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던 날

눈송이를 통해 만나는 자연의 신비

이경신 | 기사입력 2010/01/04 [05:10]

눈 내리던 날

눈송이를 통해 만나는 자연의 신비

이경신 | 입력 : 2010/01/04 [05:10]

언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한 걸까? 버스에 오를 때까지도 계속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눈이 멎었다. 좁은 도로 위도, 텅 빈 야영장에도, 주변을 에워싼 숲에도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눈부시다. 도착한 날, 바로 그날 새벽부터 내린 눈이란다. 정말 운 좋은 날이다.
 

내게 눈은…
 
내 고향에서는 겨울이라도 눈은 진기한 구경거리였다. 귀와 코를 잘라낼 기세로 휭휭 불어대는 매서운 바닷바람이 뼈 속까지 파고들 때도 눈은 내리지 않았다. 어느 해인가 잠깐 눈이 땅을 살짝 가릴 정도로 다녀간 날, 온 동네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집밖으로 뛰쳐나와 눈사람 만들기에 열중했다. 그나마 대문 앞에 눈사람, 아니 회색 빛 흙사람이라도 세운 아이는 얼마나 의기양양했던지! 그게 내 어린 시절 눈 기억의 전부다.
 
아직도 고향을 떠나 맞은 첫 겨울, 함박눈이 내린 날, 그날 아침을 잊지 못한다. 눈이 쌀가루 같다 했나, 보석 같다 했나. 어릴 때부터 눈 노래를 부르고, 눈사람, 눈싸움, 눈 이야기를 수없이 읽긴 했지만, 정작 실감하지는 못했다. 그런 내게 경이로운, 진짜 눈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나무 가지마다 피어난 새하얀 눈꽃, 보송보송 뭉쳐지는 눈덩이, 쌓인 눈 속으로 푹푹 빠져드는 걸음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 거리는 눈 소리도 마냥 신기하고 재미났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고, 고향을 떠나 여러 해 겨울을 맞는 동안, 눈도 수 차례 만났다. 이제는 눈길에서도 제법 당당하게 걸음을 옮겨 놓을 수 있다. 또 비에 젖는 것이 싫어 꼭 우산을 챙기듯, 눈이 오는 날에도 눈에 젖지 않으려고 우산부터 펼쳐 든다. 눈이 녹아 진창이 된 길에서는 옷이 더러워질까, 눈이 녹아 얼어붙은 곳에서는 미끄러질까, 잔뜩 긴장해야 하는 불편함도 안다. 쌓인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버스가 지체되는 괴로움도,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눈 사고소식의 안타까움도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눈은 여전히 내게 어린 시절 그대로 아름다운 신비다.
 
눈송이 관찰
 
몸을 녹이며 산장의 장작난로 곁에서 불을 쬐다, 돋보기를 챙겨서 다시 눈 세상으로 되돌아왔다. 멈췄던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난 잠시라도 눈송이를 내 시선에 붙들어두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눈송이는 순식간에 녹아 내린다. 겨우 돋보기에 포착한 눈송이 중에도 6각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드물었다. 쉴새 없이 산바람이 눈송이를 날려보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별 모양의 멋진 눈송이를 만날 기회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눈송이를 관찰하는 일이 새를 관찰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 생각난다. 어떤 새를 어디서 만날 지 알 수도 없고, 운이 좋으면 기대하지도 못했던 멋진 새를 만나기도 하는 그런 것. 이번엔 엄청난 행운까지 따라주지는 않았다. 방풍 옷에 살짝 내려앉아, 연약한 가지를 뻗고 있던, 다소 평범한 6각형 눈송이를 만난 것에 그나마 만족해야 했다.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나를 또 다른 놀이세계로 안내한 눈송이는 자연이 안겨준 참으로 놀라운 작품이다. 액체상태의 물, 비가 얼어서는 절대로 눈이 될 수 없고, 대기의 수증기, 구름이 바로 얼음으로 변할 때만 눈송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다.  

