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찾는 사람들의 멘토가 되고 싶다

심리상담가를 꿈꾸는 남상미

박희정 | 기사입력 2008/07/10 [02:14]

꿈을 찾는 사람들의 멘토가 되고 싶다

심리상담가를 꿈꾸는 남상미

박희정 | 입력 : 2008/07/10 [02:14]
함께 있을 때 자신의 말을 쏟아내기 바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 있다. 후자와는 좀더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잘 들어주는’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나누기란 쉬운 것은 아니다. 잠자코 들어주지만 솔직한 대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상대도 있으니까.
 
▲ 솔직함과 성실함이 매력인 남상미씨    © 일다
남상미(28)씨가 인상 깊었던 것은 솔직하고 예의 바르게 타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타인에게 쉽게 말하기 힘든 얘기를 털어놓아요. 내가 유도한다거나 그러는 것 같진 않은데. 학대를 받았다거나 자신의 여러 가지 내면적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해주죠. 내가 ‘너는 이런 상태에 있는 것 같고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라고 말해주면 나중에 좋아졌다는 말을 많이 해줘요.”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어보면서 나는 상미씨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솔직함과 성실함이 타인의 마음을 여는 그녀의 매력이었다.
 
11살, 부모님을 따라 나이지리아로
 
상미씨는 초등학교 시절 꽤 오랜 시간 동안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부모님이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5학년 때 ‘조금씩 살림이 피기 시작해서’ 부모님이 계시는 나이지리아로 건너 갔다.
 
어린 나이에 머나먼 아프리카 행이니 겁먹을 법도 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게 너무 기뻐서” 두려움이나 걱정은 안중에 없었다고 한다.
 
흔히들 “아프리카에서 살다 왔다”고 하면 야생동물이 뛰어 노는 초원에서의 이국적인 삶을 떠올리고는 하지만 상미씨에게 아프리카에서의 기억은 “집”과 “학교”가 대부분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나이지리아는 정치적 상황이 불안했기 때문에 외국인, 특히 동양인 여자아이의 자유로운 외출은 위험한 일로 여겨졌다.
 
나이지리아 생활 1년 반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대규모 반정부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군부정권이 민간인출신의 야당지도자인 아비올라에게 패하자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집권을 계속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군사정권에 반대해 민주화 투쟁이 일어난 것이었지만 유혈사태가 일어나고 치안도 극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
 
“엄마는 사람 목에 타이어를 씌워서 불태워 죽이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셨다고 해요. 폭동이 일어나기 전날 가족들과 한국으로 치자면 일산쯤 되는 ‘라고스’라는 동네에 놀러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대사관 직원 가족들을 만났어요. 보통은 아버지가 외박을 허락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날 따라 외박을 허락해서 대사관에서 잤는데, 다음날 폭동이 일어났죠.”
 
아버지가 보낸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매우 위험했다. 흥분한 시민들이 ‘내리라’며 창문을 두들겨댔다. “보통은 30~40분이면 가는 거리를 3시간 넘게 걸려서야 되돌아 갈 수 있었어요. 지금 같으면 무서워서 지나올 생각도 못했겠지만, 그 때는 어려서 무섭다는 생각보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요. 기사가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골목 골목을 돌아서 어렵게 되돌아왔던 기억이 나요.”
 
영국 기숙사 학교에서 화장실 불을 밝히며
 
▲ 상미씨는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혼자 생활한 경험에 대해 들려줬다
한국에 돌아온 상미씨는 중 2때 부모님의 결정으로 영국 런던 근처의 ‘켄트’라는 곳에 있는 한 여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규율이 엄격했다. 밤 10시면 모든 불을 꺼야 했고, 외출도 자유롭지 않았다.

 
“반항을 많이 했지요. 선생님과 맨날 싸우고. 특히 기독교 학교라 종교수업이 있고 담담 목사님도 따로 있었는데 그 분과 종교문제로도 트러블이 많았어요. (상미씨는 종교가 없다.) 그 선생님이 교장과 사이가 좋아서 교장한테도 미운 털이 박혔지요.”
 
일요일 아침마다 채플에 참석해야 하는데 “너무 싫어서 딴짓하다” 지적도 많이 받았단다. “애들 앞에서 혼나는데도 그냥 말 못 알아듣는 척 하고 그랬죠.”
 
영국에서 보낸 학교 생활은 지금 생각해도 ‘울컥’한다. 너무 힘들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라고. 엄격한 학교생활과 그로 인한 선생님과의 트러블 이외에도 언어문제 때문에 수업을 따라잡는 것도 너무 큰 일이었다.
 
