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알 권리

딸을 만나러 가는 길 (29)

윤하 | 기사입력 2011/12/12 [09:04]

진실을 알 권리

딸을 만나러 가는 길 (29)

윤하 | 입력 : 2011/12/12 [09:04]
릴(Lille)의 미리암과 에릭 부부에게 결혼여부를 묻지 않아서 이혼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그들이 이 질문을 안 해서 좋았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내가 이혼을 했고, 딸이 있고, 딸은 전남편과 살고 있다는 얘기를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하지만, 묻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자진해서 꺼내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이혼했다는 말을 꺼내기가 부담스러웠다면, 프랑스에서는 아이를 만나지 않는다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결혼여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이혼했다고 말했을 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 ‘그런 말은 앞으로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었다. 마치, 그들은 내가 판단력이 부족해서 할 말과 안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해, 이런 말을 부끄럼 없이 한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한번은 집안 일로 많은 친척들을 만나게 되었다. 내 결혼과 이혼 사실을 알지 못했던 먼 친척분이 내게 결혼 여부를 물었다. 그때, 부모님과 가깝게 지내고 계신 한 어른은 대답하려는 나를 막아 세우며, 대신 ‘결혼은 아직 안했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좀 불편한 낯으로 바라보는 내게, 마치 그 분은 나를 많이 생각해서 이렇게 하는 거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의 자긍심을 한없이 꺾는 이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은 이혼에 대해서는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듯 했다. 유학초기, 한국에서처럼 큰 결심을 하고 결연한 표정으로 이혼사실을 이야기했다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반응에, 도리어 어렵게 말한 나만 어색해지는 경험들을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아이에 대한 질문과 이어진 내 대답의 반응은 전혀 딴판이었다.
 
한국에서처럼 ‘딸은 내가 친엄마인 줄도 모르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아이가 너무 어렸고, 그녀가 상처받길 원하지 않고, 어쩌고저쩌고…….”하는 이유들을 늘어놓곤 했다. 그러나 그걸 이해한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한다고 나를 꾸짖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에게 나는 “상황이 너희 나라와 너무 달라!”라고 말하다가, 나중에는 이런 대화도 짜증이 나서 “보시다시피 내가 프랑스에 있어서 아이는 자주 만나지 못하고 있어!”라고 거짓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텔레비전에서 아이교육에 관한 방송을 볼 기회가 있었다. 한 여성이 교육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녀의 상황은 이랬다. ‘남편이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있는데, 6살인 아이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긴? 숨겨야지! 게다가 어린 아이에게 아빠가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있다는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교육전문가의 대답은 이랬다. “아이에게 진실을 말해라. 어른들도 바보짓을 할 때가 있다고. 아빠가 그랬고, 그래서 벌을 받고 있다고. 처음에는 그것을 아이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현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이를 데리고 남편 면회도 가라.”
 
그러다 또 다른 날, 라디오에서 부모의 이름이 X로 표기된 아이들에게 부모가 누구인지 알려 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제로 펼쳐지는 방송을 들었다. 나는 그때서야 프랑스에는 아이가 알면 너무 수치스럽거나 부모인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다고 판단된 경우, 부모이름 란에 X라고 표기한 경우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방송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아이들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그들에게 출생의 진실을 알게 해주고, 그것을 극복하고, 못하고는 그들의 몫으로 남겨 놓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질문하고 있었다.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 이건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진실’의 중요성도, ‘진실을 알 권리’의 가치도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음을 알았다. 무언가 모르고 있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당혹스러움과 황당함을 모르지 않는 내가, 게다가 인생이 달린 중요한 문제를 너무나 무심하게 풀어나갔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게다가 딸을 항상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그녀에게 진실을 숨기는 폭력을 저질렀는지 미안하기만 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고, 진실을 알리기에는 늘 너무 늦었다고 중얼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아이가 나에게 아무런 애정도 느끼지 못하는 걸 확인한 뒤에는 지난 세월 동안 그녀를 만나지 않은 걸 후회했고, 나보다 새엄마를 더 좋아하는 걸 안 뒤에는 그녀를 키우지 않기로 한 내 선택을 후회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딸과 관련해 늘 후회만 하고 있었다.
 
