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꽃을 던지고 싶다> 14. 공주라 불리던 아이

너울 | 기사입력 2012/08/21 [23:22]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꽃을 던지고 싶다> 14. 공주라 불리던 아이

너울 | 입력 : 2012/08/21 [23:22]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아이. 죽어야 했던 아이. 질긴 생명력을 가진 아이. 어릴 적 나는 스스로에 대해 줄곧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믿으며 성장했다.

 
어른들은 나를 보며 항상 신기해하셨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의 강한 생명력을 느끼시는 듯 놀랍다고들 말하셨다.
 
맏며느리로서 아들을 낳아야 했던 엄마는 언니 둘을 낳고 내 바로 위로 오빠를 낳았다. 아들을 낳아서 이제 자식을 그만 낳고 싶으셨지만, 아들 하나 더 낳으라는 할머니의 강요에 못 이겨 나를 임신하셨다. 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임신한 몸으로도 아버지로부터의 구타와 농사일을 감당해야 했던 엄마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배가 점점 불러왔지만 이상하리만큼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얌전한, 순하디 순한 뱃속의 아이가 어느 순간 태동이 약해지고, 엄마의 몸이 부어서 신발조차 신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산부인과에 찾아가셨다고 한다.
 
임신중독이라는 진단과 함께, 의사는 아이가 거꾸로 놓여 있는데 그대로 두면 산모도 아이도 죽는다며 낙태를 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너무 달수가 찼고, 위험한 수술이라 수술비만 집 한 채 값이었다. 엄마의 말대로라면 내가 태어나던 해에는 쌀 한 가마니가 2만원이었는데 병원비가 70만원이 필요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 돈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죽기를 결심하고 나를 집에서 낳았다. 그렇게 70만원이 없어서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나였다.

 
해가 질 무렵 한참의 진통 끝에 엄마는 나를 낳았다. 돈이 없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나는 2kg도 안 되는 미숙아였다. 머리가 아닌 다리부터 세상에 내놓은 아이는 태어나도 곧 죽을거라는 의사의 말에 이름조차 얻지 못했다.
 
또 딸을 낳아 미역국조차 얻어 먹지 못했던 엄마와 젖조차 빨 힘이 없는 아이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세상에서 만나게 되었다. 한 사람은 평생 아내구타를 감당해야 했던 여성으로,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지켜보며 성장하고 또 성폭력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여성으로.
 
시댁이 공주에 있었고 내가 딸이었기 때문에 나는 ‘공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나에게 다른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입학 전에 자신의 이름 정도는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언니의 말에 내 이름 석 자를 배울 때였다. 오빠는 아들이라는 이유로 온 집안의 어른들이 모여 항렬에 맞는 이름을 얻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장손이라는 대접을 받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나는 여자아이란 이유로 제대로 된 이름을 얻지 못했고, 집 안의 친척들에게도 이름조차 알 필요가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모진 삶을 살아야 할 운명이었는지, 질긴 생명은 곧 죽을 거라는 말에도 단 한 차례 병원에 가보지 못하였으나 죽지 않고 살았다. 울지도 못하고 젖조차 물지 못하던 아주 약한 생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하면서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자, 출생신고를 해야 해서 엄마는 갑자기 이름을 지어서 호적에 올리셨다. 그런데 할머니는 엄마가 출생신고를 하신 줄 모르고 ‘공주’라는 이름으로 따로 출생신고를 하였다. 호적에 나는 쌍둥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후 공주는 사망 처리가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친척 분들은 나를 공주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혼자 태어났지만 쌍둥이로 되었기에 두 배로 질긴 삶을 살 거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랐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어서도 엄마는 여전히 나의 탄생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시곤 하였다. 꼭 죽을 것만 같았는데 라고 말을 하시면서....
 
중학교 다닐 적의 어느 날, 그 날도 괴로움에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서 나를 왜 낳았냐며 엄마에게 대든 적이 있다. 엄마는 내가 아빠 때문에 그런 거라고 여기셨고 ‘네가 술이라도 안마시고 어찌 제 정신으로 살겠냐’ 하며,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
 
처음이었다. 엄마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신 것이. 항상 내가 태어나서 참고 사신다고 하셨는데…. 맞고 사는 것이 나 때문이라고, 몸이 약한 내가 엄마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참으신다고, 두고 떠나면 내가 죽을 것만 같았다고 하셨다.
 
그 말에 나는 화조차 내지 못하는 아이로 성장했는데…. 항상 스스로를 죄인처럼 여겼다는 걸 엄마는 알까? 힘든 엄마를 더욱 힘들게 한 나에 대해 저주스러운 마음. 어릴 적 나에게 ‘저게 아들이었으면 아빠 마음을 잡을 수 있었을 거다’ 라던 엄마와 할머니의 대화를 듣고 난 후 원죄처럼 저주했던 나의 존재. 가부장의 외도조차 내가 ‘여자아이’이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여야 했던 순간.
 
