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문제 아닌 ‘나’의 문제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피해여성의 ‘존엄’②

사카모토 치즈코 | 기사입력 2006/05/02 [17:54]

그들의 문제 아닌 ‘나’의 문제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피해여성의 ‘존엄’②

사카모토 치즈코 | 입력 : 2006/05/02 [17:54]
<일다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현재 담론의 지형을 살펴보고 운동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기획을 연재한다. 그 출발로 우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담론과 논의 지형들을 살핀다. 다음 주에는 생존자 할머니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 문제의 ‘해결’이 생존자 할머니들의 현재 삶과 존엄을 고민해야 문제임을 제기하고, 이를 위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운동과 생존자 할머니들의 복지 문제를 나누어 접근하는 논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공동 대응과 연대를 위해 일본 내에서의 운동의 흐름과 논의의 지형을 살피고, 또 한국 사회와는 다른 점령지의 역사를 가진 필리핀에서의 생존자 경험과 운동의 역사 및 현재 주요 이슈들을 소개할 것이다. -편집자 주>


‘존엄’에 대한 의식 전환

흔히 ‘존엄’이라는 말은 ‘인권’ 특히 ‘삶’ 혹은 ‘죽음’에 대한 논의에서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다. 사형, 안락사 및 존엄사(尊嚴死), 노예, 학대, 피억압자 등에 대한 ‘삶’ 혹은 ‘죽음’의 정당성, 다시 말해서 ‘사는 권리’나 ‘죽는 권리’를 주장할 때 윤리학, 의학, 법학, 종교학적 관점에서 ‘존엄’이라는 개념은 폭넓게 사용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존엄을 뺏기다’, ‘존엄을 회복시킨다’, ‘존엄을 지킨다’ 같은 표현은 흔히 사용된다. 여기서 사용되는 ‘존엄’은 마치 피해여성들의 존엄이 여성들 몸에서 분리되어 위안소에서 잃어버린 것처럼, 현재 여성들의 몸은 존엄이 존재하지 않는 빈집인 것처럼, 따라서 빨리 회복시켜서 다시 존엄을 소유하는 여성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존엄’은 생겼다가 사라지거나, 나를 떠나서 몸과 분리가 가능한 것이 아니다. 존중을 받든 말든 한번 생기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즉 존엄은 사람의 탄생(임신, 출산)과 동시에 생기는 것이며, 그가 이 세상을 떠나도 그의 존엄은 살아 있다. 존엄은 그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든 무시하든 존엄은 사라지지 않다. 단지 무시당할 때 존엄과 함께 있어야 될 권리들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어 억압이 생긴다. 우리가 문제시해야 되는 대상은 바로 이 ‘억압’ 및 ‘억압구조’다.

국가는 국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 억압구조와 통제논리를 합리화하며 교묘하게 유지시켜왔다. 국가발전과 개인의 행복을 동일시시키고, ‘개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는 더 어려워졌다. 불쌍하게도 일본군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의 문제, 당사자와 지원자들만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열심히 싸우는 문제, 즉 일반 시민에게는 상관없는 문제로 설정되자마자, 개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자신들의 무관심을 개인의 (이 문제에 관심 갖지 않을) ‘권리'라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한 생각 자체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대한 우위성을 깨닫지 못해 타인을 배제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침묵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 될 수도 있다. 무관심하고 침묵하면서 그 문제에서 멀어져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또 하나의 권력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각하지 않는 폭력’(한나 아렌트)으로 피해자에게 작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누가 문제이고, 누구의 문제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그들’의 문제라고 생각했을 때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로 인식되었을 때 공감하고 연대할 사람들이 생겼다. 하지만 ‘우리’ 문제라고 인식했을 때 피해자의 ‘정체성’을 우리와 동일시하게 됐지만 피해 자체는 여전히 타자화하는 우를 범했다. 즉 ‘같은 민족’ 혹은 ‘같은 여성’이란 같은 정체성 하에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연대에 불과했던 것이다. 역시 ‘그들’의 문제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이냐 젠더냐라고 이분법적으로 대립하는 담론도 생겼다.

민족 혹은 여성으로서 ‘우리’라고 호명할 때 그 ‘우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다른 민족이나 남성)에게는 공감을 받지 못하거나, 그들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면제되면서 그들과의 연대를 이룰 수 없게 된다. 또한 ‘우리’라고 호명하자마자 민족, 여성, 피해자 등으로 피해자의 정체성은 고정된다. 즉, 피해자의 정체성에 상관없이, 피해자체에 대해 공감하고 가해자에게 분노하며 책임을 묻는 개인들이 형성한 ‘우리’라기보다는, 속하는 집단(민족, 여성)의 정체성으로 ‘우리’를 형성했기 때문에, 피해자의 피해는 집단의 유린, 모욕으로 변환됐다.

‘우리’ 정체성 때문에 분노할 수 있다면, 같은 피해라도 정체성에 따라 분노와 무관심이라는 다른 상이한 태도가 나타나며, 같은 피해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분열시킬 위험성이 생긴다. 그 정체성 역시 민족, 성별 같은 국가가 권력을 발휘하기 위한 통제장치로 만들어진 차이일 수도 있고, 그 분열자체가 국가가 의도한 함정일 수도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자신도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과 공포감, 경계(警戒)와 분노를 의식한 ‘나’의 문제라는 인식으로 출발할 필요가 있는데 아직도 어려운 것 같다.

