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

<꽃을 던지고 싶다> 13. 일상을 지배하는 기억

너울 | 기사입력 2012/08/11 [01:05]

계단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

<꽃을 던지고 싶다> 13. 일상을 지배하는 기억

너울 | 입력 : 2012/08/11 [01:05]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에게는 일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계단에 대한 공포이다. 얼마 전까지도 왜 그리 계단으로 다니기 싫은 지 알 수가 없었다.

 
계단에 대한 거부는 일상의 많은 부분을 불편하게 했다. 예를 들면 지하철을 타면 한 시간이면 다닐 수 있는 거리를 난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3시간을 걸려서 다니기도 한다. 또한 지하도나 육교를 피하기 위해 돌아가는 일은 나에게는 당연한 일상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더 부지런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불편함이 나에게 계단에 대한 거부감보단 크지 않았다.
 
지금도 어쩔 수 없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손잡이를 잡고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앞을 살피며 걷게 된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내 기억에는 오래된 습관이었고, 어느 순간 계단은 나에게 공포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계단 앞에 서게 되면 나는 안정감을 잃게 된다. 왠지 불안하고 누군가 나를 공격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고 만다.
 
우연히 나의 습관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나에게 ‘왜 계단에 거부감이 드는 지 생각해 보라’는 조언을 했다. 최근 사진처럼 기억이 떠올랐다. 무의식적으로 일상을 지배하던 기억이…….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그 때의 기억.
 
등굣길에서 피해를 경험하고 학교 가는 길이 나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학교를 때려치우고 집을 뛰쳐나와 안전한 곳을 찾을 만큼의 용기도 부족했다.
 
산 정상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길은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가장 편한 길인 내가 다니던 길, 대부분의 학생들도 선호했던 길이다. 이 길은 흔히 산에 있는 도로처럼 경사가 조금 있게 산을 에두르는 길이였다. 또 하나는 한참을 돌아 마을을 끼고 가는 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을 직선으로 가르는 계단으로 이어진 길이었다.
 
나는 그 날의 사건 이후로 산을 에두르는 길을 피하게 되었다. 마을로 난 길은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치는 게 싫어서, 산을 직선으로 관통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 계단 길은 중간에 집이 몇 채 있고 사람도 별로 다니지 않아 편했지만, 무엇보다 안전할 것 같았다. 계단을 올려다보면 누가 있는 지도 알 수 있고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피해를 경험하고 한 열흘쯤 지나서 계단으로 다니는 것에 안정감을 느끼고 있던 하루였다. 그 날도 별로 다를 것 없는 일상의 시작이었다. 더 이상 학교를 일찍 가는 일은 없었다.
 
그 날은 이상하게도 학교에 가기 싫었다. 하지만 집에 가부장이 있었기에, 나는 집에 있는 것을 포기하고 조금 늦게 학교로 향하였다. 학생들이 대부분 등교를 마친 시간이어서 학교에 가는 길은 한산했다.
 
산 입구에 다다랐을 때 학교 쪽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멀리서 그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선명한 것은 그 남자의 옷이었다. 다행히도 그 남자는 나를 못 본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계단이 있는 골목으로 몸을 피하였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계단은 안전하게 빨리 학교로 인도해 줄 것이라 여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계단 위를 바라보면서 지속적으로 누가 내려오는지 확인 했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드니 한 아주머니가 내려오고 계셨다. 마음을 쓸어 내렸다. 이제 모퉁이만 돌면 학교 앞이었다.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그 남자가 숨어 있다가 나타났다. 몸을 돌리려 했을 때 그 남자의 억센 손이 나를 잡아챘다. 나는 “살려주셔요.”를 연발했다. 죽음과 마주하는 듯한 공포. 그 공포를 다시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의 몸은 마음과 상관없이 두려움에 떨리고 있을 뿐 다리와 목소리는 마비되어 있었다.
 
그는 이번에는 더 익숙하게 나를 통제했다. 나는 그 사람의 ‘걸으라’는 말 한 마디에 거부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순응하게 되었다. 주변을 살피어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몸에서 떨림이 느껴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그 남자의 억센 팔에 뒷덜미를 잡혀 끌려가는 동안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나를 다시 그 장소로 끌고 들어갔다.
 
방공호 안의 어두움, 그 어둠을 통과하는 빛 줄기, 그리고 쾌쾌한 냄새. 어지럼증, 쏟아지는 눈물. 떨리는 몸.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 두려움. 공포.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치 나의 영혼이 분리된 듯 강간당하는 나의 모습을 그 사람의 뒤에서 보고 있다. 꿈 속에서처럼 황토색 점퍼와 청바지가 보인다. 그리고 아무 느낌이 없다. 어두운 그 곳이 갑자기 환해지는 듯하고 나는 계속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아이는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다. 마치 죽은 시체와 같다. 차라리 저 아이가 죽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기억은 여기에서 멈춰 있다.
그 날 이후 나는 기억을 잃었다.

 
오랜 시간 25년 동안 이 날의 사건에 대한 기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후의 기억도 없다. 나는 그곳을 어찌 나왔을까? 학교는 갔던 것일까? 어떻게 그 남자의 뒤에서 강간당하는 나를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일까? 마음에 분열이 일어났던 것일까?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계단에 대한 기억은 최근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남자에게 두 번의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희미한 기억이었을 뿐이고, 그 날의 기억은 더욱 흐릿했다.
 
그 날 나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슬펐을까? 외로웠을까?
기억은 내 편이라서 일까? 여전히 그 이후의 기억이 흐릿하다.
잃어버린 시간. 설령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고통이라 기억 너머에 존재하는 시간일지라도 이제는 알고 싶다. 어릴 적 내가 혼자 감당했을 그 고통의 크기를. 그 방공호를 빠져 나와 내가 어디를 향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알고 싶다.

 
이유도 모른 채, 일상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나를 원망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왜 그리 계단이 싫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안전하리라 믿었던 믿음은 너무도 허무하게 침해 당했다. 그 날의 사건은 나의 기억 저편에서 나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가 25년 후에 꿈으로 나를 이끌었다.
 
기억을 떠올린 후, 계단을 거부하는 나를 더 이상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계단에 대한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날의 사건을 떠올리고 여전히 그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공포와 거부가 계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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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 2013/01/09 [09:03] 수정 | 삭제
  •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가 고민되기 시작합니다..
  • 이렇게 2012/09/01 [14:06] 수정 | 삭제
  • 여성이 인간으로서 대우 받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수치스러워해야하는 이상한 세상에 대해 말해 주는 일이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의 인권과 인격을 무참하게 만들 놓는 생명체에 대한 단죄와 대항에 양성 모두 연대 했으면 좋겠습니다. 성폭력의 문제는 여성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인권과 인격 말살의 문제입니다!!!!!!!!!!!!!1
  • 주디 2012/08/11 [23:38] 수정 | 삭제
  • 생존해서 이렇게 소통해주심에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응원할께요.. 님은 정말 귀한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