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보는 예민한 감수성 <레퀴엠>

종교예술의 형식을 빌린 반전메시지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3/05/29 [22:13]

전쟁을 보는 예민한 감수성 <레퀴엠>

종교예술의 형식을 빌린 반전메시지

김윤은미 | 입력 : 2003/05/29 [22:13]
전쟁이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이유 없이 파괴되고 있는데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다. 미국의 이라크 공습이 시작된 당일 반전집회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은 부시 정부에 대한 분노 이상으로 무력감에 시달렸다. 사실 이 무력감은 반전을 외치는 순간에도 집회 공간을 사로잡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당위’를 비웃기라도 하듯, 거대하고 공포스런 ‘적’이 출현한 순간 - ‘나’는 한없이 작은 존재로 축소되고 머리 속에는 묵시록적 예언들이 떠오른다.

이제는 ‘전쟁’ 아닌 다른 이슈들이 부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이 시선을 끈 이유는 서문의 한 문장 때문이다. “(전쟁이라는)주제의 무거움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종교예술의 형식밖에 없는 듯 하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인간은 (종교의 편협함과는 상관없이) 종교에 손을 내밀고, 의례(종교예술)를 통해 자신의 절망적 상태와 구원을 향한 열망을 표현한다.

저자 진중권씨는 전쟁이 가져다주는 막막함에 착안, 종교 의례에 참석하듯 경건한 자세로 전쟁과 전쟁을 대면한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래서 지금까지 출간된 전쟁 관련 책들이 주로 이라크 침공 요인을 정치적으로 분석하거나 미국의 야만성이 어디서 기원하는지를 논한 것과 달리, <레퀴엠>은 전쟁을 겪는 일반인의 경험, 전쟁이 인간에게 지각되는 과정 및 그 결과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책의 형식적 구성 역시 종교예술의 형식에 맞추어져있다. <레퀴엠>의 앞뒤 제외 6장은 벤자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종교음악)의 곡 목차를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원 곡에서 브리튼이 윌프레드 우언의 반전시를 텍스트로 사용한 것처럼 저자 역시 그 동안 여러 매체에 기고한 반전 글들을 결합해 책 전체를 또 하나의 전쟁 레퀴엠으로 만들고자 했다.

전쟁의 참상은 상처를 남긴다

책은 “우리가 지금 체험하고 있는 일들이 20세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능할 수도 있다는 놀라움"으로 세계대전의 야만성을 고발한 발터 벤야민에 이어 그의 말이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한 것에 놀라움을 표시하며 시작된다. 저자는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좌절하지만, 전반적으로 경건한 논조를 유지하며 논지를 전개한다.

저자는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파견 근무하던 기억을 더듬으며 전쟁 상황과 비슷했던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폭발사고를 당해 죽기 직전 병원에 실려온 군사들을 향해 던져지는 말은 “어디 살리려고 데려온 거냐. 아직 살아있으니까 데려온 거지.” 이에 대해 저자는 “이런 참상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영혼에 상처를 남긴다”고 언급한다. 이는 참혹함의 정도가 한도를 넘어서면, 이를 지각하는 인간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무기력함과 상처를 남긴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여중생 주검 사진이 버젓이 포스터로 사용되는 현실에 대해 “(그 사진은)그들을 한낱 ‘살덩어리’로 격하하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또한 저자는 이 같은 전쟁의 참상을 예술을 감상하듯 즐기는 자들을 질타한다. 미국의 바그다드 공습 작전은 “적을 꼼짝 못하게 하기 위해 적에게 압도적인 차원의 충격과 공포를 가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공교롭게도 ‘충격과 공포’는 미의 체험 가운데 숭고한 대상에 대한 체험을 기술할 때 사용하는 술어다. 전쟁을 아름다운 대상으로 간주하고 전쟁을 미적으로 체험한 최초의 흐름은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미래파(현대 미술의 유파 중 하나)였다. 그들은 ‘전쟁은 아름답다’고 선언했다. 21세기에 도달한 지금 인간의 파괴력은 현저히 상승해, 현대전은 이제 아름다운 대상이 아니라, 인간을 압도하는 숭고한 대상이 되었다.