피해자, 혹은 가해자로서의 위기감

그런 맥락으로 생각할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호칭자체가 사회문제로서 그 운동이 확산되고, 사람들의 관심을 호소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는 호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만든 일본군대에 가해책임이 있는 문제이며, 오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일본정부에게는 해결하는 행위자로서의 책임을 갖는 문제이며, 각 개인이 관심을 가져서 일본정부가 해결하도록 대화나 개입을 실행할 행위자로서의 책임져야 할 문제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여, 우리가 언제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지 모르는 불안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와 시민이라는 관계에서는, 정부가 국익을 위해 사회를 잘못한 방향으로 인도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과 책임이 시민에게 있다. 이것은 일본시민은 물론, 지구시민에게도 마찬가지다. 국적, 민족을 떠나서 누구나 자신의 생활안전을 확보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을 때 항의할 수 있어야 된다. 즉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이유는 사죄와 배상을 통해서 일본정부가 피해자였던 할머니들과 피해자가 될지도 모르는 ‘나’에게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음을 약속시키기 위해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전쟁이라는 비상시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범죄가 아니라 이미 여성의 성에 대한 착취구조가 존재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보다 과격하게 일어났을 뿐이다. 그 구조가 오늘도 여전히 끈질기게 남아 있는 것은 성매매 문제를 비롯해 여성이 공포와 억압을 느끼는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예컨대 2004년 이승연씨 누드 사건 때 소비대상이 된 남성(성)들이 자신이 그 누드의 소비대상이란 것을 잊고, 이승연씨에 대해 너무나 과격하게 비난하고 인권침해에 가까운 폭력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여성의 누드가 인터넷에 공급되자 폭발적인 접속 수를 보여줬다. 이런 남성(성)들에 대해 남성들이 성찰적인 태도를 보여주지 않는 한 여성들은 언제든 성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편 TV, 신문에서 보도되는 성폭력, 인권침해들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이 지나가는 이웃사람과 내가 같이 살고 있다. 그런 방관자들과 함께 사는 사회에서 만약 내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과연 누가 나를 도와주고, 함께 분노해줄까? 게다가 사회는 그런 피해와 분노에 대해 ‘전쟁’이나 ‘여성’의 팔자라는 말로 설명해버리곤 한다. 그것은 가해를 정당화하는 것이자 전쟁을 만든 사람, 여성에 대한 비하적 시각을 만들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면제해버린다.

여성이 성적 피해를 당하는 이유는 팔자가 아니라 남성(성)이 갖는 폭력성 때문이다. 그리고 방관자가 그런 폭력성에 대해 침묵해왔기 때문에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수도 있다. 여성들을 피해자로 만들 가능성뿐 아니라, 남성과 남성성을 내면화하여 피해자를 방치하는 여성들도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여성주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런 구조들을 습득할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을 분석함에 있어서 젠더(gender) 관점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나’를 접속시켜 ‘우리’의 연대로

그렇게 봤을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고 하면 마치 ‘위안부’가 된 여성들의 문제인 것처럼 들린다. ‘정신대냐, 위안부냐, 성노예냐’ 하는 피해자의 호칭문제와 함께, 문제의식을 보다 명확히 할 수 있도록 논의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위안부가 된 여성들의 문제’ 및 ‘할머니들의 문제’, 혹은 ‘할머니와 할머니들을 위해 함께 해주는 양심적인 사람들의 문제’로 보기 때문에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문제라는 이미지를 줄 수도 있다.

따라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도 역시 봉사자들에게 “우리의 문제(=피해 할머니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맙다”고 말한다. 당사자가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할머니의 그런 말을 듣고 ‘그래 당신들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그들과 나를 접속시켜서 ‘우리’의 연대가 가능해질 수 있도록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당사자들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문제라고 인식했어야 자신의 경험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문제가 아니라도 ‘나’의 문제인 자신의 경험을 밝힐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이나 ‘우리 여성’ 문제를 넘어서 각각 ‘나’의 문제로 설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고 재발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시기에 와 있다. 본 글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고 표기했지만, 무엇이 문제이며, 누가 문제이며, 누구의 문제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앞으로 적절한 용어에 대한 검토 및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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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5/09 [16:09] 수정 | 삭제
  • 할머니들은 현재를 살고 계시고 또 많이 돌아가시고 계시는데,
    사람들은 과거로만 기억하고, 과거만 책임을 묻는 것 같네요.
  • 사카모토 치즈코 2006/05/04 [10:20] 수정 | 삭제
  • 기사를 쓴 사카모토 치즈코입니다.
    읽어주시고, 좋은 의견들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문제로 설정한다...이 부분에 대해 참 어렵게 느끼는 분이 많으실 겁니다.
    저 역시 아직도 잘 못하고 있는 것 같구요^^;
    단.. 어떻게 하면 '나'의 문제로 설정할 수 있을까고 고민하셨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문제로 설정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답은 각각 다르고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정'(virtual reality)이 아니라 현실감(reality)이 중요하고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점도 포함해서 우리 함께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 2006/05/03 [18:19] 수정 | 삭제
  • 기사 잘 보고 있습니다.
    피해자나 피해집단, 피해가능집단, 동질성을 가진 이들의 동의를 구하기는 쉬워도 가해자의 성찰을 끌어내기는 어려운 일 같습니다.
    내가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이고, 우리도 강해져서 강간하자는 식의 또다른 가해반응들을 보면서 갭을 많이 느끼거든요.
  • 처자 2006/05/02 [22:29] 수정 | 삭제
  • 기사 잘 읽었습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 동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가 비단 -전쟁 시의 인권유린- 내지 -제국주의 하에서 희생당한 여성- 이라는 것을 넘어서서, 남성성-폭력으로 바라보는 점 특히 동감합니다.

    그러나, 각각 나의 문제로 설정하게 될 때.. 이 부분 의미가 잘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만약 저러한 상황이라면 이라는 가정을 통해 공감하고 소통하자는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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