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소음들이 내는 화음

연극 <처용, 오디세이>

공숙영 | 기사입력 2007/04/23 [22:41]

명랑한 소음들이 내는 화음

연극 <처용, 오디세이>

공숙영 | 입력 : 2007/04/23 [22:41]

올해 3회를 맞이하는 여성연출가전 “4 Go Story”가 3월 28일에 시작하여 4월 29일까지 대학로에서 열리고 있다. 네 명의 여성연출가들이 신화와 설화를 해석하여 창작한 연극 네 편을 두 편씩 묶어 공연한다.(blog.naver.com/danchoom)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처용, 오디세이>는 4월 11일까지 올린 전반부 두 편 중 하나다. 흔쾌히 인터뷰에 응한 <처용, 오디세이>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정안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서울 밝은 달밤에/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들어와 자리를 보니/다리가 넷이로구나/둘은 내 것이지만/둘은 누구의 것인고?/본디 내 것이다만/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처용가, 실은 다양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성인용 문학이다. 용의 아들인데 신라에 와서 벼슬을 했다는 처용, 그는 어떤 사람일까? 또한 처용의 아내와 그녀의 연인은? 이 사건에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연극 <처용, 오디세이>는 처용이 <오디세이>의 주인공인 고대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라는 착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신라에 온 오디세우스, 처용

수업 시간에 처용가를 배우면서 처용 설화의 이면에 대한 깊은 호기심이 생겼다는 작가-연출자는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도 처용이 그냥 돌아선 이유를 상상하는 과정에서, 처용이 외지인이자 방랑자로서 아내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고독한 자였기에 굳이 아내에게 집착하지 않고 그 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추측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귀향하기 위해 길고 험난한 모험을 해야 했던 오디세우스가 떠올라, 처용이 표류하다가 신라 바닷가로 흘러 들어온 오디세우스라는 설정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연극은 오디세우스와 칼립소의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트로이 전쟁 후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던 중인 오디세우스는 요정 칼립소의 섬에 머무르게 되지만 계속 향수(鄕愁)에 시달린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간절히 열망하나 그가 돌아가고자 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정말로 그리워하는 건 페넬로페도, 내 왕국도, 내 고향도 아니야. 내가 바라는 건 내 얘기에 귀 기울여주고 내 마음을 살피는 상냥한 사람, 나한테 맞는 옷, 내 추억을 기억하는 곳이지.”

육체적인 관계 외에는 칼립소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오디세우스 또한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인간인 그는 칼립소를 영원히 늙지 않는 아름다운 요정이자 요부로만 볼 뿐 그 밖의 어떤 존재로도 보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에게 칼립소는 영원히, 일시적으로 머무는 항구일 뿐이다.

결국 지친 칼립소는 오디세우스가 늘 앉아 있던 바닷가의 바위를 배로 만들어 그를 떠나 보낸다. 이리하여 오디세우스는 다시 고향으로의 항해를 시작하지만, 자신을 떠난 오디세우스에 대한 원망을 이기지 못한 칼립소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에게 오디세우스의 운명을 꼬이게 하여 귀향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청한다. 네메시스의 마법에 따른 운명의 장난으로 신라의 바닷가에 도착하여 용의 아들로 오해된 오디세우스는 신라 왕의 여인이었던 미리와 결혼까지 하게 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소통할 수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인다.

그러나 예언적 능력을 가진 신녀 마리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처용 즉 오디세우스의 과거와 미래를 짚어낸다. 그가 떠날 운명이라는 걸 예견하는 마리는 어떤 계기로 떠나게 될 것인지조차 알고 있다.

