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 드립니다. 제출하신 논문이 우수상에 선정되었습니다.”
2002년 10월 9일,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통일부가 주최했던 대학생 통일논문 공모전에 참여했는데 운이 좋게도 입상을 한 것이었다. 전화를 받고 어찌나 기뻤던지 정말 세상 전부를 갖게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10월 23일, 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논문 내용 중에 민감한 부분이 있는데 다른 내용으로 바꿔주었으면 합니다. 이메일을 확인해주세요.” 서둘러 내용을 확인한 후에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죄송하지만 이미 완성된 글을 바꾸기는 곤란합니다. 그 부분은 제가 가진 상식에 따라 쓴 거예요. 그래서 그 내용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자 담당자는 “이거 좀 당혹스럽네요. 저는 당연히 수정해 줄 걸로 알았는데. 극단적인 경우에는 입선이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담당자의 말에 곧바로 답했다. “취소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상을 받기 위해서, 상금을 받기 위해서 글을 고칠 수는 없어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취소되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양심의 자유, 학문의 자유와 관련된 문제라고 보거든요. 만약에 진짜 취소되면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할 생각입니다” 라고 덧붙였다. 나의 삶의 전환점이 된 ‘통일논문’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통일논문 사건과 ‘KAL858기’ 사건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길래 문제가 된 걸까. 내 논문이 문제가 된 건 “KAL858기 사건의 재조사가 필요하다”라는 문장 때문이었다. 흔히 ‘김현희 사건’이라고도 알려진 1987년 대한항공기 사건. 바로 그 사건의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쓴 부분이었다. 당시 나는 <9.11테러와 한반도>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를 다루면서 KAL858기 사건의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북한은 이 사건으로 테러지원국 명단에 처음 오르게 됐고, 아울러 이 사건에 대한 의혹들이 조금씩 공론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일논문 공모전의 주최측인 통일부는 내 논문에서 이 부분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이라며 수정을 요구했고 나는 그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통일부는 일방적으로 입선을 취소시켜 버렸다. 사실, 무서웠다. ‘진짜 이 사건에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걸까. 대한항공기 사건이 정말로 조작된 거라서? 혹시 국정원이 내 논문을 본 건 아닐까. 그래서 수정하라고 연락이 온 것인가?’ 순진한 학생이었던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수정요구와 함께 전화를 통해 들었던 말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정권 이양기에 시끄러워지면 안 된다”, “윗분들이 불편해하시는 것 같다.” 어떻게 알았는지 학과장 선생님까지 나를 불러 ‘웬만하면 수정하라’고 했다. 머리 속이 완전히 뒤죽박죽이었다. 밥을 먹지 못했다. 잠도 자지 못했다. 불안했다. 수업에 들어가서도 집중하지 못했다. 종이 위에 계속 뭔가를 적어갔다.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사람들을 피해 다녔고, 국정원이 나를 미행, 도청하고 있다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나는 ‘수정요구에 대한 답변서’를 만들어 다음날 아침 일찍 통일부에 보냈다. “(중략) 끝으로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본 논문에 인용된 의혹들의 타당성과 대한항공기 사건의 재조사 필요성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저의 상식에 근거하여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전날에 이어 또 어떻게 알았는지 학과장은 나를 불러 “뭐 하러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그런 이야기를 했니?”라며 은근히 다그쳤다. 한편으로는 통일부 관계자들이 일종의 회유를 해왔다. 기본적으로 ‘연줄’을 동원하는 형태였다. 일선 실무자는 내가 지원할 대학원의 선배라는 점과 자신의 고향이 나와 비슷하다는 점을 내세웠다. 심지어 내가 시간이 없으면 그쪽에서 대신 수정해줄 수도 있다며 ‘배려’해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윗선에 있는 책임자는 자신이 ‘이 분야에 10년 정도는 더 있을 것’이라며 ‘진로와 관련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또, 느닷없이 자신의 딸이 대학교 3학년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이번 일을 조용히 넘어가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딸을 소개시켜주겠다는 취지의 말로 들렸다. 공포와 신경쇠약, 그리고 내면의 목소리 그때마다 “아니오”,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했고, 철저한 고립감에 빠져들었다. 당시 나는 신경쇠약 비슷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문제를 나 혼자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시작한 일이니 내가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공모전에 참여하기로 한 것도, 논문에 대한항공기 사건을 포함시키기로 한 것도, 수정요구를 거부한 것도, 인권위에 진정하기로 한 것도, 모두 혼자 결정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후의 일도 혼자서, 온전히 나만의 힘으로 풀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더 솔직한 이유는 다름아닌 ‘두려움’ 때문이었다. 