을 때. 나는 무서웠다”라고 했고, 지예가 별밤 추모 콘서트에서 “이제 누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까”라고 통탄했다. 박혜성이 그의 사진을 안고서 장례행렬에 섰고 동료들이 그가 만든 대표 곡들을 모아 추모음반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 장의 추모앨범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5장의 솔로 앨범과 베스트 앨범, 사후의 추모앨범 그리고 현이와 덕이 때 앨범까지 합한다면 약 8여장의 앨범을 만들었다.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였고 MBC국제 가요제의 3년 연이은 수상곡 작곡자였다. 1987년에는 ‘님 떠난 후’란 3집 앨범의 타이틀 곡이 가요톱텐 연속 5주 1위라는 히트행진을 했었고, 테네시 대학에서 정식으로 작곡을 공부하며 미국 유학생활을 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먹히는’ 그의 곡으로는 신수경, 조성모 등의 가수들이 리메이크 한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다. 장덕이 작곡해서 이은하가 불렀던 이 곡은 왁스를 비롯한 많은 가수들이 다시 부르며 인상적인 무대를 선보였고,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된 <천생 연분>에서 황신혜가 울면서 이 노래를 불러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주 많은 음악인을 이야기할 때, 그의 수많은 활동이력들보다 수수께끼 같은 죽음, 오빠 장현의 동생이라는 것, 혹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우울한 기질이 있었던 가수였다는 점 등이 첫머리에 꼽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판 카펜터즈를 꿈꾸던 그의 음악인생

장덕은 첼리스트인 아버지와 서양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오빠 장현도 일찍 음악을 시작해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렇지만 부모의 이혼 이후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그는 동양사상에 빠져든 아버지와 음악활동에 바쁜 오빠 사이에서 늘 혼자 집을 지키는 일에 진저리를 쳤다고 한다.

나중에는 오빠와 드래곤 랫츠(Dragon Rats)라는 이름으로 미8군 무대에서 통기타를 연주하며 음악활동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한국판 카펜터즈를 꿈꾸었다. 전에도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숙제를 빌미로 오빠에게 배운 기타로 늘 오선지와 씨름하며 노래를 불렀고 <누가 누가 잘하나> 등의 프로에 여러 번 입상한 경력이 있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중학교 2학년 때 작곡한 ‘소녀와 가로등’이 MBC국제 가요제에서 입상했고, 국제 가요제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 1977년 진미령 이후 3년 연속으로 수상곡 작곡자가 된다.

연예계로의 데뷔는 <마음의 행로>에 출연하면서부터였는데 곧이어 ‘현이와 덕이’라는 남매듀오로 음악계에 신고식을 치루었다. 안양예고에 진학하면서부터는 10여 편의 하이틴 영화에 출연하면서 아역스타로도 급부상한다.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테네시 주립대학에서 작곡공부를 했지만 짧은 결혼생활에의 번민과 향수병에 시달리며 한국으로 다시 도망치듯 들어와 솔로로서의 첫 앨범 <날 찾지 말아요>를 발표했다. 그러나 3년간의 공백과 바뀐 가요계 환경은 그에게 냉담했다. 이때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의 음악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우울증 증세가 깊어졌고 식음을 전폐하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살았다.

그러던 중 그를 정상에 올려준 곡이 바로 1987년 가요톱텐 연속 5주 1위곡이었던 ‘님 떠난 후’다. 당시로선 멜로디나 목소리, 노래 스타일 등에서 파격적인 면을 보여줬다. 장덕의 3집 앨범은 1986년 뮤직박스 차트 20위 권에 들기도 한 ‘어른이 된 후에 사랑은 너무 어려워’까지 아울러 수준작으로 평가 받는다. 그 당시 신선한 반응을 얻었던 이선희나 정수라와 함께, 실력과 독특한 스타일 면에서 주목 받는 가수로 떠오른다. 또 작곡가로서 이선희, 진미령, 이은하, 양하영, 임병수 등에게 곡을 주면서 자신의 앨범 프로듀싱 뿐 아니라 다른 가수들의 음반 작업에까지도 참여하게 된다.

