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

무엇을 느끼고 원하는지 알 수 없게된 사람들

최현정 | 기사입력 2009/02/24 [09:08]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

무엇을 느끼고 원하는지 알 수 없게된 사람들

최현정 | 입력 : 2009/02/24 [09:08]
지금,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느끼고 있는지 잘 알아차리고 계십니까? 어떤 경우에는 너무나 명확하여 쉽게 알아차리고 그 원하는 바를 해소할 수 있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어떻게 해소하느냐의 문제는커녕 무엇을 원하고 느끼는지조차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사람에게 경험이 쌓여가고 인생이라는 것이 점점 더 복잡한 의미로 얽혀갈수록, 후자의 경우가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가 무얼 느끼고 원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눈앞에 떡이 하나 놓여있습니다. ‘저걸 먹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점심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도 납니다. 맛있게 먹습니다. 배가 고팠던 것이군요.
 
두 번째 상황입니다. 떡이 있고, 며칠 동안 애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떡을 천천히 씹으면서 지루한 느낌이 들고, 떡을 아무리 많이 씹어 삼켜도 허기짐이 줄지 않는 느낌에 슬픕니다. 배가 고팠던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세 번째 상황입니다. 떡이 있고, 며칠 동안 애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으며, 약속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보기로 한 친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를 떡을 점점 격하게 씹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로 배가 고팠던 것일까요?
 
해결되지 못한 소망은 고스란히 남아 마음을 침식시킨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인생의 그 떡을 그저 먹어버리고 맙니다. 왜 떡을 원했는지, 왜 먹었는지, 잘 모르고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배가 고파서 먹었다고 생각합니다. 배가 고파서 먹은 것이라면 다행입니다. 배고파서 떡을 먹었다면 탈이 날 일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떡의 맛을 느끼면서 먹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친구를 향한 화 때문이었다면, 혹시 친밀한 관계에 대한 불안이나 공허감이었다면, 아마 떡을 먹다가 체할지도 모릅니다. ‘먹고 싶다’ 아래 놓인 진짜 욕구나 소망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화나, 불안이나, 공허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텐데요.
 
물론 불안이나 공허감은 너무나 지독한 감정이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고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애쓰면서 차라리 떡을 꿀꺽꿀꺽 먹는 식으로 대처하는 것이 더 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떡을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떡만 먹기 때문에 우리의 불안과 공허감은 끝내 보살핌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려 할 때, 그 동기는 참으로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 데는 여러 맥락과 이유가 놓여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맥락과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힘들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이를 허투루 다루기 십상입니다. 물론 때로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았는데 해결하는데 필요한 용기나 방법이 부족하여 해결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해결되지 못한 소망은 해결될 때까지 우리 안에 남아 자유로움과 창의성을 가로막고 마음을 침식시키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 욕구를 가리는 행위는 어디서 비롯된 습관일까
 
아이들은 무엇을 원하고 느끼는지 참 잘 압니다. 아주 솔직하게 느끼고 표현하지요. 천사 같은 모습은 그런 데서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른이 될수록 점점 무얼 원하는지, 무얼 느끼는지 알아차리기 어려워지지요.
 
물론 처음부터 느끼고 인식하기 어려워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자라온 환경이나 인생의 큰 사건에 따라 그 능력이 변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욕구를 표현했다가 혼이 났을 수도 있고, 욕구 실현이 금기되는 환경에서 자랐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인 환경에서 자라, 자기 욕구를 인식하고 우선시하는 법을 아예 익히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자기 욕구를 중시하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그런 삶의 방식을 배웠을 수도 있고, 욕구를 드러내었다가 처벌받은 어떤 경험으로 인해 ‘욕구를 알아차리면 안 되는 법’을 익히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 욕구를 차단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인생에서 어떤 경험이 반복되면서, 혹은 어떤 특별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 특정한 방식으로 자기 내면의 욕구를 가로막는 습관을 키우게 되는 것이지요.
 
왜 욕구를 가리게 되는 것일까요? 욕구를 가리는 행위란 매우 강력한 어떤 위협이나 불안, 혹은 깊은 상실감을 피하고 감당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작동하는 마음의 방패막이자 보호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방어’라고 설명합니다. 방어란 ‘정신분석’이라는 심리학 학파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정신분석을 만든 프로이트라는 사람이 이러한 특정 심리적 작동기제를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군사 개념을 통해서 마음의 기제를 은유하기 좋아했던 프로이트가 이러한 작동법을 일컬어 ‘방어기제’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왜 방어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면을 이해하는 일
 
방어기제는 아주 어렸을 때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고, 그런 방식이 아주 유용했던 터라 계속 그 방식을 사용하게 되면서 성격으로 굳어갑니다. 어떤 경우에서이든 특정 방어가 우리의 성격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그 당시 그 방어가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어린 시절의 두려움이나 충격적인 상황이 사라진 이후에도 방어가 지속되면서, 내면의 두려움은 점점 방치되고, 우리는 내면의 진실한 욕구를 들여다보지 못한 채 타인과 진정으로 만날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방어적’일 때, 우리는 그에게 다가가기 쉽지 않습니다.
 
급기야 매우 왜곡된 방식으로 자기 내면의 어려움을 종식시키려는 결과를 초래하지요. 이를테면 조스트라는 심리학자는, 우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외면하기 위해서 경제성장이나 부의 축적에 골몰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퀴블러-로스라는 정신의학자는, 몇몇 의료진들이 환자들을 홀대하거나 지나치게 냉정하게 대하는 이유에는 의료진 마음 안에 죽음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남겼지요. 물질적 풍요에 골몰하거나, 냉정함으로 무장하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우리의 방어기제가 발현된 모습 중 하나입니다.
 
왜 그런 방어가 생기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그의 방어 이면에 놓인 깊은 내면과 만날 기회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두려움이나 불안, 상실감을 피하고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스스로를 방어하고 계십니까. 방어하는 것도 능력이겠거니와, 왜 방어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려운 나머지 방어하고자 애쓰고, 그 대가로 수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기도 하며, 진실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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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 2009/03/03 [15:51] 수정 | 삭제
  • 글...그렇지, 그렇지...하며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아휴..그런데 내면을 바라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일까 알아차리려고 애쓰다다 보면, 그것 때문에 더 괴로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죠....복잡하고 탈많은 현실에서, 마음의 평정을 갖고 내면의 욕구를 들여다보기 위한 나의 자세... 어쩌면 평생 도를 닦아야 하는 과정 인 것일까요...?
  • 부엉이 2009/02/24 [16:18] 수정 | 삭제
  • 자신의 방어기제를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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