대한항공기 사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 찍힐 수 있다는 그런 두려움. 안기부 수사결과에 문제를 제기하면 사상이 불순한 사람으로 몰릴 수 있다는 그런 두려움. 그랬다. 나는 ‘빨갱이’ 소리를 듣게 될까봐 스스로 위축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나 혼자서만 해결하려고 했다. 얼마나 무서운 자기검열인가. 결국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나 자신과 타협을 하고 말았다. 통일부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우수상에 선정되었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며 심려를 끼쳐드려, 즉 수정을 거부해서 ‘오히려’ 죄송하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이다. 그러자 놀랍게도 신경쇠약 증세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지독한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논문과 관련된 모든 일을 잊고 싶었다. 그런데 10월 28일, 논문 시상식이 예정되어 있던 날, 내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일을 잊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날 저녁, 식사를 하면서 매우 이상한 기분을 느꼈는데 내 영혼이 붕 떠있는 듯한, 몸과 마음이 분리된 듯한 느낌이었다. 불안감에 휩싸여 서둘러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른 저녁이었지만 잠을 자려고 했다. 가위에 심하게 눌렸던 것 같다. 그때 정말 거의 죽을 뻔한 체험을 했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이 내 몸 안에 들어온 듯한 기분, 누가 해준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계속 따라서 중얼거리는 나, 온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몸이 심하게 떨리는 현상.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는데, 이 때의 경험은 결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동생은 나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놀라서 119에 신고를 했다. 나약한 개인, 더 나약한 국가 그런 체험을 하고 나서 차츰 몸과 마음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이 사건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됐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나는 잘못한 것이 없으며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KAL기 사건에 대한 안기부 수사결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며, 따라서 수정요구를 거부한 것은 정당했다. 숱한 의혹이 있는 사건에 대해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한 문장이 나를 그토록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후 국가인권위원회에 정식으로 진정을 했지만, 인권위는 ‘수정을 권고한 것이었지, 강요한 게 아니었으므로 인권침해로 보기 어렵다’며 기각결정을 내렸다. 인권을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함으로써 필요한 불가결한 권리’라고 정의하듯이,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신체적, 물리적 강압으로만 한정해서 볼 수는 없을 텐데, 인권위원회의 결정은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아울러 순수한 차원의 ‘권고’였다면, 왜 수정을 거부하자 입선을 취소시켰는가. 일련의 경험을 통해 국가 앞에서 한 개인이 얼마나 나약한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안기부 수사결과에 문제가 없다’는 국가의 목소리는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개인의 작은 목소리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가 앞에 한없이 작아져야만 했던 나를 발견했다.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나를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 괴롭고 힘겨운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국가가 나보다 더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나처럼 나약한 개인의 작은 목소리 하나 수용하지 못했으니까. 그만큼 용기가 없었다는 뜻이니까. 그 후 4년이 흘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거의 운명적으로 KAL858기 사건으로 석사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사건의 재조사가 결정됐다. KAL858기 사건 직후부터 재조사를 요구해왔던 실종자 가족들이 없었다면 나의 ‘통일논문’도 그렇고 학위논문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분들의 고통에 나는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요즘도 가끔 그때 수정을 거부했던 일이 후회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 선택은 내 생애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건 ‘선택이 필요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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