장현도 그 동안의 밤무대 생활을 정리하고 코아기획이라는 매니지먼트 회사를 통해 장덕에게 더욱 힘을 주려고 애썼고, 장덕 스스로도 팬클럽 코알라를 만들 구상을 하며 자신의 팬 층을 조직화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4집 앨범에서는 김파의 곡인 ‘얘얘’와 김범룡의 곡인 ‘서울의 밤거리’란 타 작곡가들의 곡을 실으며 새로운 시도를 하려 애를 썼는데 반응이 좋지 않았다.

1989년은 이상은이 ‘담다디’로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고 신선한 얼굴의 많은 가수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던 때다. 김완선의 현란한 댄스나 이지연의 청초한 목소리, 이승철과 변진섭이란 남자가수들의 라이벌 대결, 대학가요제 출신의 무한궤도가 배출한 신해철 역시 이 당시 가요계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1988년의 ‘얘얘’가 든 4집 앨범은 10대 취향이라는 평을 받았고 인기몰이에도 실패했다.

뒤이어 1989년에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발표하지만 반응은 썰렁했고, 음반 매니지먼트 회사로 그를 뒷받침해주던 오빠 장현의 설암 판정으로 장덕은 오빠와 오빠 가족들을 돌봐야 했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이전의 우울증이 재발했고,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KBS드라마 <구리 반지>와 6집 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는 결국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14주기를 맞는 장덕을 추모하며

장덕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14년째다. 그가 죽자 사람들은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곱씹으며 노랫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측했고, 그의 앨범은 서서히 절판되어갔다. 어머니가 낸 책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도 절판된 지 오래다. 사람들은 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를 안타까워해야 할 이유를 이제 분명히 말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장덕이라는, 뛰어난 국내 여성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위치에 대해서 말이다.

당시 그와 함께 활동하던 여자가수들 중 이지연은 비록 사랑을 찾아 떠났지만, 김완선은 여전히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고, 이선희는 콘서트에 나름대로 매진하고 있으며, 특히나 이상은은 홀연히 돌아온 신비롭고 철학적인 아티스트가 되어 가슴을 찡하게 해주었다. 세상과 그의 내면세계는 철저히 불화했지만 한 쇼 프로그램에 나와 송창식의 ‘참새와 허수아비’를 능청스레 부르는 배짱이 있었던 장덕이었다.

나는 그가 그저 수면제에 의존해 나약하게 죽어간 불행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열일곱의 나이에 자작곡을 들고 나와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죽기 얼마 전까지도 양하영과 임병수에게 자신의 곡을 선물했으며, 지금까지 가수들에게 다시 불려지는 곡을 작곡했고, 1980년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보고 들었던 사람들의 기억에 ‘님 떠난 후’나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와 같은 선율을 남긴 그다.