결혼제도와 동성애의 상징으로 해석

신라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처용은 어느 날 밤 아내 미리가 마리와 동침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미리와 마리의 동침 장면은 공중으로 번쩍 들린 네 개의 다리가 계속 얽히는 광경으로 강렬하게 묘사된다. 연출자는 연극의 하이라이트인 이 장면을 잘 묘사하기 위해 두 배우의 다리 길이까지 고려하여 캐스팅하는 등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역신(疫神)이 처용의 아내를 범하려 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는 사실과, 역사적으로 동성애를 억압하기 위해 동성애를 역병(疫病, plague)의 일종으로 취급했고 지금도 보수적인 종교계 등 동성애혐오집단이 동성애를 치료해야 할 질병처럼 치부하는 사실을 고려하면, 극 중에서 처용의 아내인 미리가 동침한 자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 그것도 보통 여성이 아니라 신녀로 설정된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이제부터 우린 멸시를 견뎌야 해. 병이라고 부르겠지, 그걸. 우리한텐 사랑인데, 그게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사람들은 말할 거야. 미리야, 이제부터 견디는 일만 남았어. 사랑은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견디는 거야. 난 역신이라고 불리는 괴물이 될 거야. 괴물, 역병이라며 사람들이 나를 피하겠지. 너를 만지고 사랑한 죄로 나는 괴물이 되는 거야. 불쌍한 우리, 뭐가 잘못된 걸까? 우리의 운명? 우리의 사랑?”

다시 항해에 나서 천신만고 끝에 이타카로 돌아와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왕국과 아내를 되찾는 데에 성공한 오디세우스는 아내 페넬로페와 오랜만에 동침하며 평화를 맛본다. 미리와 마리의 동침이 얽힌 다리들로 묘사된 데 반해, 부부인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동침은 결혼이라는 제도적 약속을 표상하기라도 하듯 맞잡은 두 손으로 묘사된다.

팔베개를 해 주고 무릎을 벨 수 있는 지고지순한 아내 곁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처용은 칼립소에 대해 “자기만 아는” 여자로, 미리에 대해 “백치 같은” 여자로 회상할 뿐이지만, 실상 그녀들이 각자 독백하기를, 페넬로페는 남편 없는 시절의 독신 생활을 그리워하고,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졌으며, 미리는 ‘역신’ 마리와의 은밀한 사랑을 여전히 구가한다.

“아우, 목이야. 결려서 못살겠네. 갑자기 안 하던 팔베개를 하니까 도무지 신경이 쓰여서 잠을 못 자겠어. 아, 그리고 왜 그렇게 이불을 차내는 거야? 정신 사납게? 코는 또 왜 골고? 남자랑 사는 거, 옛날엔 몰랐는데 그거 보통 일이 아니야. 아주 힘들어. 시끄럽고 신경 쓰이고 아주 바빠. 나, 사실은 답답해! 혼자 살 때가 편했어!”

“믿을 수 없겠지만 난 이제 그 남자 얼굴조차 잘 기억이 안 나. 한때는 그 남자 없인 숨도 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참 이상한 일이지? 그 남자가 내 눈 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니까, 훅! 하고 촛불이 꺼지듯 내 마음의 불길이 사그라지더라. 연기조차 나질 않았어. 난 요즘 수많은 남자들한테 둘러싸여서 지내. 날 가지려고 안달이지. 재미있는 일이야, 정말. 가지려고만 하지 않으면 남자들은 더더욱 매달려. 잊지 마, 항상 시선을 허공에 두라고. 그러면 사람들은 안달할 거야. 니 시선을 잡아매려고.”

“마리 언니와 난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 가끔씩 달밤에 만나 사랑을 속삭이지. 우리한테 이 시대는 너무 가혹해. 설마 다음 시대도 계속 이런 식일까? 마리 언니 말대로 난 바람 피운 처용의 아내로만 기억될까? 그렇다면 좀 억울하네. 그 남잔 나한테 관심도 없었으니까. 뭐, 상관없어. 내가 살아있었다는 증거잖아. 내가 생생하다는 증거, 내 마음을 따르고, 내 속을 살피며 살던 사람이란 걸. 부도덕했을지는 모르지만 나 자신한텐 정직한 사람이었다는 걸 말이야.”

발랄하고 섬세한 상상력, 고전에 기반한 사건과 인물 구성, 통찰과 재치가 반짝이는 대사, 노련한 배우들의 열연(1인 2역이 기본 포맷), 간결하고 효과적인 무대 장치(해금 연주와 영상의 도입)가 잘 어우러진 연극 <처용, 오디세이>는 객석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등 관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한동안 다른 일을 하다가 자신의 고향인 연극으로 돌아와 첫 작품을 무대에 올린 정안나 본인도 극 중 오디세우스처럼 변신을 거쳐 결국 귀향한 셈이다.

