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에 만난 금붕어”

선천성 그림쟁이 민희

석은지 | 기사입력 2006/05/02 [17:33]

“지난 밤에 만난 금붕어”

선천성 그림쟁이 민희

석은지 | 입력 : 2006/05/02 [17:33]
누군가가 지어준 ‘안나’라는 애칭이 어울릴법한 차분한 외모와 목소리를 가진 그녀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작년 12월. 내년 계획 중에 방에서 드로잉 전을 하겠다는 말을 할 때였다. 이제 그림을 그린 지 1년도 채 안 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그 자신감이 부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방’에서 전시회를 하겠다는 그 생각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원치 않는 자퇴, 전화위복

‘현재’ 그녀는 미대 지망생. 모 대학 환경공학과를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두었다. 환경공학과가 조금 의외다 싶었는데, “아빠가 자신이 배우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나보고 어렸을 적부터 판사가 되라고 했거든요. 나는 언제나 ‘네’라고 대답했는데, 그게 어느 날부터 ‘네’라는 대답마저도 하기 싫어졌어요. 그래서 아빠가 원하는 판사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이과로 갔어요.”라며 웃는다.

내신은 최상위권이어서 내신으로 성적 맞춰 대학에 갔는데, 2학기째에 더욱 어려워진 형편에 학자금대출마저 거절 당해 학비를 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돈을 벌어 등록금을 내는 게 가능한 국립대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아르바이트와 입시 준비를 하면서 “무슨 공부를 해야 할까!” 고민을 하다가 “용기를 내서 생각해낸 게 미술이었죠. 내가 원하지 않은 자퇴를 했을 때 많이 속상했지만 왠지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됐고 그래서 미술을 시작하려고 마음먹은 거예요.”

아빠의 반대는 없으셨냐고 물으니 “아빠는 본인이 학비를 대줄 수 없다고 생각하시니까 아무 말씀이 없으셨어요. 근데, 얼마 전에 아빠가 (제가)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미대에 가서 제대로 배웠으면 좋겠다고요.” 그림을 그리고 싶긴 한데 미대를 꼭 가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빠의 한 마디에 흔들리는 마음 꽉 부여잡고 대학에 꼭 가야겠다고 결심했단다.

“숨 쉬는 구멍”

그녀는 자기가 가장 잘 한 일로 고등학교 때 시 동아리에 가입한 걸 꼽는다. 집에는 라디오도 CD 플레이어도 컴퓨터도 없어서 영화나 음악을 잘 접하지 못했고, 극장에 가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대신 동아리 친구들과 좁은 동아리 방의 모든 빛을 검은 종이로 차단하고 촛불 하나를 켜놓고 자작시를 놓고 토론한 경험, 친구들이 들려준 음악, 그리고 시인이 꿈이었던 동아리 담당선생님 덕분에 그녀가 몰랐던 ‘다른 세상’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땐 시를 짓는 것이 내 숨통이었어요. 숨 쉬는 구멍이요. 지금은 그 자리를 그림이 차지했고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 동아리에서의 경험이 지금 그림을 그리게 만든 거 같아요.”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그녀를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다. 지하철에서도 그리고, 집에서도 그리고. 화실에서도 그리고, “언니언니, 저 새로운 거 하나 발견했어요.”하며 그녀의 실험적인 드로잉을 보여준다. 어디를 가든지 하물며 생수를 사러 가더라도 길거리에 버려진 것 하나 허투로 보지 않고, (어쩔 땐 왜 민희한테만 보이는 걸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언니언니, 저 이거 주웠어요.”라고 정말 금덩이를 주운 것마냥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재미나게 쓸 데가 있을 거예요.”라고. 결국에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보는 이로선 감탄하는 게 일이다.

얼마 전 그녀는 전라도에 ‘전수’(각 대학교에 있는 풍물동아리 학생들이 일주일간 같이 생활하면서 전수관 선생님들로부터 악기 치는 것과 악기 다루는 사람의 자세 등을 배우고 온다) 다녀왔다. “일어나서 악기치고, 밥 먹고 악기치고, 쉬고 악기치고… 하루 종일 악기만 치고 오는 거죠. 그곳에 가면 악(樂)에 미친 애들 많아요.”

그곳에 다녀와서는 금이 간 꽹과리 위에 금붕어를 그려 넣고 “지난밤에 만난 금붕어는/ 침대에서 나와 소리에게로 갔다/ 그곳에는 달콤한 무지개가 피고 간지러운 금물결이 인다.”라는 글을 적었다.