유재하를 비롯한 비슷한 시대, 비슷한 배경의 남성음악인들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함에도 왜 장덕에 대한 재평가는 미비한 것일까. 그도 정식으로 작곡을 공부했고 자작곡들을 많이 남겼는데, 그의 음악이 소통되는 공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2002년 12월 ‘이즘’이란 음악 웹진에서 칼럼리스트 지운은 “어쩌면 1980년대 음악의 끝은 고 유재하의 죽음이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 아니라 장덕의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던 바로 그 시기였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의 음악적 감성이 설령 지금의 시기와는 맞지 않는다거나 기술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당대 뛰어난 여성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서의 장덕을 되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 활발히 활동하는 여성음악인들을 지금도 찾기 어려운 이 시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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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훈채 2017/08/21 [13:04] 수정 | 삭제
  • 뮤지션이죠. 고인이된 다른가수들에 비해 평가절하 되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제가보기엔 음악이 장르를 불문하고 만들어졌다는 점. 인기를 위주로 작사,작곡되었다는 점. 여성이라는 점. 에서 평가절하되는것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그러나 음악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예민한 감수성, 아름다운 노랫말,멜로디등 불우한 환경이 아니었다면 음악의 한 장르를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한 뮤지션이 되었을 인물이아니었을까 합니다.
  • drink 2004/03/13 [12:51] 수정 | 삭제
  • 그 곡 명곡이죠.
    무척 좋아했던 곡입니다.
    유재하 음악처럼 지금도 다시 불리워지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기사 잘 봤습니다.
  • 한솔로 2004/03/10 [08:56] 수정 | 삭제
  • 장덕이라는 가수를 좋아했고, 그 가수가 재조명될만한 위치에 있다는 건 알겠지만,
    일다적 재조명이라는 면에 있어 이 기사가 부합하는지 좀 고개가 갸웃거리네요.
    장덕에 대한 장문의 프로필이라는 느낌. 왜 재조명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주관(좋다), 객관(좋다더라)이 불투명하고요.
    그리고 여성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라는 말은 다소 애매하네요.
    자신의 작곡한 노래를 자신이 부른 게 싱어송 라이터라고 하여
    장덕을 여성으로서 그 최초로 잡는다면
    그 기점, 장덕이 몇년도에 무슨 노래를 불러 그런 건지 궁금하네요.
    그에 대한 명시가 없이 호칭으로서 '여성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는
    장덕의 재조명에 대한 그저 호명에 그치지 않을까요?
  • 무심 2004/03/05 [18:03] 수정 | 삭제
  • 어쩌면 사람이란 선택적 기억을 하는 동물이라 타인과 공유하지 못하는 것이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장덕을 아냐고...물었던, 그리고 한 동안 장덕을 그리는 마음을 걷어내지 못했던...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틈이 존재할 수 밖에...
    .
    여성음악인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꾸준히 읽어보도록 하지요.
  • 햇살나눔 2004/03/05 [15:47] 수정 | 삭제
  • 기사의 제목을 보는 순간,
    어릴 적 '장덕'이란 이상한 이름을 가진 가수가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났습니다.

    제가 본 화면에는 그녀가 죽었다는 침대가 고스란히 등장했었어요.
    그때 전 장덕이 누군지도, 죽음이 뭔지도 모를 때였지만
    이후에도 계속 그 장면만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장덕의 음악을 찾아 들으며
    왜 그렇게 장덕이란 사람이 오랜 시간 제 기억 속을 떠나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아하하핫 2004/03/02 [00:19] 수정 | 삭제
  • 저는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장덕이라는 가수를 몰랐어요.
    근데 기사 읽으니 그런분이 있었다는게 놀랍습니다.
    마치 역사책에서 위인을 보는 듯한 느낌이였어요. ^^;;;
  • maroo 2004/03/01 [19:55] 수정 | 삭제
  • 안그래도 장덕에 대한 생각을 얼마 전에
    했었는데 기사 잘 읽고 갑니다.
    배고픈때 자~알 만든 정식을 먹은 기분이네요.
  • 바람언덕 2004/03/01 [11:01] 수정 | 삭제
  • 오래 전에 음악하는 친구가 장덕을 가리켜서 천재 뮤지션이라고 얘기했던 게 기억납니다. 제 기억에 장덕은 그냥 잠시 인기를 얻었던 가수 정도밖에 아니어서 그녀가 천재적인 사람이었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었어요. 일다에서 기사를 보니까 그녀에 대해 몰랐던 것을 알게 되네요. 싱어송라이터라는 것도 몰랐으니까요. 갑자기 장덕이 그리워지는군요. 왜 그땐 몰랐을까 후회도 되구요. 앞으로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여성 뮤지션들 재조명해주세요.
  • tt- 2004/03/01 [02:18] 수정 | 삭제
  • 정말 멋진 기획입니다!
    앞으로 기대할게요!
  • 로키 2004/03/01 [01:26] 수정 | 삭제
  • 한국 여성음악인 재조명이라니, 정말 반가운 기사예요.
    장덕을 그냥 작곡재주가 있는 가수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주문정언 기자님의 글을 읽으니 그녀의 삶과 음악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네요.
    대표곡들을 다시 한 번 들어봐야겠어요.
  • 멋녀 2004/03/01 [00:53] 수정 | 삭제
  • 한국 가요계에서 '뮤지션'으로 불릴 수 있는 여성이 소수라는 것..
    그것은 얼마나 한국 가요계가 실력있는 여성 뮤지션들에게 인색했나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하는 것 같아요.

    멋진 발굴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연재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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