연출자가 말하는 무대 뒤 이야기

성별(gender)을 비롯한 입장의 차이에 따라 다른 다양한 반응이 흥미로웠다는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많은 기혼 여성들은 남자랑 사는 거 보통 일이 아니라는 페넬로페의 마지막 대사에 공감을 표하고, 상대적으로 미혼 여성들은 맘대로 되지 않는 연애 때문에 고통 받다가 벗어나는 칼립소를 주목하는 것 같더라고 소개했다.

남성 관객들은 여성 인물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재미있어 하면서도 생경해하는 한편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의 부자 관계(거울 보고 쉐도우 복싱을 하는 것처럼 해금 소리에 맞춰 1인 2역의 연기로 부자의 대화가 진행되는 장면이 극적이다)에 관심을 가지더라고 한다.

“아비들은 언제나 그렇지. 어설픈 뒷모습을 보이고 떠났다가 늙고 지친 얼굴로 울며 돌아오지. 그걸 받아주는 어미들이 나쁜 거야. 집 나간 아들을 받아주는 건 성서에도 나와 있어! 하지만 집 나간 아비를 받아주는 건 어미들의 가슴 속 전설일 뿐이야!”

또한, 처용의 아내 미리와 신녀 마리의 동성애관계에 대해, 이번 공연에서는 기본 설정 정도에 그쳤지만 다음 기회에는 더 많은 이야기를 풍부하게 담는 시도를 해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궁극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연극을 통해 소통의 어려움을 말하고 싶어한다. 닫힌 공간인 극장 안에서 관객과의 소통을 제한적이나마 시도하는 연극의 본질에 부합하는 주제라면서. “아, 죽음만큼 조용한 것이 또 있을까? 삶은 시끄러운 거야. 복닥거리는 거고. 이젠 좀 조용하게 살고 싶어. 글쎄, 알고 보니 집에 돌아와 쉬는 게 내 인생의 목표였어.”

귀향한 오디세우스는 이렇게 말하지만, 스스로도 이미 깨닫고 있듯이 조용한 죽음의 이편에 있는 삶은 시끄럽고 복닥거릴 수밖에 없으므로 그의 목표는 실현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힘겹고 번거로운 소통을 단념하고 싶어도, 죽음이란 최종적인 안식이 닥치기 전까지는 소통을 지향하지 않는 삶이란 존재불가인 것처럼.

집에 돌아와서 편하다고 외치는 그의 평화는 위태롭고 일시적인 산물이며 혼자만의 오해이자 착각이므로 조만간 그가 다시 부대끼고 허우적댈 것이라는 점을 연극을 보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좌절이 열망을 낳고 열망이 좌절을 낳는 순환이 살아 있는 한 거듭될 것이고, 그러한 순환의 소음이 어느 순간 우연히 기적처럼 화음을 만들기도 한다는 점 또한. 그리하여 대본에 적힌 대로 연극은 소음의 화음 속에서 명랑하게 끝나고, 한바탕 웃은 우리는 극장 밖을 나서서 각자의 시끄러운 삶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네 사람이 내는 소음이 일종의 화음처럼 만날 때 현의 연주가 명랑하게 박자를 맞추며 막이 내린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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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2007/04/29 [09:31] 수정 | 삭제
  • 연극이 끝난 다음에야 리뷰를 올리게 되어 저도 유감이에요. 공연 종료 이틀 전에야 보고 꼭 소개하고픈 맘이 들어 리뷰를 썼답니다. 단독 공연을 또 볼 수 있기를 저도 기다립니다.
  • nalgene 2007/04/25 [21:50] 수정 | 삭제
  • 담번엔 공연 끝나기 전에 좋은 연극 알려주시면 더 좋겠어요.. 보고 싶은뎅
  • 저는 관객 2007/04/25 [13:55] 수정 | 삭제
  • 재미있게 본 연극인데
    리뷰를 보니 반갑네요.
    여건이 된다면
    좀 더 길이를 늘려 단독공연해도 좋을 것 같아요.
  • 독자 2007/04/25 [12:54] 수정 | 삭제
  • 리뷰를 읽고 나니 보고 싶은데 이미 공연이 끝났다니...다음 기회가 있겠죠?
  • rami 2007/04/24 [12:55] 수정 | 삭제
  •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추구하는 연극인들의 등장이 반갑다.
    여성연출자들이 많아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