‘반달’ 이야기

이렇게 아이디어가 퐁퐁 쏟고 의욕이 넘치고 사람과 일을 펼치는 걸 좋아해, 마음 맞는 사람들과 드로잉모임도 만들고 조만간 펼칠 퍼포먼스를 위해 사람들을 꼬드기기도 하고, 그녀가 클럽 장으로 있는 ‘반달’이라는 회원 수 8명의 클럽도 만들었다. 그저 친한 화실 사람들의 모임인 줄 알았는데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부모님이 제가 어렸을 적에 헤어지셨던 얘기나, 뭐 엄마 얘기나 이젠 아무렇지 않은데, 얘기하는 중에 말이 나와 버렸어요. 근데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어? 나돈데.’라고 말했어요. 누구는 나와 비슷한 경우였고, 어떤 애는 어느 한쪽 분이 계시지 않거나, 복잡한 이유로 따로 떨어져 살거나, 아님 사이가 매우 안 좋으시거나. 뭐.”

그러고 보면 사회에서 떠들어대는 소위 ‘정상’적인 형태의 행복한 가정이란 얼마나 그 실체가 희미한 것인지를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가족에 대한 상처 하나쯤은 이고 가는 것. 그리고 이건 튀거나 유별나지 않는 평범한 것. “반달이라는 이름엔 이런 의미도 있어요.”라고.

가족에 대한 상처 하나쯤 이고 가는 것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알았던 친구의 엄마가 도박을 하셨는데 나중에 그녀 어머니와 친해지셨단다. 그녀의 엄마는 그렇게 도박에 빠지게 됐는데, 초등학교 때까지 동생을 엎고 그녀의 손을 잡고 도박장인 ‘하우스’에 데리고 다녔다고.

“한 번은 하우스에 경찰이 들이 닥친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도망치는데 엄마와 나와 동생이 다다른 곳은 그 건물 2층이었어요. 엄마가 뛰어내리라는데 너무 무서웠거든요. 근데 뛰어내렸어요.” 그때는 엄마와 헤어지는 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었다. “제가 더 커서는 동생을 나한테 맡기고, 집엔 잘 안 들어오고. 3학년 때까진 학교에 자주 빠졌거든요. 아빠가 출근하려 하면 나는 집에 혼자 있으니까 너무 무서운 거에요. 그러면 아빠가 마당에 나가 참새 한 마리를 두 손에 담아 와서 참새랑 놀면서 아빠 기다리라고, 그러면 나는 정말로 참새랑 놀면서 아빠 기다리고 그랬어요.”

어렸을 적엔 엄마가 너무 보고 싶기도 하고 또 너무 싫기도 했단다. 그런데 지금은 보고 싶지는 않은데, 그 ‘사람’의 삶을 생각하면 그냥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엄마도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딸들은 이렇게 자라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엄마’였는데 이젠 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말. 엄마를 이해하긴 힘들지만, 어쩔 수 없었을 그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것.

그녀를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어 보이는, 태양빛으로 뜨거워진 도로 위를 걸어가는 사람이 생각난다. 그 길 위에 그녀만의 흔적을 남겨놓지 않을까. 갈라진 아스팔트 위에 또 다른 의미를 불어 넣지 않을까. 쭈욱 걸어 나갈 그녀의 길을 계속 옆에서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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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ue 2006/05/07 [22:42] 수정 | 삭제
  • 꽹과리 위에 자리를 잡은 금붕어.
    생각도 못한 궁합인데 잘 어울리는 군요.
  • 2006/05/06 [23:40] 수정 | 삭제
  • 지난 밤에 만난 금붕어, 오늘 밤은 또? ^^ 마음도 이야기도 감각적이고 예쁘네요.
  • 2006/05/03 [02:29] 수정 | 삭제
  • 금붕어 그려넣으신 금이 간 꽹과리도 멋있고,,,
    “지난밤에 만난 금붕어는/ 침대에서 나와 소리에게로 갔다/ 그곳에는 달콤한 무지개가 피고 간지러운 금물결이 인다.”라는 글도 쵝오.... 꽹과리 소리도 좋을 듯...
    그거 정말 우습죠. 정상적이라고 하는 핵가족 가정 형태라는 거, 가족내부에 파열로 다들 힘들어 하면서 대충 짜맞추고 살면서,좀만 성장환경이 다르면 비정상적이라고 부르고, 실은 자기들이 더 힘들면서... 쿡쿡
    민희님 아니 안나님 전시회와 퍼포먼스 하실때 초대해줘요..방에서 전시회 신선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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