“그래서 어릴 때 유학 가는 애들을 보면 안쓰럽고, 조기 유학에 반대해요. 정신적으로 강해진 후나 확고한 꿈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등 떠밀려서 외국에서 어린 나이에 혼자 생활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언어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에세이 하나 쓰기 위해 <제인에어>를 열 번은 넘게 읽었다고. “영어는 안되지만 물리, 화학 같은 과목에서까지 지고 싶지 않았어요. 10시면 불을 끄니까 화장실에서 불 켜고 공부했지요. 기숙사 사감도 놀라더라고요. 영국 애들은 저녁 1시간 30분간 주어지는 숙제시간 말고는 공부를 잘 안 하거든요. 내 인생에서 제일 열심히 공부했던 때인 것 같아요.”
 
아버지한테 3개월을 졸랐다.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고2때 보는 GCSE(한국의 수능시험 같은) 성적이 좋으면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죽도록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졸업 전에 학교장 면담이 있는데 교장이 나를 벼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들어가자마자 질문을 마구 쏘아대더군요. 그런데 내가 말을 되게 잘했어요. 내가 학교에서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까지 조리 있게 말했죠. 놀라더라구요.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에요.”
 
원래 30분도 안 돼서 끝나는 면담이 1시간 넘게 이어졌다. “나중에 졸업할 때 나를 안아주면서 ‘학교에 남아 있으면 좋겠다(영국에서는 고2때 GCSE 시험을 보고 대학을 갈 아이들만 남아서 1년 더 수업을 듣는다). 돌아가더라도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고 말해줬어요.”
 
‘문제집의 산’을 쌓는 아이들 속에서
 
한국에 돌아온 한동안은 좋았다. 그런데 학교생활이 문제였다. 외고를 나왔는데 오로지 공부만 하는 애들 사이에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외고라고 해서 들어갔는데 ‘외국어’보다 그냥 ‘대학교를 보내는 학교’더군요. 애들이 책상, 사물함도 모자라 자리 옆에다 박스를 놓고 그 안에까지 문제집을 쌓아놓고 공부했어요. 영국에서는 미적분을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성적을 낼 수 있을리 만무했죠. 거의 전교 꼴찌였어요.”
 
출석일수 30일 중에 15일이나 나갔을까. 출석일 수가 모자라 졸업도 못할 뻔 했다. 학교에 나오지 않는 날은 혼자서 바닷가에 가기도 하고 힙합클럽에서 공연도 보았다. 친구들도 학교 밖에서 만났다.
 
학교 안에서는 독일어 선생님이 친구였다.
“독일 남자분이었는데 같이 수다를 많이 떨었죠. 주로 한국 교육현실에 대해서 울분을 토하는 얘기였죠.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 시간들이었어요.”

 
20살 때 “대학 안 간다”고 선언했다가 이모와 트러블이 생겨 집을 나왔다. 6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외국인 전형으로 갈 수 있는 학교를 찾아보았다. 전공은 ‘심리학’을 택했다.
 
상담의 힘을 발견하고
 
▲ 심리학을 배우며 상담가의 소질을 발견했다고.
처음엔 그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선택한 심리학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자신에게 상담가의 소질이 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 있을 때부터 알던 언니가 있는데 알고 보니 꽤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10년 만에 만나서 밤새 술도 마시고 이야기하다가 다음날 일어났는데 언니가 ‘몇 년 만에 깊게 잘 잤다’고 그러더군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상미씨는 “어쩌면 내가 이런 쪽에 소질이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때 우울증이 있어서 심리상담을 6개월 정도 받은 적 있는데 그 때 상담을 해주셨던 분이 상담을 전공해볼 생각 없느냐고 물으셨어요. 내가 선생님의 어떤 부분에 치유를 주었던 것 같아요. 나 또한 그 6개월간의 상담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났고, 그렇기 때문에 심리 상담의 힘을 더 믿게 되었지요.”
 
상미씨는 좀 더 전문적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길을 제시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더 열심히 심리학 공부도 해보고 싶어졌다.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도 세웠다.
 
상미씨는 현재 직업상담 쪽에도 관심이 많은데, 멘토로써 꿈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기 꿈을 찾고 스스로의 삶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힘을 찾게 도와주고 싶은 소망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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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영 2010/06/12 [23:28] 수정 | 삭제
  • 상미님 홧팅 멋져요...
  • a 2008/07/21 [23:35] 수정 | 삭제
  • 혹시,
    학교에서 샌위치, 에 관해 농담했더랬던 후배일까요?
    맞다면, 오와! :) 내가 누군지 기억할란가, ㅎ
  • 2008/07/11 [16:00] 수정 | 삭제
  • 꽤 젊은 나이인데도..
    어려서부터 다양한 사람들과 접해본 것이, 상담가로서 자질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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