저자는 전쟁이 ‘아름다운 대상’에서 ‘숭고한 대상’으로 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유미화하고 전쟁에서 미적 체험을 느끼는 변태성은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변태성은 미래파에 이어 미국 펜타곤에서 전쟁을 감상하는 자들로 이어진다. 영국 철학자 버크의 논의대로 광포한 폭풍우도 안전한 곳에서 바라본다면 즐길 수 있듯 이 ‘충격과 공포’도 안전한 곳에서 바라본다면 큰 기쁨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라크 공습을 정당화하는 것들

그렇다면 이라크 공습의 가공할 파괴력을 감상하도록, 상처에 대한 감수성을 무디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레퀴엠>은 전쟁의 당사자가 아닌 우리의 위치, 전쟁을 한낮 오락거리로 보도하는 주류매체, ‘신의 사명’ 운운하며 예수재림을 패러디 하는 부시 정부의 작태 등을 요인으로 꼽는다. 전자오락에 익숙한 아이들은 폭격을 하는 것이 정의의 사도라고 당연하게 믿고 “이라크에 가서 폭탄을 던지고 오고 싶다”고 말한다. 어른들은 콜로세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자 밥이 되는 것을 지켜보던 로마인들처럼 야만스럽게 전쟁을 흥미 거리로 바라볼 뿐이다.

저자는 전쟁에 무딘 한국 시민사회의 감수성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해서 반전을 외친 사람들에게까지 ‘정말로 전쟁에 반대한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또한 저자는 친미자유주의자 복거일을 예로 들어 ‘미국이 하면 전쟁도 옳다’는 복거일식 친미 주의는 그 개인에 한정된 세계관이 아니라 이 사회를 이끌어온 정치 경제 엘리트들의 세계관이며 기득권을 유지하는 물질적 비법이라고 지적했다.

소 닭 보듯 전쟁을 바라보는 무딘 시선 이상으로 폭력적인 것은 전쟁을 해도 괜찮다는 논리다. 2천명이 넘는 이라크 민간인의 죽음 앞에서 미국의 군사 전문가들은 과거 공습에 비해 민간인 희생자들이 줄었다며, 전쟁사에 기록될 업적으로 꼽고 있단다. 저자는 이 발언이 앞으로 전쟁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를 보여준다며, 평화주의자들이 무고한 이들의 죽음으로 반전 논거를 댈 때 전쟁 광들은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는 하이테크 전쟁’이라는 개념으로 반전을 피해갈 것이라고 예측한다. 실제로 이 같은 논리를 통해 민간인의 희생은 감수할 만한 숫자로 격하됐다.

전쟁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논리는 후세인 정권의 독재성에 맞서 미국이 이라크를 해방한다는 것. 침공하는 부시와 침공 당하는 후세인 - 사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옳은지 답하기는 어렵다. 바그다드가 시민들의 저항 없이 함락되자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해방론에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질문은 이라크 민중들의 주체적인 저항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저자의 관점에서는 후세인의 독재 정권이 피를 흘리며 사수할 가치가 없는 만큼 바그다드의 빠른 함락은 당연하며, 이라크 민중들이 이라크에 들어설 친미 정권을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권으로 바꾸어내는 싸움이야말로 본격적인 이라크전인 것이다.

‘소수자’의 절박함이 아닌, 일반인의 경건함

<레퀴엠>은 전쟁에 대한 저자의 예민함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죽은 자를 위한 미사’라는 부제에 맞게 피해자를 애도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지만, 미사를 올리는 듯한 경건한 자세는 책 곳곳에서 느껴진다.

물론 전쟁 피해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이 <레퀴엠>을 통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다. 여성과 소수자의 이름으로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주의자·반전주의자들의 경우, 윤금이씨 주검 사진사용에 반대하는 등 민족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반전운동을 비판해왔다. ‘주류’ 반전운동을 비판한 근거는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의식이 부족하고 개개인의 피해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쟁 피해를 겪는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것을 주장해왔다.

 
또한 전쟁의 피해가 병사와 민간인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는 현상적인 수준의 분석에 그치지 않고 피해의 차이에 파고들어 전쟁시 일어나는 폭력이 일상의 차별에서 연장선상에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즉 일상적 차별을 보다 많이 겪는 여성과 소수자들,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전쟁시 보다 많은 피해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풍부한 감수성은 동일하지만) 전자가 전쟁이 곧 자신의 일이라는 ‘소수자’의 절박함으로 전쟁 반대를 외친다면 후자인 <레퀴엠>은 한 남성 일반의 예민한 시선으로 경건하게 전쟁을 바라보며 반전의 논리들을 제시한다.
  • 도배방지 이미지

  • luzin 2003/06/05 [23:58] 수정 | 삭제
  • 오늘 이 책을 읽었습니다..
    전쟁을 몸소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그게 시대의 특혜일진 몰라도
    그러나 그에 버금가는 못볼 꼴을 보고 살아가는 시대지요..
    참으로 미국이란 나라가 아니, 부시라는 사람과 그와 함께 뜻(?)을 함께 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의 이기에 혀를 몇번이고 내두르게 됩니다. 인간으로 안보입니다.
    좀더 시야를 확장시켜 내 육체 하나 편하자고 사는 세상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와 인도주의가 실현되었음 하는 맘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