정말 할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가부장의 외도도, 구타도 멈추었을까? 엄마는 조금 더 편한 삶을 사셨을까?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엄마의 그 말에 내 안에 있는 분노가 조금은 잦아드는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난 술과 담배를 끊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딸이고, 가족이라는 사실. 누군가에게는 목숨 걸고 지켰던 생명이라는 사실을 나를 강간했던 사람들은 몰랐던 것일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던 아이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아이로 믿게 만들었던 그 사건들이 나에게는 여전히 아프고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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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진원길사랑 2012/10/24 [14:03] 수정 | 삭제
  • 저도 어릴때부터 가족중의 저 하나 중증장애로 외롭게 컸습니다.
    글을 쓰신 분 처럼 장애가 무슨 벌처럼 느껴지기도 했죠.
    공감됩니다.
  • 빛나는 프로 2012/10/24 [13:49] 수정 | 삭제
  • 괜찮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예요
    당신은 강한 사람입니다. 과거의 당신에게 말을걸고 위로해 주네요
    실컷 울고 일어나십시요 미래의 당신을 위해
  • 나도엄마다 2012/10/19 [11:12] 수정 | 삭제
  • 요즘 자기몸을 함부로 여겨 그런지 몰라도 자살율이 높아지는 것 같다. 다 사연은 있겠지만 이기사에서도 보여지듯이 누군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는걸 우선 자신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람들도 자기 주위에 사람들이 소중하듯 싫어하는 사람들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만 안다면 우리 모두 귀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 bank629 2012/10/15 [10:06] 수정 | 삭제
  • 내가 소중하면 다른사람도 소중한 법이다. 모든 사람들이 존중받아야 하는 소중한 분들인데도 가족을 마치 소유물처럼 여기고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을 뭐라 불러야 할지 분노를 느낄 때가 많다. 엄마의 처절하고 간곡한 마음이 담겨 있는 말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인듯 싶다.
  • 하늘래기 2012/10/14 [11:28] 수정 | 삭제
  • 이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 중 소중하지 않은 존재는 없습니다.
    자식의 아픔은 곧 엄마의 아픔이죠. 더 큰 아픔이라 같은 엄마로서 마음이 짠하네요.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은 엄마의 진정한 심정일거예요.
    힘내시고 파이팅하십시요.
  • jejuin1218 2012/10/13 [19:31] 수정 | 삭제
  • 엄마로서 삶이 참 고단하셨겠지만 그렇다고해도 자식에게 '살아줘서 고맙다'는 그 말 한마디는 앞에 있는 자식에게뿐 아니라 어머니 자신에게도 용기를 주기 위한 몸부림이였을 거 같네요. 힘내시길 바랍니다.
  • 무시거라 2012/10/13 [15:34] 수정 | 삭제
  • 그건...... 아마도 어머니 스스로도 버텨지는 삶의 의미였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 지독한 폭력을 겪은 당신에게 고개 숙여 위로드립니다. 힘 잃지 마시길.
  • 작은나무 2012/10/10 [12:48] 수정 | 삭제
  • 엄마는요. 그래요. 세상의 모든 자기 아이들에게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라는 말을 할 거예요. 당신 삶이 어떻든지간에.... 엄마이니까요. 엄마, 보고싶습니다.
  • 히데미 2012/10/03 [18:44] 수정 | 삭제
  •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하는 생명은 없습니다. 귀한생명인데 너무도 힘든 생을 사셨군요.상처 분노 다 쏟아내시고 그래도 세상은 살만 한다고 생각할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 iwink4you 2012/10/01 [22:44] 수정 | 삭제
  • 마음이 짠해져 오네요.
    성폭력, 폭력으로 얼룩진 삶 속에서 지내온 시간들, 또 그 속에서 모진 삶을 살아오셨던 나날들, 그 무엇으로도 치유가 안 되겠지만, 힘내세요.~!! 응원을 보낼께요.^^
  • 내가 사는건 2012/09/28 [23:30] 수정 | 삭제
  •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참 좋은 말인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겐 소중한 딸이고 누군가에게는 목숨걸고 지켰던 생명... 아무리 험난한 일을 당했어도
    이겨낸 당신! 살아 있어 줘서 고맙습니다.
  • 발칙한양 2012/08/27 [17:30] 수정 | 삭제
  • 너울 님. 살아있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이 세상에는 그런게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 라고 하는 말들... 그런데 실제로 "있는"일이지요. "정말 할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가부장의 외도도, 구타도 멈추었을까? 엄마는 조금 더 편한 삶을 사셨을까?" 이러한 질문은 폭력의 맥락과 배경을 잘 모르는, 감추는 가부장제 사회구조에서 던지는 질문 일 거에요. 그렇게 말하는게 화가 나지만, 같은 여성이라고 해서 꼭 공감하고 폭력피해에 대해서는 잘 아는게 아니니까요. 너울 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이 글로 하여금 혼자서 사무치게 외로워 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큰 힘이 될 거에요. 지지합니다^^
  • 여름 2012/08/24 [21:16] 수정 | 삭제
  •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잘 읽고 있습니다.
    너울님의 상처에 같은 여성으로 아픔을 공감하며 분노하며 읽고 있습니다만.....
    혹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가주의 글쓰기가 아닌지.....회를 거듭할 수록 이런 의구심이.....
    죄송합니다.....
  • 마음아놀자 2012/08/23 [13:41] 수정 | 삭제
  •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딸이고, 가족, 목숨걸고 지켰던 생명이라는... 그렇기에 이렇게 용기있고 당당한 목소리를 내실 수 있는 힘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자주 잊고 지내는 내 존재의 힘과 존엄함을 일깨워 주는 글 고맙습니다.
  • 하늘해 2012/08/22 [15:15] 수정 | 삭제
  •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모진 고통 속에서 살아낸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몸과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길 꼭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살아 있어 희망의 증거가 되어 주세요...기도합니다
  • 고도 2012/08/22 [08:32] 수정 | 삭제
  • 이건 여성의 세력이 남성의 세력에 밀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부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여성이 파워를 가질 때에 해소될 문제라는 것. 여성이 존엄하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 내가 존엄한 것이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아닐 터.

    가정폭력범이나 성폭력범은 범죄자일 뿐입니다. 연쇄살인범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없듯이, 그렇게 건조하게 바라볼 일.