▲ 케네스 리브레이트 글, 퍼트리샤 라스무센 사진 <눈송이의 비밀> (나무심는 사람)
놀라운 것은 눈송이가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6각형 대칭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 분자들이 물리화학법칙에 따라 스스로 결합한 결과이다. 자연이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에서 발휘하는, 감탄할 만한 조직력을 눈송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대칭들이 서로 겹쳐져 복잡한 모양의 눈송이를 만들게 되는데, 그것은 온도와 습도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습도가 높을수록 화려한 눈 결정이 생겨나며, 온도가 낮아질수록 얇은 판 모양, 가느다란 바늘모양, 두꺼운 판 모양, 기둥모양으로 순차적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무거워져 구름에서 떨어져 나온 얼음조각이 바람을 타고 대지까지 하강하는 동안, 그 여정이 길어질수록 더욱 복잡한 모양의 눈송이로 탈바꿈한단다. 나는 긴 여행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찬란한 별 모양의 눈송이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똑같은 눈송이는 없다
 
댕그렁 댕그렁, 산사의 풍경소리가 귀를 잡는다. 고개를 들어, 떨어질 듯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보다 보니, 절 지붕에 쌓인 눈이 바람에 날려 눈보라로 흩어지고 있다. 바람이 불었다 멎었다, 눈발이 날렸다 멎었다… 맹렬한 바람의 기세에 눌려, 이미 눈 관찰은 포기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눈길로나마 눈송이를 뒤쫓는다.
 
현대과학자도 그 수수께끼를 다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눈. 게다가 이 세상에 똑같은 눈송이가 없다는 사실이 자연의 신비를 더한다. 무수한 물 분자로 이루어진 눈송이, 그 물 분자 배열에 실수가 생기기도 하고, 가끔은 불완전한 원자들까지 가세해서 똑같은 눈송이가 생길 수 없다는 것이 과학자의 설명이다.
 
과학자는 자연이 보여주는 기하학적 완전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그 완전함을 흩뜨려 놓는 것을 실수, 불완전, 비정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자연의 경이로움은 수학적 엄밀함과 엄밀하지 못함 모두를 아우르는 넉넉함에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인간 지성에게는 비정상으로 보이는 그것이 자연에게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인 것이다.
 
안타깝지만, 자기 한계에 갇힌 인간은 자연의 질서를 자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따름이다. 자연의 복잡한 질서, 무질서해 보이기까지 하는 조화는 인간의 이해력 밖에 놓여 있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고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눈송이의 신비도 기하학적 완전함, 즉 6각형 대칭에서 찾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 그 대칭들이 결합해 만든 복잡성, 단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 다양함에서 찾아야 하리라. 눈 결정의 대칭구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는 프랑스 근대철학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그는 그것의 완벽한 수학적 구조에만 주목하고 감탄하는 데 그쳐, 눈 결정들의 다양함과 복잡함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던 것 같다. 자연을 바라보는 이같은 시선이 훨씬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신체, 동물, 생명체를 기계처럼 규정하는 편협한, 그릇된 자연관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눈은 확실히 자연의 신비를 만나는 또 하나의 통로이다. 혹시 길을 걷던 중, 눈송이가 날리고 있다면,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맞추길 권해 본다. 6각형인가? 또 다른 눈송이는 어떤가? 앞의 것과 다른가? 놀라운 신비가 바로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진다.
 
*함께 읽자. 케네스 리브레이트(글) 퍼트리샤 라스무센(사진) <눈송이의 비밀>(나무심는 사람, 2003)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hawthorn 2010/01/04 [13:37] 수정 | 삭제
  • 쌓인 눈은 동심이고, 내리는 눈은 낭만인 것 같아요...
    오늘처럼 눈 치우느라 분주한 날에도, 귀찮으면서도 동시에 낭만과 즐거움이 느껴지다니 저도 신기하다 생각했습니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