어쩜 세월이 더 지나서는 지금이라도 아이를 만나려고 노력하지 않은 걸 후회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렇게 넋 놓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고 발등을 찧으며 속상해 할 것이다. 그런데도 망설이고 있는 건 왜일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주저하게 하는 걸까? 다시, 미궁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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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다른엄마 2011/12/22 [01:22] 수정 | 삭제
  • 가끔 들어와 읽는데, 윤하님 글을 읽으면 늘 눈물이 핑 돌곤 합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윤하님과 저의 삶엔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데... 전 진보적인 남편과 살고 있고, 어찌 들릴지 모르겠지만 두 딸들을 키우느라 제 일은 잠시 접어두고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윤하님과 저의 삶엔 공통분모라고는 없어 보이는데.. 왜.. 왜..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날까...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엄마...? 엄마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원죄와 같은 것.. 그런 것 때문일까요. 이혼을 하고 아이를 보내고 유학간 곳의 바다를 바라보며 절망했을, 아니 그 이전의 과정과 그 이후의 과정들 속에서 순간순간 가슴을 치며 살아왔을 윤하님의 마음이, 커리어를 포기하면서까지 두 아이들을 키우며 발 동동거리고 살고 있는 제 마음과도 다르지 않기 때문일까요. 어떤 위치에 있든 어떻게 살고 있든, 우리가 엄마이기 때문에...
    하루 속히 아이를 만나게 되시길 바랄께요... 라고 쓰고 싶지만 그건 제 단편적인 생각이니까, 그보다는.. 아주 나~중이 되더라도 언젠가 윤하님의 딸이 이 칼럼을 보았을 때, 엄마를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드리고 싶어요.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이 칼럼들을 쓴 엄마가, 얼마다 미치도록 자신을 만나러 가는 길을 찾고 싶어한 사람인지,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을 잃어버렸던 그 과정 속에서 딸 못지 않게 엄마 역시 얼마나 많은 아픔과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던 상처입은 영혼인지, 아마도 따님이 조금은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계속 눈물이 나네요. 힘내세요.
  • 윤하 2011/12/20 [22:52] 수정 | 삭제
  • 김연님, 너무 반가워요.
    일다 편집진을 통해 이멜 주소를 알려주시면, 편지를 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저도 처음으로 제 글에 답글을 달아봅니다.^^
  • 콩두 2011/12/19 [07:06] 수정 | 삭제
  • 몰래 열심히 보고 있는 사람 여기도 하나 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 김 연 2011/12/18 [22:18] 수정 | 삭제
  • 이 좋은 글에 의견이 너무 없어 많이 안타깝지만 저처럼 몰래^^ 열심히 보고 계시는 분들
    많으리라 믿어요. 부디 꼬옥 건강하시구 건필하시길 빌어요.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 김 연 2011/12/18 [22:11] 수정 | 삭제
  • 윤하님, 절 기억하실 지 모르겠지만 글 잘 읽고 있어요. 그런데 용기가 없어서 한 번도 답글은 안 단 것 같은데..저 아래 프랑스 남부 도시 글 읽다 기억이 났어요. 그 도시, 윤하님이 추천해서 저도 가 본적이 있다는 걸. 그래서 제 이멜을 뒤졌는데 이멜 주소를 찾을 수 없어 여기다 이렇게 쓰기로 했답니다. 생각해보니 이멜이 아니라 언니네 쪽지를 주고 받았던가요? 그러고보면
    참 오랜세월 동안 제가 윤하님을 알고 지낸 거네요.

    항암 5주년 이란 글 읽고 가슴이 철렁했어요. 항상 조바심내면서 윤하님 글을 기다렸는데 지난 한달은 또 까맣게 잊고 있다 생각이 나서 들어왔더니 글이 몇 개 밀려 있었어요.
    이런 긴 답글은 처음이라 우선 여기까지 쓰고..
  • rhi 2011/12/16 [07:23] 수정 | 삭제
  • 커다란 문화 차이를 느끼게 되네요. 알 권리, 그만큼 자녀 성장에 바탕되는 신뢰가 크기에 가능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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